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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한국인’ 새미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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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343회 작성일 10-08-08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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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 美선수로 참가… 다이빙 부문서 연속 금메달
 ▲ 선수시절 날렵한 새미 리의 다이빙 동작 고교땐 백인 제치고 학생회장 피선… 의대졸업후 전문의로 활동
지난 100년을 통틀어 미 주류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한인들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미 50여년 전 전세계에 이름을 떨친 코리안 아메리칸이 있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우승한 손기정 선수처럼, 1948년 성조기를 달고 한국의 위상을 떨친 새미 리(Sammy Leeㆍ82) 박사다. 그는 1월 1일 미국 최대 신년 축제인 ‘로즈 퍼레이드’에서 ‘미주한인 이민100주년 기념’ 꽃차에 탑승해 100만 시민들로부터 갈채를 받았다. (편집자)
미국 전체를 암울하게 만들었던 경제공황이던 1932년. 로스앤젤레스(LA) 거리를 한 중고트럭이 달리고 있었다. 그 당시 경기회복의 일환으로 LA는 올림픽대회 축제 준비로 분주했다. 식품점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새벽 야채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싣고 돌아가던 중 콜로세움 경기장을 지나게 된 12세의 소년은 오색찬란한 만국기가 펄럭이는 광경을 보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파파, 왜 저렇게 많은 깃발들이 걸려있나요?”
“다음주면 올림픽대회가 열리기 때문이지.”
“그게 뭔데요?”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회인데 전세계 운동 선수들이 참여해 종목마다 최고 우승자를 가리는 영광스러운 자리란다.”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파파, 저도 올림픽 챔피언이 될 거예요.”
“무슨 종목으로?”
“지금은 모르겠지만 곧 찾아낼게요.”
이날 이후 LA 콜로세움을 지나며 경기장에서 터져나오는 함성소리를 들으며 올림픽 챔피언의 꿈을 키운 이 소년은 훗날 1948년 런던올림픽과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미국 선수로 참가해 다이빙 10m 플랫폼 부문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획득한다. 그는 158㎝의 단신에도 불구하고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수영 다이빙 부문에서 금메달을 쟁취하는 영예를 안았다.
다이빙에서 은퇴 후 지도한 제자들 중에는 로마올림픽(60년)과 도쿄올림픽(64년)에서 금메달을 딴 보브 웹스터와 LA올림픽(84년)과 서울올림픽(88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그렉 루가니스 등이 있다. 특히 ‘다이빙의 황제’로 불렸던 루가니스는 서울올림픽 때 남자 스프링보드 예선에서 점프 직후 보드에 머리를 부딪쳐, 다섯바늘을 꿰매는 부상을 입고서도 금메달을 따내 갈채를 받았던 선수로 유명하다.
새미 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후 닉슨과 레이건 대통령 시절 미국 올림픽선수단 임원으로도 활동했으며, 국제수영 ‘명예의 전당’과 미국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각각 올라있다. 그는 스포츠맨으로만 유명할 뿐 아니라 이비인후과 전문의로도 명성이 높다.
●“어렸을 때 꿈은 전투기 조종사”
새미 리는 캘리포니아주 프레스노에서 태어나 LA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이순기씨는 1905년 초기 이민대열로 하와이에 왔다. 이씨는 2년 후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LA로 이주했고 옥시덴털 대학에 진학했다. 이같은 인연으로 옥시덴털 대학은 나중 새미 리를 포함해 누이 달리와 메리 숀, 그리고 새미 리의 아들 새미 2세와 딸 파멜라까지 진학하는 ‘패밀리 인스티튜트’가 돼버렸다. 그는 자신의 손녀·손자들도 커서 이 대학에 들어가기를 소망하고 있다.
필자는 1월 20일 미국의 마틴 루터 킹 연방공휴일에 LA 근교 오렌지카운티 헌팅턴비치 자택에서 중국계 부인 엘레노어와 함께 은퇴생활을 보내고 있는 새미 리를 방문했다. 바다로 향한 거실 한쪽 벽면 전체가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주변에 보트들이 묶여있는 모습이 마치 커다란 풍경화를 걸어놓은 듯했다. 거실에는 올림픽 메달을 비롯해 트로피, 올림픽 성화 등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다.
