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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이전의 프랑스(1) 9/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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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4,436회 작성일 10-01-28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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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1st hour: France before WW1 (1)
 
Primitivism : 원시주의
Theosophy: 신지학
Symbolism: 상징주의

16세기 Renaissance 시대와 17세기 Enlightenment (계몽) 시대에 부와 군사력과  힘을 가진 나라 프랑스의 흐름은 Europe Continent 의 모든 분야에 막강한 영향을 주었다. 보통 19세기를 근대화 시대로 꼽는다. 유럽은 산업 혁명과 더불어 자본주의가 태동했고 또한 식민지를 형성하고 세계로의 지배를 항한 발걸음을 시작했다. 그래서 modernity, modernization 은 식민지 colonization 과  관련이 깊다.
 
그러나 프랑스의 modernity 는 16 세기 Renaissance 부터 시작되었으며, 19, 20세기 미술의 이해를 위해서는 근대화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알아야 한다.
 
The Storming of the Bastille in Paris occurred on 14 July, 1789. The medieval fortress and prison in Paris known as the Bastille represented royal authority in the center of Paris. While the prison only contained seven prisoners at the time of its storming, its fall was the flashpoint of the French Revolution, and it subsequently became an icon of the French Republic.
The storming of the Bastille and the subsequent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 and of the Citizen was the third event of this opening stage of the revolution. The first had been the revolt of the nobility, refusing to aid King Louis XVI through the payment of taxes. The second had been the formation of the National Assembly and the Tennis Court Oath.



Jean-Pierre Louis Laurent, The Storming of the Bastille, 1789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을  기념하는 날이며 1789년을 시발점으로 민중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루이 14세와 Roman Catholic 성직자는 막강한 power 와 부를 소유했으며, 교회가 민중에게 세금을 부여했다.
 
기존에 있는 ideology 의 붕괴를 초래하게 하는 바닥의 근본에는 항상 ‘돈’이 연관되어 있다.  잘 살고 잘 먹으면 불만이 없는데 세금 내기에 바쁜 소작농들은 뼈빠지게 일하는데 너무 가난하다. 18세기 말 프랑스는 나라에 돈이 없어서 세금을 자꾸 올리자 불만이 팽배했고 이때까지 세금을 안내던 계급인 교회와 귀족에게 ‘내세요’ 하니까 ‘아니 왜 내?’ 하고 갈등이 시작되었다. 또한 혈통 귀족이 아닌 상업활동으로 부를 축척한 bourgeois  브르조아 상인이 세금 징수의 target 계층이 되었다. 국가와 갈등이 일어나자 이들은 별도의 National Assembly 를 만들기 위해 공신력있는 장소인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에 모여서 회의를 하자 왕이 궁전을 페쇄한다. 그래서 임시 방편으로 그 옆의 tennis court 에서 모여서 Tennis Court Oath를 작성한다. 이 모든 갈등의 이유는 가난이며, 가난의 source 는 정치 사회 system 의 문제에 있었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Napolen on his Imperial Throne 1804
나폴레온은 프랑스의 식민지 섬에서 출생했다. 나폴레온의 그림을 보면서 민중은 ‘드디어 우리의 행복 시대가 왔어’ 하고 가슴이 벅찼다. 그림이 일종의 propaganda 정치 선전 역활을 했다.


Ingres, Odalisque 1819
터키의 창녀 계층을 그렸다. 19세기의 프랑스는 터키, 북 아프리카 등지에 프랑스 영의 식민지를 구축해 영토
확장을 하고 있었고, 그 당시에 유럽 여자의 nude 는 금기였으나 식민지의 이방 여인은 열등한 존재였으므로 nude 를 그려도 개의치 않았다.
 

Eugene Delacroix, 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여자가 깃발을 들고 있으며 19세기 프랑스 격동의 시기를 보여준다. 문예사적으로 볼때 17세기의 바로크, 18세기의 로코코를 거쳐 19세기에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낭만주의 Romanticism 이 시작됐고 Delacroix(드라크루나) 와 Ingres (잉게르)가 낭만주의 작가이며, 뒤이어 사실주의 Realism 이 나타났다. 마네가 여기에 속하며, 상징주의 Symbolism 이 뒤를 이은다. Modernism 의 시발점은 Realism 의 마네부터 라고 할 수 있다.
 
Realism 대표 작가는 모파상, 에밀 졸라 등이며, 19세기 말의 상징주의 소설로는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을 꼽는다. 상징주의 화가로는 Vincent Van Gogh 가 있다. 마네, 에밀 졸라, 모파상은 동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드라크루나, 잉게르의 Romanticism 에서 왜 마네의 Olympia 같은 Realism 의 그림이 나오게 되었을까? 
 

