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뚜막에 먼저 올라간 의학생도 박강창(朴强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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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218회 작성일 11-11-14 11:07본문
지구상에는 오직 인류의 일원으로서 본능에만 충직하게 살다간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도 자신의 인생을 열망의 불길위에 서서 거룩하게 불살랐거나 심지어 인륜이라는 도덕적 잣대마저 비웃으며 온통 욕망에 파묻히거나 혹은 추문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가문이니 체통이니 도덕이니 규율이니 이런류 따위는 죄다 필요있는 것들이 아닌 채 살았다는 이유로, 지금 무덤속에서까지 많은 이들의 비난을 감내하고 있기도 하다.
‘어우동 스캔들’이 그런 경우다. 어우동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스캔들과 기생을 떠올린다. 하지만 갈수록 엄격한 신분제와 삼강오륜 등으로 옭아매던 그 시대상황에서 행실은 기생과 다를 바 없었으나 조선왕실의, 그것도 효령대군의 손주며느리였다. 아버지도 문과를 거쳐 학자로, 정치가로 알려진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 박윤창(朴允昌)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우동이 가장 사랑한 사람이 의학생도 박강창이었다는 사실이다. 박강창이, 생도라는 꼬리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의학적 업적이 많아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의학사에 이름이 낯익거나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도 절대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 자유분방한 성의 대명사요 불꽃화살에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맡겼던 어우동과의 애정관계로, 당시 많은 유명인사들과 같이 회자되었기에 그의 이름을 거론하고자 한다.
워낙 어우동과 관계된 인물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여서 자신의 이름은 다 잊혀졌는데 말이다. 박강창측에서는 다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두 번 죽이는일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지금 펄쩍 뛰다 죽을 정도로 억울한 처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어우동과의 사랑과 상처만이 그의 삶이 증명되고 또 의학에 연계되었던 것을 탓할 수 밖에.
어우동은 태강수(泰江守) 전(全)의 아내였다. 효령대군에게는 손주며느리가 되며, 학문에 밝아 《의방유취》등을 교정해서 인쇄해야 한다고 주창한 영천군에게는 며느리가 된다. 어우동은 처음에 은장이[銀匠]와 간통하여 태강수에게 버림을 받았다. 쫓겨난 어우동은 그녀의 어머니인 정씨(鄭氏)마저 일찍이 “사람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마는 내 딸이 남자에게 혹(惑)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라고 토로하였을 정도였다.
음행을 자행함이 거리낌이 없어서 박강창·홍찬·어유소·노공필 등은 물론 유복지친(有服之親)인 방산수(方山守)와 수산수(守山守) 등에 이르기까지 간통하였다.
전의감(典醫監)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이 어우동을 만나게 된 계기는 종[奴]을 파는 일로 인해 값을 직접 의논하기 위해 어우동의 집에 찾아가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성종 11년 7월 11일, 어우동의 행적을 밟아가던 의금부는 박강창과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실록기사에는 어우동이 박강창을 보고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우동이 그를 보자마자 덜컥 황홀함에 빠졌는지, 아니면 박강창이 이미 어우동에 대한 소문을 듣고 분위기를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둘은 모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마음깊은 곳까지 흔들리는 삶을 선택하였다.
심지어 어우동은 박강창을 너무 사랑하여 자신의 팔뚝에다 그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였다. 물론 전에 어우동은 서리(署吏)였던 감의향(甘義享)을 희롱하며 그의 집에 따라가서 통간하고 그를 사랑한 징표로 등[背]에다 그의 이름을 새긴적도 있긴 하였다.
