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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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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2,652회 작성일 10-11-2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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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과 가깝게 지냈던 사회 원로들이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회고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언급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재임기간에 비례해서 대통령의 말이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집권 초기에는 다른 사람의 말을 주로 듣는 쪽이다가 후반기로 갈수록 자기 말만하는 경향이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어떤 이는 독재정권의 붕괴를 예감하고, 어떤 이는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을 안타까워하며, 또 어떤 이는 민주적 시스템의 부재를 한탄한다.

그렇다. ‘말이 많다’는 것은 단순히 ‘침묵’의 상대적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호간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위험신호다. 이런 ‘언로(言路)’의 문제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발생한다. 어쩌면 개인적이고 사소한 관계에서 나타나는 위험신호에 둔감하다가 결국 사회적이고 치명적인 언로의 문제에 봉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30대 후반쯤을 넘긴 남자들의 ‘다언(多言)’을 걱정스럽게 생각하는 편이다. 특별히 남자라고 지칭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의 수다는 말의 양은 많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 형식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의 말은 일방적이고 부적절한 경우가 많아진다. 질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남자들의 모임에서 대화를 주도하고 발언 기회를 많이 갖는 사람은 그 중 사회적 지위가 가장 높거나 최연장자인 경우가 많다. 공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이 규칙은 충실하게 지켜진다. 심한 경우 노트만 없을 뿐이지 대통령 말씀을 필기하는 예전 국무회의의 풍경이 또 다른 모습으로 재연된다.

어느 부서 회식자리, 윗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한 팀장은 ‘모두 팀원들 덕분’이라며 지속적인 신뢰를 강조한다. 그러다 관운장의 신의를 언급하던 팀장의 얘기는 적벽대전의 상세한 묘사로까지 이어진다. 이쯤 되면 몇몇은 이야기 대열에서 이탈하기 시작하지만 이미 제 흥에 도취된 팀장은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는 한두 명의 시선에 의지해서라도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애쓴다.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하는 에피소드라고 항변하고 싶은 남자들이 많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심리학자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특히 남자들일수록 이런 ‘위협자의 환상’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고 분석한다. 여기서의 권력이란 단순히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선배와 후배, 상사와 부하, 부모와 자식, 갑과 을의 관계에서 우월한 지위에 있는 자를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권력자는 상대방이 기꺼이 내 말을 들어주는 것은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환상을 갖는다고 한다. 물론 착각이다. 상대방은 그 말이 의미 있고 유익해서 열심히 듣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있을 뿐인 것이다.

박학다식함을 자부하는 아버지 때문에 걸핏하면 한두 시간씩 ‘위협자의 환상’에 시달리던 아들이 ‘아버지 얘기가 너무 지루하다’고 엄마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엄마는 느낀 그대로 아버지에게 얘기할 것을 충고했는데 고등학생인 아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말을 듣고 마음의 상처를 받을 아버지가 안쓰럽기도 했고,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너 이제부터 과외비 끝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단다. 그래서 ‘다언’의 문제는 결국 의사소통의 문제로 귀결된다.
아직도 젊은 연예계 후배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50대 후반의 어느 대중스타는 그 비결을, 후배들과 모인 자리에서 무언가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때마다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말을 줄이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입 밖에 내놓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해당하는 일이다. 성욕이라는 본능이 부적절하게 표출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 의식적인 노력을 하듯 후배나 부하직원들과의 자리에서 한 달에 한두 번쯤 ‘침묵의 날’이나 ‘과언(寡言)의 날’을 갖길 권한다. 하기야 이렇게 주장하고 선동하고 질타하는 말들도 너무 넘쳐나는 세상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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