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 어찌 감히 의약을 가지고 나의 눈을 속이려 드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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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164회 작성일 11-11-14 11:06본문
동의보감》과 더불어 대표작으로 뽑히는 우리나라 의서는 아마도 《의방유취》라 할 수 있겠다. 《의방유취》는 세종이 의약의 활성화를 꾀하고자 김예몽, 유성원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로부터 전순의, 최윤, 김유지 등 의관들과 의기투합하여 몇 년에 걸쳐 자료들을 고찰, 정리, 감수, 교정을 거쳐 세상에 나오게 된 책이다.
깊게 설명하면, 세종은 고려로부터 이어온 우리 의학을 향약의서로 정리 편찬한 뒤, 객관성과 표준성을 갖추기 위하여, 집현전학자들로 하여금 당시 중국의서의 이론들 중 우리 의학과 조화를 이루며 일체화 할 수 있는 것들을 채록하도록 하였다. 이를 토대로 지명도 높은 의관들로 하여금 경험화하고 체험하게 한 후 뛰어난 이론과 처방들만을 모으게 하였다. 이를 또다시 안평대군 이용, 그리고 이사철, 이사순, 의관 노중례 등으로 하여금 감수하게 하여 《의방유취》를 완성하였다.
세조도 아버지 세종을 이어 《의방유취》편찬에 기대가 컸다. 이 거창한 의약 활성화 프로젝트의 일차적 목적이 편찬에 있었다면 이차적 목표는 인쇄간행 보급이었다. 하지만 《의방유취》조판과정에서 오류가 많이 나왔다. 모든 책의 간행이 그렇듯이 조판과정에서 교정이 가장 중요한데 이때 교정에 참여한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보지 않았었나 보다. 조판과정은 투자한 시간과 심혈을 기울인 결과만큼 주목받지 못한다. 한자한자 꼼꼼히 살펴야 하며, 또 크게는 문장 전체를 파악 검토해야 한다. 잠시만 정신집중을 하지 않아도 오자나 오류투성이니 신경은 예민해진다. 더구나 의서는 어려운 책이며 일부 식자들이 읽고 덮는 책이 아니라 백성의 생존과 직결되니 조금이라도 허술히 해서는 안된다.
오자없이 책을 편찬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아는 세조는, 우선 위험천만한 오류를 전부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종실에서 학문에 밝은 영순군 등을 비롯, 집현전 학자들이 교정방법을 논의하였다. 일종의 외곽자문그룹을 만들었던 것이다. 세조는 신중을 기해 일단 양성지 등 많은 학자와 의관, 그리고 영천군 등 종친들을 시켜 교정을 정확히 보게하였다.
이보다 먼저, 세조 3년인 1458년 3월에 의학 고강법(醫學考講法)을 설치하고 신숙주를 의학 도제조로 삼고 본격적으로 우선 처방에 관한 서적을 간추려서 의관들에게 분야별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상의할 수 있도록 강습시간을 마련하였다. 세종이 윤허했다고 해서 세조의 눈에 그냥 지나치고 통용될 리는 만무했다. 세조는 워낙 기본 의학지식이 풍부해서 휙 지나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본 출전의서들과 대조해 볼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부터 마련하였다. 즉, 삼의사에 소장된 의서는 물론 낙질이거나 혹 글자가 뭉개져 잘 안보이거나 하여 고열(考閱)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예조와 각도 관찰사에게, 문헌이 많은 사대부를 비롯하여 여항의 백성이라도 당본 방서를 소장하고 있으면 일단 진상토록 유시하였다. 교정이 끝난 후에 돌려주고 논상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날마다 의서를 의무적으로 강독하도록 하였다. 강독관이 그냥 쉽게 지나가는 부분에 대해서 세조는 다시 자세히 설명하고 정확하게 실증하도록 하였다. 또한 직접 읽고 의문났던 부분도 이를 강독관에게 조목조목 짚어보았다. 자신이 의서 전량을 보증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오류나 오자를 일으킨 부분을 직접 파악하고 바로잡았다.
