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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곤 Installation 오브제의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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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스티비아 댓글 0건 조회 3,084회 작성일 11-09-1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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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곤 Installation 브르클린 전시 1
 

 
글 | 김복기
변종곤의 뉴욕 스튜디오를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뉴욕에서 변종곤을 여러 차례 만났지만, 스튜디오를 방문할 기회는 언제나 바람처럼 비켜갔다. 나는 주변의 지인들로부터 변종곤의 스튜디오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스튜디오 가 봤지?”하면서 변종곤의 작품과 사람 이야기를 출발하는 것이었다. ‘뭔가 특이하긴 특이한가 보다’는 궁금증이 쌓여갔다. 화가 H는 변종곤 화실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울의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가 최근 나에게 이런 말을 건내줬다. “(변종곤)스튜디오에서 잠을 자다가 밤에 거리로 뛰쳐 나오고 말았다. 박물관 같은 스튜디오 안의 오브제들이 모두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세찬 기(氣)를 내뿜었다. 그 아우성에 눌려서…” 스튜디오란 게 한 예술가의 삶과 창작의 체취가 묻어 있는 물리적 정신적 공간임은 당연할진대, 변종곤의 경우 그 정기가 그렇게도 세차고 세단 말인가. 나는 변종곤 스튜디오를 희괴한 박물관이나 요상한 사원 같은 이미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변종곤의 스튜디오를 실견(實見)해야 했고, 그래서 급작스레 뉴욕으로 떠났다. 나는 케네디 공항에서 곧바로 브룩클린의 변종곤 스튜디오로, 그 베일 속으로 치고 들어갔다.
“스튜디오는 나의 학교, 나의 인생”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좁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1,2층과 정원을 합치면 100평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골동품과 공예품, 레디메이드 등 각종 오브제들과 책들이 사람을 덮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브제들이 주인처럼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가의 설명인 즉, 300평 건평에 6층 건물은 돼야 모든 물건들을 제대로 진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하나의 오브제들은 대부분 작가의 손길이 마무리된 완벽한 작품이었으며, 더러는 앞으로 작품으로 탄생하길 기다리는 재료이자 모티프인 상태도 있었다. 아예 진열이 불가능해 보물 가방 같은 곳에 차곡차곡 보관해 둔 오브제도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바로 눈 앞에 들어오는 오브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가만히 불러나갔다. 비행기, 성경, 불상, 바비인형, 마네킹, 안경, 모자, 구두, 시계…, 아~ 숨이 차다. 만물상이다. 그 종류가 글자 그대로 천태요, 만상이다.
주목할 것은 변종곤이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오브제들의 진열 방식이다. 효과적인 소장과 진열을 위해 오브제들의 정체화 작업은 피할 수 없는 일인 듯, 자연스레 마치 철물점 같이 ‘시각적 유사성’에 따라 오브제들을 배열했다. 비행기는 천정에 매달려 날고 있고, 시계는 벽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변종곤의 손길로 조합된 오브제 하나하나로 눈길을 돌리면, 그것은 마치 무차별적인 이종교배의 현장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동양/서양, 성/속, 과거/현재, 고대/현대, 문명/미개, 삶/죽음, 예술/키치, 고급/저급, 모던/프리모던, 싼 것/비싼 것, 무거운 것/가벼운 것, 영원/순간, 남/여, 오리지널/카피, 정지/움직임…등등 서로 이질적인 속성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아이보리코스트의 데드마스크가 피렌체의 천사상과 함께 서 있는가 하면, 워크맨을 귀에 꽂은 예수상이 불상 맞은 편에 서 있고,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누워 있는 예수의 유해가 수퍼맨 복장을 하고 있다. 작품은 비극적이리만큼 해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섬뜩한 독설을 품고 있다.
변종곤의 스튜디오는 뒤죽박죽의 카오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작가가 결벽증 환자처럼 조형적으로 완벽하게 정리해 둔 창작의 산실이다. 요컨대 카오스모스(Chaosmos)의 세계가 아닌가. 나는 그 혼돈 속의 질서 속에서 작품이 뿜어내는 기묘한 4차원의 세계, 마치 블랙홀 같은 시공으로 한없이 빨려들어갔다. 미키마우스 인형 속으로 들어가 보니 수수께끼 같은 카프카의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을 다시 맛본다. 도무지 이치에 닿지 않아 악몽을 꾼 듯한 기분, ‘부조리’로 부를 수밖에 없는 그 상황 말이다. 가면을 마주 보았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1999)에서 주인공(톰 크루즈)이 비밀 가면무도회에 들어가 인간 근원의 벌거벗은 성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장면과 오버랩되었다. 어느 나라 불상인지 날 보고 지긋한 미소를 지었다. 2003년 도쿄 모리미술관의 개관기념전으로 열린 〈행복(Happiness)〉의 전시 장면이 떠올랐다. 크메르 왕조의 여인 조각상과 댄 플래빈의 형광등 작품이 열반(Nirvana)이라는 주제로 나란히 걸려 있었다. 10세기 조각과 20세기 추상작품에서 인간 육체의 한계에서 해방되는 지복(至福)의 상태, 열반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리고 있었다.
______변종곤의 스튜디오는 살아 움직이는 대형 설치작품이다. 미술사에서 설치의 전시 방법을 시도한 사례로 흔히 다다이스트 쿠르트 슈비터스의 ‘메르츠 바우(Merzbau)’를 꼽는다. 그게 별 것인가. 주변에서 발견한 오브제를 작가의 집 지하실에서부터 쌓아 올려 집 전체를 하나의 환경미술로 제시한 것이다. 공간을 환경화한 것이다. 변종곤의 스튜디오는 자신이 살아왔던 지난 60년의 여정을 하루하루 일기를 쓰듯 송두리째 오브제로 옮겨놓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 공간에 변종곤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변종곤 ‘예술 종교’의 사원이 아니겠는가.