각 고을의 의학 생도(醫學生徒)들이 수령(守令)에게 학업(學業)을 배우는 것과 달리, 전의감의 의학생도는 의술에 정통한 습독관에게 요즘말로 빡세게 배웠다. 한편으로는 의관출신들로부터 의술의 경험을 배우며 쌓아야 했다. 부지런히 의서를 강독하여 의원이 되도록 취재하였는데, 대부분 봄 맹삭(孟朔)에는 《찬도맥(纂圖脈)》·《창진집(瘡疹集)》·《직지방(直指方)》을, 여름의 맹삭에는 《구급방(救急方)》·《부인대전(婦人大全)》·《득효방(得效方)》을, 가을의 맹삭에는 《태산집요(胎産集要)》·《동인경(銅人經)》·《화제방(和劑方)》을, 겨울의 맹삭에는《본초(本草)》·《자생경(資生經)》·《십사경발휘(十四經發揮)》을 나누어 배속시켜 취재(取才)하였다. 특히 양반의 의약을 맡은 전의감(典醫監) 생도는 한눈 팔 시간도 없을 정도로 본감에 비치되어 있는《향약제생집성방》은 물론 《직지방(直指方)》·《상한류서(傷寒類書)》·《의방집성(醫方集成)》·《보주동인경(補註銅人經)》·《소문(素問)》·《장자화방(張子和方)》·《소아약증(小兒藥證)》·《직결창진집(直決瘡疹集)》·《외과정요(外科精要)》·《부인대전(婦人大全)》·《산서(産書)》·《대전본초(大全本草)》·《찬도맥경(纂圖脈經)》의학서를 습독 강(講)에 임(臨)하여야 했다.
이들 생도들은 가르침을 꽃피우며 의관들을 수행, 인명을 구제하면서 경험의 열매를 맺어 명의가 되어 간다. 덩달아 치료경험을 쌓으며 사람들로부터 흠모도 받는다. 하지만 은밀한 기별에 무너져버린 박강창의 경우, 지금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주는 것조차 고통일 수도 있겠다. 그에게 자신의 인생에 어우동을 만난 것이 정말 행운이었었는지 아님 의학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었는데 일찍이 풍파와 시련이 되었는지, 함부로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아무튼 역사에서 어우동 스캔들의 가장 황홀한 주인공이었던 박강창의 인생, 어떻게 보면 참 샘나는 삶이요 부러움이다. 덧붙여 하나, 어우동의 실제 이름은 어을우동[於乙宇同]이다.
‘어우동 스캔들’이 그런 경우다. 어우동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스캔들과 기생을 떠올린다. 하지만 갈수록 엄격한 신분제와 삼강오륜 등으로 옭아매던 그 시대상황에서 행실은 기생과 다를 바 없었으나 조선왕실의, 그것도 효령대군의 손주며느리였다. 아버지도 문과를 거쳐 학자로, 정치가로 알려진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 박윤창(朴允昌)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우동이 가장 사랑한 사람이 의학생도 박강창이었다는 사실이다. 박강창이, 생도라는 꼬리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의학적 업적이 많아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의학사에 이름이 낯익거나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도 절대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 자유분방한 성의 대명사요 불꽃화살에 자신의 영혼과 육신을 맡겼던 어우동과의 애정관계로, 당시 많은 유명인사들과 같이 회자되었기에 그의 이름을 거론하고자 한다.
워낙 어우동과 관계된 인물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여서 자신의 이름은 다 잊혀졌는데 말이다. 박강창측에서는 다시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은 두 번 죽이는일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지금 펄쩍 뛰다 죽을 정도로 억울한 처지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는가. 어우동과의 사랑과 상처만이 그의 삶이 증명되고 또 의학에 연계되었던 것을 탓할 수 밖에.
어우동은 태강수(泰江守) 전(全)의 아내였다. 효령대군에게는 손주며느리가 되며, 학문에 밝아 《의방유취》등을 교정해서 인쇄해야 한다고 주창한 영천군에게는 며느리가 된다. 어우동은 처음에 은장이[銀匠]와 간통하여 태강수에게 버림을 받았다. 쫓겨난 어우동은 그녀의 어머니인 정씨(鄭氏)마저 일찍이 “사람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마는 내 딸이 남자에게 혹(惑)하는 것이 다만 너무 심할 뿐이다”라고 토로하였을 정도였다.