“젊은 시절엔 공부 잘하는 학생보다 운동선수를 더 좋아했습니다. 싸움을 아주 잘 한다거나 달리기를 잘 하는 친구가 내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나도 동료 학생들로부터 그런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었어요.”
1930년대 당시 LA에 있는 공공수영장은 노동절인 9월 3일에 문을 닫아 다음해 메모리얼 데이인 5월 말쯤 오픈했다. 사설수영장이 있었지만 새미 리와 같은 유색인종에게는 입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YMCA에서조차 일주일에 한 번 날을 정해 사용하게 했기 때문에 연습하는데 지장이 많았다.  ▲ 손기정 옹(왼쪽)과 다정한 한때 모습. 새미 리는 손 옹과 1947년 처음 만난 후 교분을 지녀왔다. ●런던 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 만나
“다이빙 선수로 내 소망을 이루는 데 무엇보다 아버지의 가르침이 컸습니다. 내가 다이빙으로 올림픽 챔피언이 되겠다고 하자 100%의 지원을 약속하면서, 몸만 단련하지 말고 정신도 함께 수련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의대에 들어간다는 조건하에서 다이빙도 열심히 하라고 권유하셨습니다. 이유는 의사직은 소수민족이 차별을 받는 미국사회에서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존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원래 나의 꿈은 전투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과 싸워 전쟁의 영웅이 되는 것이었죠. 하지만 아버지는 전쟁에서 메달을 서너 개 걸고 영웅이 돼 돌아와도 백인들에게는 동양인이 그저 외국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아버지에게 꼭 의사가 될 것을 약속했습니다.”
거실 진열대에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받았다는 올림픽 투구를 표본을 떠 새미 리에게 선물한 장식용 투구도 보였다.
“손기정 선수와는 1947년 처음 만난 이후 런던올림픽에서 다시 만나고 이어 올림픽이 개최될 때마다 만났습니다. 1960년도 로마올림픽 마라톤에서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손기정은 나에게 ‘부끄럽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맨발로 완주한 아베베는 베를린올림픽에서 신발을 신고 뛴 자신보다 14분을 더 빨리 달렸다고 하더군요.”
새미 리는 서울올림픽 때 손기정 선수와 함께 성화를 들고 올림픽구장 트랙을 한 바퀴 완주하기를 희망했었다며 이제는 그 소망을 영원히 이루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그는 손기정을 지난해 부산아시안게임 중에 만나보길 원했었다. 그러나 당시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로부터 ‘개막식과 폐막식 입장권만 무료’라는 통보를 받고서 한국 방문을 단념했다.
지금보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절 젊은 날을 보낸 새미 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일화들이 많다. 그 중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3ㆍ1운동 이야기를 듣고 이튿날 아침 이웃에 사는 와타나베라는 일본인 집에 칼을 들고 찾아가 “죽이겠다”고 소동을 벌여 아버지가 사과하는 촌극을 빚은 적이 있다.
그러나 새미 리는 일본인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게 됐다. 진주만 사건 이후 일본인으로 오인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새미 리 또한 가슴에 ‘나는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란 배지를 달고 다녔다. 하루는 수영 챔피언대회를 위해 기차여행을 하던 중 한때 알고 지내던 일본계 미국인 수영 선수들과 마주치게 됐다. 그들은 새미 리를 보고 반가워 하며 다가오다 가슴에 단 배지를 바라봤다.
“내 자신이 이런 배지를 달고 있다는 게 너희들 보기에 너무 민망스럽네.”
“샘, 걱정하지 말아. 우린 다 이해하고 있으니까.”
그 사건이 있은 후 새미 리는 다시는 배지를 꺼내 가슴에 달지 않았다.
●LA 프랭클린 고교 학생회장 지내
학교 성적에서도 우등을 놓치지 않았던 새미 리는 LA 프랭클린 고교를 다닐 때 학생회장 선거에 나서기도 했다. 하루는 교감이 그를 불러 “우리 학교에서는 비백인계가 학생회장이 된 적이 없다. 마음에 상처 받지 말고 그만 포기해라”고 말렸다. 그러나 새미 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거운동을 계속해 끝내 당선됐다. 교감은 의아해했다.