변종곤 이 스튜디오 자체가 거대한 한 점의 작품이다. 오브제들 서로가 맥락을 만든다. 나는 그런 기운을 참 좋아한다. 이 작품, 저 작품 내가 봐도 재밌다.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공룡을 주웠다. 공룡 뱃속에 작은 도자기, 옛날 애인 사진, 해골, 사람 뼈다귀, 철판을 넣어봤다. 이렇게 별의별 장난을 다 한다. 작품이니 돈이니 미리 생각하면 재미없다. 목적을 떠나면 작품이 마냥 즐겁고 강해진다. 나는 이 오브제들과 하루종일 이야기하며 지낸다. 내 친구들, 내 가족이다. 나는 이들에게서 따뜻한 체온을 느낀다. 비평가들은 날 두고 ‘스토리 텔러’라고 부른다. 그렇다. 난 이 오브제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이 스튜디오가 바로 내 학교요, 내 인생이다.
 
 
1970년대, 극사실 회화에 시대 상황을 담고
______1970년대 말, 나의 미술학도 시절, 변종곤은 당시 한국 화단을 풍미했던 극사실 회화의 선두주자로 큰 명성을 날렸다. 1978년 ‘새로운 형상성’의 기치를 내걸고 민전(民展) 시대를 열었던 동아미술제의 제1회전에서 변종곤은 영예의 대상을 따냈다. 이 무렵 그는 에콜 드 서울 같은 단체전에서도 마치 ‘사진 같은 그림’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줬던 젊은 스타 화가였다.
변종곤 대학을 졸업하고 1974년에 대구로 내려가 선생(대건고)을 하고 있었다. 당시는 유신 시절이어서 창작 활동의 규제가 심했다. 나는 그런 규제를 상징화한 그림을 주로 그렸다. 대구 앞산의 미군 비행장 활주로 풍경이 작품의 모티프가 되었다. 박정희의 인권 정책에 항의해 지미 카터 대통령이 미군을 철수시킨 뒤였다. 비행장이 마치 폐허의 풍경처럼 황량했다. 혼혈아, 양공주들이 주변 동네를 돌아다니는데, 도대체 이들은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미국의 필요에 따라 어느 날 논밭이 비행장으로 변하고, 그 땅에 3류 문화가 뿌리내리고, 이젠 폐허로 변해버리고…. 반미 감정이 울컥 치쏟았다. 이때부터 숨어서 비행장 기지를 촬영해 그림을 그렸다. 비행장 그림으로 동아미술상을 받았다. 이 무렵 작품 중에는 《타임》지 표지가 빨래줄에 널려 있고, 방독면이 한국의 논밭에 휘날리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또 지하철 계단에 마릴린 먼로의 얼굴이 바람에 날리는 그림도 있다. 미국이 이 땅에 남긴 흔적들, 그 분노의 표적들을 그려냈다. 또 대형 캔버스에 언더우드 타이프라이터를 확대해서 그렸다. 타자기는 지식과 언어,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구다. 유신 독재 상황에서 언론 자유의 통제를 타자기에 비유한 것이다. 또 박정희 암살사건을 다룬 잡지 《타임》 표지가 텅빈 콘크리트 바닥의 어두운 실내에 떨어져 있고, 창이 열려 커튼이 휘날리는 음산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______그는 1981년 돌연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무렵까지 국내 화단과 단절된 채 지냈다. 그는 왜 한국을 떠났을까?
변종곤 장발 단속을 했다. 신체발모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이건만, 신체 일부를 국가가 다스리다니. 자유의 구속에 난 예민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은 시인이고 화가였는데, 왜 우리 예술가들은 누드나 그릴까? 이 무렵 나는 사회적 이슈를 다룬 위험한(?) 작품을 그렸기 때문에 주위에서 “당신 잡히면 끝장이다”라고 걱정했다. 정보기관에서 전화가 걸려와 그런 그림 그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정국은 전두환의 군부통치로 치달았다. 결국 피하는 게 좋겠다는 주변의 권고를 받고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______변종곤은 왜 하필 미국으로 떠났을까? 당시 한국과의 미묘한 갈등, 반미 감정을 작품에 쏟아내던 그가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변종곤 프랑스는 역사가 너무 아름다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미국은 팝아트와 자연스레 연결되어 내 작품과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1인용 전기밥통 하나에 옷하고 물감만 챙겨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뉴욕에 도착했다. 3년 동안 할렘의 빈민가에서 비참하게 생활했다. 히터도 수도 시설도 없었다. 수시로 살인사건이 일어나 길바닥에는 늘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때 나는 혼자 이렇게 읊조리며 다녔다. “죽음을 호주머니에 넣고 사는구나.” 그러나 무얼 그리든 제약을 주지 않는 자유가 있어 행복했다. 돈이 없어 물감을 살 수가 없었다. 드라이버를 들고 길거리에 나가 냉장고, 라디오, 텔레비전 등을 뜯어 집으로 가져왔다. 그리곤 인간이 만든 기계는 모두 인간을 닮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기계가 사람 뼈 같기도 하고 신체의 일부 같기도 했다. 너무 외로워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재료의 혼합, 이거 참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오브제를 찾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할렘에서 느끼고 체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그때 내 예술 인생의 구호가 필요했다. 나는 외쳤다. “신이시여! 날 얼마나 좋은 작가로 키우려고 이런 고난을 내려주십니까?” 그때부터 나는 어떤 고난한 상황이 와도 인생을 행복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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