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맨 처음 나오는 의학인물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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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468회 작성일 11-11-14 11:08본문
의학(醫學)적 사실로서 조선조에 와서 맨처음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기록은, 태조 2년(1393) 1월 29일조로, 전라도 안렴사(按廉使)인 김희선(金希善)이 도평의사사에 보고하는 내용으로, 각도에 의학 교수와 의원을 보내 양반 자제들을 교육시켜 일반백성 중 질병에 걸린 자를 즉시 구료토록 제도 마련을 청하는 내용이다.
의학(醫學)이 백성을 살리는 지름길이고 국가의 가장 긴요한 업무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태조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이 제도는 후대로 옮겨갈수록 유야무야 되었다.
사실은 조선조 500년을 통하여 김희선의 요청은, 어떠한 국가 행정력이나 국왕의 의사에 관계없이, 오히려 하나의 굳건한 관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지방이나 그 향촌사회를 지탱하는 규범화된 윤리는, 세상에서 일단 양반으로, 그것도 아주 당당한 양반으로 인정받으려면 세거하고 있는 지역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효의 실천이 가장 최고의 기본 덕목이었다. 물론 양반이라고 반드시 의술에 능통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기본적으로 의서를 읽고 기본 의방을 이해하고 가장 핵심적인 약재를 갖추어두고 집안이나 마을에 환자가 생기면 약방문을 적어주기도 하며 때로는 약을 지어 치료해주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김희선은 당시에 조선을 대표할만한 명문양반가의 출신이요, 행정가이며 정치가였다. 또 조선 개국기의 의학을 담당한 대표적인 의학자였다. 그는 권중화(權仲和),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과 함께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으며 『향약혜민경험방』을 정리하는 등 향약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의 출신배경을 보면 증조부 사원(士元 ,1257-1319)은 경상관찰사를 지냈으며, 증조모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딸이었다. 조부 진(稹, 1282-?)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학행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아버지는 상호군을 지낸 천리(天利, 1333-?)로 비록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태조조에 활약하였다.
<김희선이 권중화(權仲和),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과 함께 편찬한 향약제생집성방>
김희선의 가까운 인척 중에서, 공식 기록상 의학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과의 인맥을 설명하면, 우선 조선조 초기에 들어와서는, 김희선의 동생 무(務)의 4대손 수(綏)가 당대의 학자로 특히 『수운잡방(需雲雜方)』을 저술하였다. 김희선과 사촌남매간인 조화(趙禾)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같이 편찬한 조준(趙浚)의 조카이다. 위에서 말한 김사형(金士衡)의 아들 김승(金陞)은 김희선의 당질녀서가 된다. 즉, 김희선의 사촌형인 정(鼎)의 사위인 것이다. 김희선의 재증종손 석원(錫元)은 『의방서(醫方書)』를 정리한 그 유명한 서거정(徐居正)의 사위이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김희선과 그의 가까운 집안들이 독보적인 의술을 거머쥐지는 않았으나, 의약발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친 의학자들인지 가히 알 수가 있다.
김희선은 조선왕조의 계급적 신분으로 최고위층의 계급으로 의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효제를 실천하였지만,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정성과 진심을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김희선은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벼슬을 사직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으로 독실히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였으나 아버지는 김희선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세속적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자면 아버지 김천리는 적어도 양반으로서의 자격인 ‘덕’을 갖추지는 못하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김희선은 조선의학사를 말할 때 반드시 맨먼저 이름을 올려야 할 인물이다. 그의 생애가 전부 의학으로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향약의 체계를 재정비한 의학혁명가이며 저술가요, 조선 초기 온갖 제도 정비를 비롯한 백성의 안정에 힘쓴 정치가요 행정가였다. 이런 바쁜 일정에도 어느 한순간에도 향약에 관심을 갖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가혹한 냉대와 집안의 무시 속에서 조차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우리의 의학제도와 의서를 기록하였다. 우리 의학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해왔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 민족의학과 약재자립으로 백성들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진정한 의학자요 정치가였다.
의학(醫學)이 백성을 살리는 지름길이고 국가의 가장 긴요한 업무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태조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이 제도는 후대로 옮겨갈수록 유야무야 되었다.
사실은 조선조 500년을 통하여 김희선의 요청은, 어떠한 국가 행정력이나 국왕의 의사에 관계없이, 오히려 하나의 굳건한 관습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지방이나 그 향촌사회를 지탱하는 규범화된 윤리는, 세상에서 일단 양반으로, 그것도 아주 당당한 양반으로 인정받으려면 세거하고 있는 지역의 안정과 질서를 위해 효의 실천이 가장 최고의 기본 덕목이었다. 물론 양반이라고 반드시 의술에 능통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기본적으로 의서를 읽고 기본 의방을 이해하고 가장 핵심적인 약재를 갖추어두고 집안이나 마을에 환자가 생기면 약방문을 적어주기도 하며 때로는 약을 지어 치료해주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다.
김희선은 당시에 조선을 대표할만한 명문양반가의 출신이요, 행정가이며 정치가였다. 또 조선 개국기의 의학을 담당한 대표적인 의학자였다. 그는 권중화(權仲和),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과 함께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편찬하였으며 『향약혜민경험방』을 정리하는 등 향약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그의 출신배경을 보면 증조부 사원(士元 ,1257-1319)은 경상관찰사를 지냈으며, 증조모는 문성공 안향(安珦)의 딸이었다. 조부 진(稹, 1282-?)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학행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아버지는 상호군을 지낸 천리(天利, 1333-?)로 비록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태조조에 활약하였다.
<김희선이 권중화(權仲和),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과 함께 편찬한 향약제생집성방>
김희선의 가까운 인척 중에서, 공식 기록상 의학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과의 인맥을 설명하면, 우선 조선조 초기에 들어와서는, 김희선의 동생 무(務)의 4대손 수(綏)가 당대의 학자로 특히 『수운잡방(需雲雜方)』을 저술하였다. 김희선과 사촌남매간인 조화(趙禾)는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을 같이 편찬한 조준(趙浚)의 조카이다. 위에서 말한 김사형(金士衡)의 아들 김승(金陞)은 김희선의 당질녀서가 된다. 즉, 김희선의 사촌형인 정(鼎)의 사위인 것이다. 김희선의 재증종손 석원(錫元)은 『의방서(醫方書)』를 정리한 그 유명한 서거정(徐居正)의 사위이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김희선과 그의 가까운 집안들이 독보적인 의술을 거머쥐지는 않았으나, 의약발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친 의학자들인지 가히 알 수가 있다.
김희선은 조선왕조의 계급적 신분으로 최고위층의 계급으로 의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효제를 실천하였지만,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정성과 진심을 인정받지 못했다. 또한 김희선은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벼슬을 사직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으로 독실히 아버지의 병을 간호하였으나 아버지는 김희선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세속적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자면 아버지 김천리는 적어도 양반으로서의 자격인 ‘덕’을 갖추지는 못하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찌됐든 김희선은 조선의학사를 말할 때 반드시 맨먼저 이름을 올려야 할 인물이다. 그의 생애가 전부 의학으로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향약의 체계를 재정비한 의학혁명가이며 저술가요, 조선 초기 온갖 제도 정비를 비롯한 백성의 안정에 힘쓴 정치가요 행정가였다. 이런 바쁜 일정에도 어느 한순간에도 향약에 관심을 갖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가혹한 냉대와 집안의 무시 속에서 조차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우리의 의학제도와 의서를 기록하였다. 우리 의학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해왔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 민족의학과 약재자립으로 백성들의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진정한 의학자요 정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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