“정말 알 수 없구나, 백인이 아닌 네가 당선됐다니.”
“선생님, 학생들은 저를 볼 때 (동양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들과 같은 미국인 친구로 생각한답니다.”
먼 훗날, 새미 리는 올림픽 메달을 딴 후 ‘새미 리의 날’로 선포한 모교 프랭클린 고교에 금의환향해 후배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의 꿈을 짓밟는 잘못된 관습에 굴복하지 말길 바란다.”
새미 리가 첫 집을 장만할 때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해프닝이 있었다.
지금은 제2의 코리아타운이라고 불리는 오렌지카운티는 오래 전부터 백인보수지역으로 유명하다. 새미 리는 지난 45년 간 이 지역에서 살고 있다. 1955년 의무관에서 제대한 그는 오렌지카운티로 돌아와 집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으나 백인 주민들은 하나같이 집을 팔기를 거부했다.
새미 리는 당시 도쿄에 CBS 특파원으로 있는 친구 보브 피어포인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피어포인트는 ‘미국 올림픽 챔피언 새미 리가 인종차별로 인해 집을 사지 못한다’라는 기사를 전세계로 타전했다.
뉴스를 본 새미 리의 고교동창 한 명은 부동산 업자를 찾아가 한방 날리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 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은 그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의 옆집으로 이사 오라고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 같은 뉴스가 보도된 후에야 새미 리는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 '다이빙의 황제'라는 그렉 루가니스(왼편)는 새미 리가 키워낸 제자로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에서 다이빙 부문 금메달리스트가 됐다.(맨위)
새미 리는 은퇴 후에도 늘 풀장을 찾는다.(가운데)
2003년 미주한인 이민100주년을 기념하는 리셉션행사에서 만난 박찬호 선수와 포즈를 취했다.(아래) 새미 리는 1947년 USC의대를 졸업해 44년 간 이비인후과 전문의로 평생 일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곧 우등 성적을 지켜 온 그였지만 자신이 모든 면에서 1등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정직한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그는 다짐했다.
요즈음 새미 리는 손자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그는 살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이나 원했던 일 모두 이룰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부인을 가리켜 “60여년 전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지금까지 행복하게 손자, 손녀를 돌보며 살 수 있어 기쁘다”고 덧붙였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한국말을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새미 리는 심장수술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지만 운동은 꾸준히 해오고 있다. 오랫동안 테니스를 쳐온 그는 힘이 들어 골프로 전환했다며 “그렇게 짜증나는 운동은 처음”이라고 소감을 피력했다. 72세에 골프를 시작하고도 핸디캡은 25 수준이다. 한마디로 운동에는 소질을 타고났다. 지금도 일주일에 4~5번은 수영을 하러 간다.
●“말보다 행동 앞서는 사회 됐으면”
미국에서 코리안 아메리칸으로 살아 오면서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은 조언에 대해 물었다.
그는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폄하하지 말고,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노예처럼 보지 말며,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하찮게 생각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대로 행동하고 살면 세계는 평화로울 것입니다”라고 거창하게 나왔다.
“이 말은 내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연설을 듣고 깊이 감명을 받아 마음 속에 새겨둔 말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그는 미국에 있는 일본인들을 격리시켜 수용소에 몰아넣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은 행동으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이 앞서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일본인 얘기가 나오자 새미 리는 다시 옛날을 회상했다. 그에겐 어린 시절 일본군과 싸우는 전쟁놀이를 함께 한 죽마고우가 있다. 그 친구는 다름아닌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에 배속된 일본인 부대를 지휘해 유럽 전선에서 전공을 세운 한인계 김영옥 예비역 대령이다.
새미 리는 수년 전 LA 다운타운의 보나벤처 호텔에서 일본계 미군 전422부대가 김영옥 대령의 공적을 기념하는 행사를 갖는 자리에서 친구와 주고받은 말을 떠올렸다.
“친구여, 기억하는가. 어린시절 우리가 일본군을 때려부수는 총싸움 놀이를 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그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으니 말이야.”
“세상이 많이 변했지.”
그렇다. 시대는 변한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도 새미 리가 이룩한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만은 계속되고 있다.
(LA(미국)=김지현 자유기고가 lia21c@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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