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톡스 - 말 못하는 남자를 위한 반창고, 회화 디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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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arvard 댓글 0건 조회 2,304회 작성일 11-05-20 21:01본문
좋은 것은 혼자 즐겨라!
요새 나홀로족들을 위한 공간이 많이 있다지요. 더 이상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것도 낯선 풍경이 아니고, 혼자 보는 영화, 혼자 마시는 커피 등 홀로인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것 중 그림 보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림감상은 어떤 ‘존재’를 만나는 체험이거든요. 마치 은밀하게 만나는 애인같은 존재인데, 그 애인과는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눌 수 있는 솔 메이트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은밀히 만나는 애인을 두려면, 타인과는 좀 별다른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조금은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겨놓은 멋진 애인을 친구와 공유할 수는 없으니까요! 밥 먹는 일과 품앗이는 누군가와 함께해야 제맛이지만, 예술을 즐기는 것만큼은 결국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까지 내게 있어 최고의 여행은 혼자 떠난 여행이었고, 최고의 영화는 혼자서 본 영화였습니다. 그림은 더더욱 홀로 와주길 원한답니다. 이렇게 예술을 감상하는 일은 철저히 홀로여야 하는 일이고, 그래야만 풍부한 컨텍스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미술계의 소중한 존재이셨던 고故 오주석 선생님의 일화는 미술계에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곤 합니다. 미술관 재직 당시, 어떤 옛 그림을 5시간 이상을 서서 보고 있었던 그의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분은 혼자 철저하게 몰입하며 즐김으로 무시간 속으로 저절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논어의 말씀이 미술감상에 그대로 적용되는 순간입니다. 그림을 보고 즐기는 경지가 되면, 그림은 위로와 치유를 넘어서서 삶을 변화시키는 잔잔한 혁명이 됩니다.
몸이 원하는 것은 몸이 그대로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차원일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길을 나서서 미술관과 화랑으로 나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생각하지도 마세요. 그때부터는 저절로 길이 열립니다. 하나의 그림이 다른 그림으로 인도해줍니다. 처음이 어렵지요. 하나의 그림과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은 확산되어 더 깊고 더 넓은 사랑으로 진화합니다.
아는 것이 디톡스다!
나홀로 즐기는 경지가 되면, 이것만으로는 무언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에 대한 좀 더 정교한 공부가 하고 싶어지는 것이죠. 바로 이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바로 인문학이지요. 하나의 미술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왜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술작품이 단순히 한 개인의 창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술사에 등재된 예술가들의 작품은 한 개인의 심리와 역사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당대의 시대정신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항상 현재를 전복시키는 저항과 혁신과 투쟁이 있는 작품들만이 미술사의 주요한 맥락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그중에서도 신화와 성서는 필수입니다. 19세기까지의 서양미술사는 신화와 성서에 대한 예술가들의 나름대로의 해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20세기 현대작가들도 자신만의 아주 도발적이고 신랄한 방식으로 이전의 텍스트들을 조롱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꼭 신화나 성서 같은 인문학이 아니더라도, 예술가들의 삶이나 에피소드를 조금만 알아도 그림은 참 재미있어지지요. 사실, 그림을 보고 마음을 치유하는 경지가 되려면 예술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우선되어야겠지요. 아니, 예술가가 아닌 한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생기면서, 그 작품을 이해하게 되고, 이렇게 알게 되면 한 존재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 삶이 그대로 예술로 전이된 그림을 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그런 그림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결국에는 살아남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림에서 치유를 받으려면, 일정 부분 예술가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감정이입되는 체험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술가들의 험난한 삶 속에서 나오는 상처와 고통을 진부한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왜 꼭 그렇게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재미있으면 안되냐는 것이죠. 물론 안될거야 없지요. 유감스럽게도 인간에게는 상처투성이의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이기적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처참하게 짓밟혔음에도 지속적으로 투쟁했던 예술가의 삶을 통해서는 분노할 줄 아는 힘과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뼈아픈 실연 속에서도 예술작품을 지속했던 예술가들에게서는 사랑과 배신마저도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배우고, 열등감이나 열패감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들에게서는 인간의 한계와 극복에 대한 메시지를 배우게 되지요. 그러니까 예술가들의 삶은 우리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미학을 전해주는 것이죠.