아무리 편찬이 잘 되었더라도 간행과정에서 오류가 나면 쏟아부은 전력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세조는 의학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교정착오를 일으킨 학자들을 죄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조는 1464년 1월 11일에 드디어 《의방유취》의 교정에 많은 착오를 일으킨 손소(孫昭) 등 학자 10인은 파직시키고, 유요(柳瑤) 등 학자 7인은 파직과 동시에 전사(前仕)를 삭제(削除)하게 하고, 한치량(韓致良) 등 46인 학자는 전사만을 삭제하고, 안극상(安克祥) 등 11인은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전사 삭제란 승급 때 현임(現任)의 벼슬에 있는 일수(日數)로서 연한(年限)을 계산하고, 전임(前任)의 일수를 가산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해 9월 8일에 《의방유취》간행이 완성되자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모두 한 자급을 올려 주고 당상관 이상은 아들이나 사위, 조카에게 대신 가자하였다. 이러한 고행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의방유취》에 대한 몇가지 기록들을 골라 얘기해보면 우선 성종 8년(1477) 5월 20일에《의방유취》 30질을 인쇄되었는데 찍어내는데만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의방유취》간행을 통해 세조는 위대한 학자들의 학문 실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긴장된 정신으로 세세한 교정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동안 의서편찬오류에 대하여 문제를 삼고 치죄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의서의 오류가 문제라는 점에 동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도 의서뿐만 아니라 모든 서적에 대한 오류에 대한 무관심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고 일상화되어 있다. 특히 의서의 오류는 생명의 위협과 직결되는 것이니까 임금의 권력을 훼손한 것보다 임금의 명령을 농락한 것보다 더 반역죄일 수도 있다. 이처럼 세조는 의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현명한 임금이기는 하였다. 세조가 누구보다도 탁월한 의술과 의학을 지녔던 것도, 무딘 문제의식을 벌주었던 것도, 어쩌면 그의 쿠데타란 오점을 치유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자기 삶에 지울 수 없는 오류를 남기지만 아마도 세조는 의학발전을 통해서 자신에게 혹독한 꾸짖음을 통해 용서를 받으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세조의 의학관에 동조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세조의 평소 의학에 대한 비범함은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하다. 아무튼 세상의 모든 정치적 죄가 시대상황으로부터 저질러지기도 하니까.
다 알다시피 세조(1417년-1468)는 쿠데타인 계유정난을 단행, 조선 제 7대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瑈)이다. 세종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며, 왕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이다. 재위 기간은 14년이었다.
깊게 설명하면, 세종은 고려로부터 이어온 우리 의학을 향약의서로 정리 편찬한 뒤, 객관성과 표준성을 갖추기 위하여, 집현전학자들로 하여금 당시 중국의서의 이론들 중 우리 의학과 조화를 이루며 일체화 할 수 있는 것들을 채록하도록 하였다. 이를 토대로 지명도 높은 의관들로 하여금 경험화하고 체험하게 한 후 뛰어난 이론과 처방들만을 모으게 하였다. 이를 또다시 안평대군 이용, 그리고 이사철, 이사순, 의관 노중례 등으로 하여금 감수하게 하여 《의방유취》를 완성하였다.
세조도 아버지 세종을 이어 《의방유취》편찬에 기대가 컸다. 이 거창한 의약 활성화 프로젝트의 일차적 목적이 편찬에 있었다면 이차적 목표는 인쇄간행 보급이었다. 하지만 《의방유취》조판과정에서 오류가 많이 나왔다. 모든 책의 간행이 그렇듯이 조판과정에서 교정이 가장 중요한데 이때 교정에 참여한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보지 않았었나 보다. 조판과정은 투자한 시간과 심혈을 기울인 결과만큼 주목받지 못한다. 한자한자 꼼꼼히 살펴야 하며, 또 크게는 문장 전체를 파악 검토해야 한다. 잠시만 정신집중을 하지 않아도 오자나 오류투성이니 신경은 예민해진다. 더구나 의서는 어려운 책이며 일부 식자들이 읽고 덮는 책이 아니라 백성의 생존과 직결되니 조금이라도 허술히 해서는 안된다.
오자없이 책을 편찬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아는 세조는, 우선 위험천만한 오류를 전부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종실에서 학문에 밝은 영순군 등을 비롯, 집현전 학자들이 교정방법을 논의하였다. 일종의 외곽자문그룹을 만들었던 것이다. 세조는 신중을 기해 일단 양성지 등 많은 학자와 의관, 그리고 영천군 등 종친들을 시켜 교정을 정확히 보게하였다.