음행을 자행함이 거리낌이 없어서 박강창·홍찬·어유소·노공필 등은 물론 유복지친(有服之親)인 방산수(方山守)와 수산수(守山守) 등에 이르기까지 간통하였다.
전의감(典醫監) 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이 어우동을 만나게 된 계기는 종[奴]을 파는 일로 인해 값을 직접 의논하기 위해 어우동의 집에 찾아가면서부터였다고 한다. 성종 11년 7월 11일, 어우동의 행적을 밟아가던 의금부는 박강창과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실록기사에는 어우동이 박강창을 보고 꼬리를 쳐서 맞아들여 간통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우동이 그를 보자마자 덜컥 황홀함에 빠졌는지, 아니면 박강창이 이미 어우동에 대한 소문을 듣고 분위기를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둘은 모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그랬듯이 마음깊은 곳까지 흔들리는 삶을 선택하였다.
심지어 어우동은 박강창을 너무 사랑하여 자신의 팔뚝에다 그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였다. 물론 전에 어우동은 서리(署吏)였던 감의향(甘義享)을 희롱하며 그의 집에 따라가서 통간하고 그를 사랑한 징표로 등[背]에다 그의 이름을 새긴적도 있긴 하였다.
각 고을의 의학 생도(醫學生徒)들이 수령(守令)에게 학업(學業)을 배우는 것과 달리, 전의감의 의학생도는 의술에 정통한 습독관에게 요즘말로 빡세게 배웠다. 한편으로는 의관출신들로부터 의술의 경험을 배우며 쌓아야 했다. 부지런히 의서를 강독하여 의원이 되도록 취재하였는데, 대부분 봄 맹삭(孟朔)에는 《찬도맥(纂圖脈)》·《창진집(瘡疹集)》·《직지방(直指方)》을, 여름의 맹삭에는 《구급방(救急方)》·《부인대전(婦人大全)》·《득효방(得效方)》을, 가을의 맹삭에는 《태산집요(胎産集要)》·《동인경(銅人經)》·《화제방(和劑方)》을, 겨울의 맹삭에는《본초(本草)》·《자생경(資生經)》·《십사경발휘(十四經發揮)》을 나누어 배속시켜 취재(取才)하였다. 특히 양반의 의약을 맡은 전의감(典醫監) 생도는 한눈 팔 시간도 없을 정도로 본감에 비치되어 있는《향약제생집성방》은 물론 《직지방(直指方)》·《상한류서(傷寒類書)》·《의방집성(醫方集成)》·《보주동인경(補註銅人經)》·《소문(素問)》·《장자화방(張子和方)》·《소아약증(小兒藥證)》·《직결창진집(直決瘡疹集)》·《외과정요(外科精要)》·《부인대전(婦人大全)》·《산서(産書)》·《대전본초(大全本草)》·《찬도맥경(纂圖脈經)》의학서를 습독 강(講)에 임(臨)하여야 했다.
이들 생도들은 가르침을 꽃피우며 의관들을 수행, 인명을 구제하면서 경험의 열매를 맺어 명의가 되어 간다. 덩달아 치료경험을 쌓으며 사람들로부터 흠모도 받는다. 하지만 은밀한 기별에 무너져버린 박강창의 경우, 지금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주는 것조차 고통일 수도 있겠다. 그에게 자신의 인생에 어우동을 만난 것이 정말 행운이었었는지 아님 의학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었는데 일찍이 풍파와 시련이 되었는지, 함부로 그에게 물어보고 싶다.
아무튼 역사에서 어우동 스캔들의 가장 황홀한 주인공이었던 박강창의 인생, 어떻게 보면 참 샘나는 삶이요 부러움이다. 덧붙여 하나, 어우동의 실제 이름은 어을우동[於乙宇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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