귀먹고, 눈멀고, 손이 망가져도 해내고 마는 예술가들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안전한 삶에 대해 반성하게 합니다. 삶에 안주하지 말고 본질을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Don’t be safe! Don’t be conventional!
피카소는 모든 (남성) 예술가는 페미닌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모든 사랑하는 자는 여자가 된다”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말과 오버랩됩니다. 현재로서는 세계적인 예술가도, 세계적인 컬렉터도 남자들이지요. 그것은 남자들이 세상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더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죽했으면 니체가 “남성은 철학자, 여성은 철학”이라고 말했겠어요.
결여된 존재는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수집하거나 욕망해야 하는데, 그게 예술이라면 해볼 만한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남자들이 미술과 친해지는 일, 그리고 그림을 구매하는 일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여를 보상해주는 일인 동시에 어쩌면 잃어버린 반쪽(플라톤의 양성체 신화에서 제우스의 벌로 분리된 남녀라는 차원에서)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에게 있어 그림과 친해지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간직한 아니마(anima, 남성성 속의 여성성)를 만나는, 참 아름다운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선 서점에 가서,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말랑말랑한 책부터 찾아보세요. P. 보나르라는 화가가 그러지 않았나요? 예술작품보다 예술가의 삶이 더 자신을 자극했기 때문에 화가가 되었다고요! 어쩌면 현대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드물게만 존재하는 천재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예술가의 삶과 만나는 일! 이것이야말로 미술과 근원적으로 친해지는 일의 시작 아닐까요?
그림을 사봐야 안목이 생긴다!
미술사가나 비평가들보다 화상들이 훨씬 더 그림을 잘 감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림을 많이 사고 팔아봐서, 그림에 대한 뛰어난 동물적 감각이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어마어마한 돈이 걸려 있으니 날이 선 감각으로 작품을 감정하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니까요. 여하튼 그림을 한 점도 사본 적이 없는 사람보다 그림을 사보고 실패도 해본 사람이 훨씬 더 탁월한 안목을 갖게 됩니다. 안목이라는 것은 손해나 실패 없이는 도무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화상들이나 컬렉터들은 잘못 사서 손해를 보는 일을 ‘피 같은 월사금’을 지불했다고 무용담처럼 얘기합니다. 이처럼 시행착오 없이 처음부터 좋은 미술품을 보는 눈이 생길 수는 없어요. 물론 있긴 하지요! 세계적으로 검증된 작가 혹은 시장에서 거래가 잘되는 작품을 사면!
요즘 반가운 소식 하나는 컬렉터층이 점점 젊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부모세대만큼 고가의 작품을 사지는 못하지만, 부모세대보다는 자기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참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더군다나 몇 개월치 월급을 모아서 아주 작은 작품부터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네요. 그들은 꼭 투자가치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마음에 드는 작품을 선별하고 구입하는 일부터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감상하는 일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이고 유기적인 예술계의 동참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컬렉터는 작품을 소장하고 걸어두고 감상하면서 일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어서 좋고, 화가는 다음 작품을 하는데 경제적, 정신적인 동기부여가 되어서 좋으니까요.
그래도 무얼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그럼 먼저 드로잉을 사보세요. 아직 저평가되어 있어 저렴한 드로잉이라는 장르는 사실, 예술가의 심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장르입니다. 슥슥 무의식적으로 그려낸 드로잉은 볼 때마다 어떤 한 존재의 섬광과도 같은 섬세한 내면을 보는 느낌이 든답니다. 이 봄이 가기 전에 내면의 빛으로 그린 그림을 한번 체험해보시길 바래요. 더 늦기 전에 말예요!