이보다 먼저, 세조 3년인 1458년 3월에 의학 고강법(醫學考講法)을 설치하고 신숙주를 의학 도제조로 삼고 본격적으로 우선 처방에 관한 서적을 간추려서 의관들에게 분야별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상의할 수 있도록 강습시간을 마련하였다. 세종이 윤허했다고 해서 세조의 눈에 그냥 지나치고 통용될 리는 만무했다. 세조는 워낙 기본 의학지식이 풍부해서 휙 지나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본 출전의서들과 대조해 볼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부터 마련하였다. 즉, 삼의사에 소장된 의서는 물론 낙질이거나 혹 글자가 뭉개져 잘 안보이거나 하여 고열(考閱)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바로 예조와 각도 관찰사에게, 문헌이 많은 사대부를 비롯하여 여항의 백성이라도 당본 방서를 소장하고 있으면 일단 진상토록 유시하였다. 교정이 끝난 후에 돌려주고 논상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날마다 의서를 의무적으로 강독하도록 하였다. 강독관이 그냥 쉽게 지나가는 부분에 대해서 세조는 다시 자세히 설명하고 정확하게 실증하도록 하였다. 또한 직접 읽고 의문났던 부분도 이를 강독관에게 조목조목 짚어보았다. 자신이 의서 전량을 보증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오류나 오자를 일으킨 부분을 직접 파악하고 바로잡았다.
아무리 편찬이 잘 되었더라도 간행과정에서 오류가 나면 쏟아부은 전력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세조는 의학의 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면서 교정착오를 일으킨 학자들을 죄를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조는 1464년 1월 11일에 드디어 《의방유취》의 교정에 많은 착오를 일으킨 손소(孫昭) 등 학자 10인은 파직시키고, 유요(柳瑤) 등 학자 7인은 파직과 동시에 전사(前仕)를 삭제(削除)하게 하고, 한치량(韓致良) 등 46인 학자는 전사만을 삭제하고, 안극상(安克祥) 등 11인은 고신(告身)을 빼앗았다. 전사 삭제란 승급 때 현임(現任)의 벼슬에 있는 일수(日數)로서 연한(年限)을 계산하고, 전임(前任)의 일수를 가산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해 9월 8일에 《의방유취》간행이 완성되자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모두 한 자급을 올려 주고 당상관 이상은 아들이나 사위, 조카에게 대신 가자하였다. 이러한 고행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다. 《의방유취》에 대한 몇가지 기록들을 골라 얘기해보면 우선 성종 8년(1477) 5월 20일에《의방유취》 30질을 인쇄되었는데 찍어내는데만 3년이 걸렸다고 한다. 《의방유취》간행을 통해 세조는 위대한 학자들의 학문 실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긴장된 정신으로 세세한 교정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동안 의서편찬오류에 대하여 문제를 삼고 치죄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때부터 의서의 오류가 문제라는 점에 동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도 의서뿐만 아니라 모든 서적에 대한 오류에 대한 무관심은 여전히 반복되고 있고 일상화되어 있다. 특히 의서의 오류는 생명의 위협과 직결되는 것이니까 임금의 권력을 훼손한 것보다 임금의 명령을 농락한 것보다 더 반역죄일 수도 있다. 이처럼 세조는 의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현명한 임금이기는 하였다. 세조가 누구보다도 탁월한 의술과 의학을 지녔던 것도, 무딘 문제의식을 벌주었던 것도, 어쩌면 그의 쿠데타란 오점을 치유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나 자기 삶에 지울 수 없는 오류를 남기지만 아마도 세조는 의학발전을 통해서 자신에게 혹독한 꾸짖음을 통해 용서를 받으려 했을 것이다. 이러한 세조의 의학관에 동조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세조의 평소 의학에 대한 비범함은 역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하다. 아무튼 세상의 모든 정치적 죄가 시대상황으로부터 저질러지기도 하니까.
다 알다시피 세조(1417년-1468)는 쿠데타인 계유정난을 단행, 조선 제 7대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瑈)이다. 세종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며, 왕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이다. 재위 기간은 14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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