요새 나홀로족들을 위한 공간이 많이 있다지요. 더 이상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것도 낯선 풍경이 아니고, 혼자 보는 영화, 혼자 마시는 커피 등 홀로인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것 중 그림 보는 일만큼 아름다운 일은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림감상은 어떤 ‘존재’를 만나는 체험이거든요. 마치 은밀하게 만나는 애인같은 존재인데, 그 애인과는 속 깊은 얘기까지 나눌 수 있는 솔 메이트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은밀히 만나는 애인을 두려면, 타인과는 좀 별다른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조금은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겨놓은 멋진 애인을 친구와 공유할 수는 없으니까요! 밥 먹는 일과 품앗이는 누군가와 함께해야 제맛이지만, 예술을 즐기는 것만큼은 결국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까지 내게 있어 최고의 여행은 혼자 떠난 여행이었고, 최고의 영화는 혼자서 본 영화였습니다. 그림은 더더욱 홀로 와주길 원한답니다. 이렇게 예술을 감상하는 일은 철저히 홀로여야 하는 일이고, 그래야만 풍부한 컨텍스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미술계의 소중한 존재이셨던 고故 오주석 선생님의 일화는 미술계에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곤 합니다. 미술관 재직 당시, 어떤 옛 그림을 5시간 이상을 서서 보고 있었던 그의 모습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이 바로 그것이지요. 그분은 혼자 철저하게 몰입하며 즐김으로 무시간 속으로 저절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논어의 말씀이 미술감상에 그대로 적용되는 순간입니다. 그림을 보고 즐기는 경지가 되면, 그림은 위로와 치유를 넘어서서 삶을 변화시키는 잔잔한 혁명이 됩니다.
몸이 원하는 것은 몸이 그대로 영혼의 상태를 보여주는 차원일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길을 나서서 미술관과 화랑으로 나서기만 하면 됩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생각하지도 마세요. 그때부터는 저절로 길이 열립니다. 하나의 그림이 다른 그림으로 인도해줍니다. 처음이 어렵지요. 하나의 그림과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랑은 확산되어 더 깊고 더 넓은 사랑으로 진화합니다.
아는 것이 디톡스다!
나홀로 즐기는 경지가 되면, 이것만으로는 무언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에 대한 좀 더 정교한 공부가 하고 싶어지는 것이죠. 바로 이때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알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바로 인문학이지요. 하나의 미술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왜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술작품이 단순히 한 개인의 창조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술사에 등재된 예술가들의 작품은 한 개인의 심리와 역사일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았던 당대의 시대정신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항상 현재를 전복시키는 저항과 혁신과 투쟁이 있는 작품들만이 미술사의 주요한 맥락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요. 그중에서도 신화와 성서는 필수입니다. 19세기까지의 서양미술사는 신화와 성서에 대한 예술가들의 나름대로의 해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20세기 현대작가들도 자신만의 아주 도발적이고 신랄한 방식으로 이전의 텍스트들을 조롱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꼭 신화나 성서 같은 인문학이 아니더라도, 예술가들의 삶이나 에피소드를 조금만 알아도 그림은 참 재미있어지지요. 사실, 그림을 보고 마음을 치유하는 경지가 되려면 예술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우선되어야겠지요. 아니, 예술가가 아닌 한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생기면서, 그 작품을 이해하게 되고, 이렇게 알게 되면 한 존재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술가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그 삶이 그대로 예술로 전이된 그림을 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그런 그림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결국에는 살아남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그림에서 치유를 받으려면, 일정 부분 예술가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감정이입되는 체험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예술가들의 험난한 삶 속에서 나오는 상처와 고통을 진부한 것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왜 꼭 그렇게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재미있으면 안되냐는 것이죠. 물론 안될거야 없지요. 유감스럽게도 인간에게는 상처투성이의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이기적 속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처참하게 짓밟혔음에도 지속적으로 투쟁했던 예술가의 삶을 통해서는 분노할 줄 아는 힘과 싸울 수 있는 용기를 배우고, 뼈아픈 실연 속에서도 예술작품을 지속했던 예술가들에게서는 사랑과 배신마저도 승화시킬 수 있는 힘을 배우고, 열등감이나 열패감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예술가들에게서는 인간의 한계와 극복에 대한 메시지를 배우게 되지요. 그러니까 예술가들의 삶은 우리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미학을 전해주는 것이죠.
귀먹고, 눈멀고, 손이 망가져도 해내고 마는 예술가들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안전한 삶에 대해 반성하게 합니다. 삶에 안주하지 말고 본질을 회복하라고 말입니다. Don’t be safe! Don’t be conventional!
피카소는 모든 (남성) 예술가는 페미닌하다고 합니다. 그 말은 “모든 사랑하는 자는 여자가 된다”는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말과 오버랩됩니다. 현재로서는 세계적인 예술가도, 세계적인 컬렉터도 남자들이지요. 그것은 남자들이 세상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자가 여자보다 훨씬 더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오죽했으면 니체가 “남성은 철학자, 여성은 철학”이라고 말했겠어요.
결여된 존재는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수집하거나 욕망해야 하는데, 그게 예술이라면 해볼 만한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남자들이 미술과 친해지는 일, 그리고 그림을 구매하는 일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여를 보상해주는 일인 동시에 어쩌면 잃어버린 반쪽(플라톤의 양성체 신화에서 제우스의 벌로 분리된 남녀라는 차원에서)을 찾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남성들에게 있어 그림과 친해지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간직한 아니마(anima, 남성성 속의 여성성)를 만나는, 참 아름다운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선 서점에 가서, 예술가들의 삶에 대한 말랑말랑한 책부터 찾아보세요. P. 보나르라는 화가가 그러지 않았나요? 예술작품보다 예술가의 삶이 더 자신을 자극했기 때문에 화가가 되었다고요! 어쩌면 현대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드물게만 존재하는 천재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예술가의 삶과 만나는 일! 이것이야말로 미술과 근원적으로 친해지는 일의 시작 아닐까요?
그림을 사봐야 안목이 생긴다!
미술사가나 비평가들보다 화상들이 훨씬 더 그림을 잘 감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림을 많이 사고 팔아봐서, 그림에 대한 뛰어난 동물적 감각이 있다는 것이죠. 게다가 어마어마한 돈이 걸려 있으니 날이 선 감각으로 작품을 감정하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보기 때문이니까요. 여하튼 그림을 한 점도 사본 적이 없는 사람보다 그림을 사보고 실패도 해본 사람이 훨씬 더 탁월한 안목을 갖게 됩니다. 안목이라는 것은 손해나 실패 없이는 도무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화상들이나 컬렉터들은 잘못 사서 손해를 보는 일을 ‘피 같은 월사금’을 지불했다고 무용담처럼 얘기합니다. 이처럼 시행착오 없이 처음부터 좋은 미술품을 보는 눈이 생길 수는 없어요. 물론 있긴 하지요! 세계적으로 검증된 작가 혹은 시장에서 거래가 잘되는 작품을 사면!
요즘 반가운 소식 하나는 컬렉터층이 점점 젊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들은 부모세대만큼 고가의 작품을 사지는 못하지만, 부모세대보다는 자기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 참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더군다나 몇 개월치 월급을 모아서 아주 작은 작품부터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네요. 그들은 꼭 투자가치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마음에 드는 작품을 선별하고 구입하는 일부터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냥 감상하는 일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이고 유기적인 예술계의 동참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컬렉터는 작품을 소장하고 걸어두고 감상하면서 일상을 풍요롭게 할 수 있어서 좋고, 화가는 다음 작품을 하는데 경제적, 정신적인 동기부여가 되어서 좋으니까요.
그래도 무얼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그럼 먼저 드로잉을 사보세요. 아직 저평가되어 있어 저렴한 드로잉이라는 장르는 사실, 예술가의 심경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랑스럽고 소중한 장르입니다. 슥슥 무의식적으로 그려낸 드로잉은 볼 때마다 어떤 한 존재의 섬광과도 같은 섬세한 내면을 보는 느낌이 든답니다. 이 봄이 가기 전에 내면의 빛으로 그린 그림을 한번 체험해보시길 바래요. 더 늦기 전에 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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