Edouard Manet, Olympia 1863
이 당시의 사람들이 좋아하던 주류는 낭만주의의 드라크루나의 그림같은 것인데, 마네올림피아가 살롱전에 나오자 파리 시내가 홀랑 뒤집혔다. 왜 갑자기 낭만주의에 등 돌리고 사실주의로 갔는지?  왕정시대, 백작부인, 공주 얘기를 잘 읽다가 왜 돌연히 에밀졸라와 모파상을 읽는지? 이는 시대 정신에 부응했기 때문이다. 당시 지배하던 주류의 사조에 변혁이 일어났다. 즉 대중의 의식이 바뀌었고 대중이 꿈꾸는 세상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역사의 인물과 사건이 주요 주제이며, 그림의 규모도 웅장하고, 박물관에 가서 공부를 하고 그림을 보면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런데 문제는 가슴이 벅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가 고팠다. 민중의 힘으로 정치 변혁을 가져왔는데 살기 힘든 것은 똑같았다. 하층 계급이 느끼기에는 왕은 없어졌는데 bourgeois 브르조아라는 새로운 왕이 생긴 것 같았다. 혁명 당시에 꿈꾸었던 환상 illusion 과 오늘 사이에는 상당한 gap 이 있었고, 그 gap 은 점점 커가고 있었다. (원래 gap 은 존재했지만 민중은 gap 이 없을거라는 환상을 혁명 당시에 가졌다.)
 
소설 보봐리 부인과 에밀 졸라 등은 bourgeois 계급을 건드리고 있다. 브르조아는 금전이 생기자 예술의 중요한 patron 으로 출현한다.  그전의 patron은 왕실 귀족이었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회가 후원자 였다. 그래서 성경이야기, Annunciation (수태 고지), St. Joseph (세례자 요한) 등이 그림의 주제였다. 르네상스 이전에는  그리이스 로마의 신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었다. 그런데 돈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왕, 귀족 대신에 power class 로 등장한 bourgeois 가 새 patron 이 되었고, 예술의 주제가 되었다. 화가를 후원하고 자신과 가족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했다.
브르조아 계급 공장 사장은 ‘네가 내 말을 안 들으면 나가’ 라는 특권을 행사했고, 19세기 중반부터 자본주의와 연결되면서 민중은 행복하지 않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자본주의의 중심이 되었고 과노동,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영국 공장의 현실이었다. 산업이 팽창하는 technological progress 가 일어날 때, 그것을 뒷받침할 사회적, 법적인 system 은 미처 구조화 되지 못하고, 항상 뒤쳐져 있게 마련이다. 법적 제제가 없으니 사장이 control 했고 ‘6살 짜리 라도 일해야지’ 하면 그만이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사람들은 4살 짜리를 포함하여 온 가족이 노동하는 것을 목격하고 ‘이건 아니다’ 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1870년에 모네, 르느와르 등의 Impressionism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속에 센느 강가에서 춤추고 즐기는 브르조아 계급이 subject matter 로 등장한다.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가 동시대에 overlap 되었던 사조들이다. (문학에는 인상주의가 없다)
마네Olympia 에서 브르조아의 천박과 위선을 파헤쳤다. All nude 여자의 머리꽃, 목에 두른 까만 띠, slipper 는 명백한 창녀의 상징이었다. 1863년에 이 그림이 나오자 마자 ‘저 그림 없애라, 저 작가 매장 시켜라’ 하는 부정적인 sensation 이 파리를 휘몰아 쳤다.
 
당시에는 가능한 여자 누드는 Venus 여신 밖에 없었다. 그림의 주제가 되는 여자는 다 공작 부인, 백작 부인인데 누가 누드를 그리겠는가? 그런데 갑자기 마네가 귀족부인도 아니고 모네의 그림 속에 즐거워보이는 브르조아 여인들도 아닌 창녀를 일부러 그렸다. 왜 그랬을까? 그림의 소비 계층인 브르조아 남성들을 공격하기 위해서 였다.  당시에는 Bourgeois male class 가 그림의 주 관객이었고 동시에 Olympia 같은 여성을 돈주고 사는 계층이었다.
 
19세기 후반에  브르조아 계급이 나타나면서 창녀 계급이 동시에 출현했다. 그전에는 왕 귀족이 암암리에 connection 을 이용하여 창녀들을 썼다. 하지만 이제는 브르조아가 돈을 이용해 창녀를 사는 하나의 공공연한 business class 가 되었다.
 
Inges 가 쓴 ‘가족 사유재산’ 이라는 책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원시 시대에는 일부 다처로 많은 자식의 생산을 권장하다가, civilization 이 나타난 후에 지금과 같은 핵가족 구조가 출현했다. 그 이유는 private property (사유재산) 때문이다. Family registry (호적) 에 등록된 법적 부인과 자녀들은 private property 로 간주되어 법적인 보호와 상속을 받았다. Family 에 business 개념이 도입된 것이다. 동시에 남자들의 혼외 정사로 인한 인정 받지 못하는 부인과 자식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가부장적 가족 system 안에서 왜 여자들의 혼외 정사는 왜 문제로 대두되지 않았을까?  여자들이 자신들이 낳은 아이가 권리의 주장이 가능한 legitimate child (합법적인 아이) 가 되기 위해서는  혼외 정사를 감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보호와 권리가 없는 illegimate child 의 일생은 그림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마네는 그런 계급을 정면으로 공격한다. Olympia 는 bourgeois 남자들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저 모르세요?’ 하고 묻는다. 남자들은 불쾌해 하면서 salon 전에서 저 그림을 없애라고 한다. 마네의 Olympia 는 Realism 이며, 자신의 이름을 negative 하게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에 사고 팔리지는 않았지만 문예 사상적으로는 이미 Realism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Realism 의 마네의 그림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당시에 인정은 못 받았지만 예술 세계의 circle 안에서는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다는 support 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기록은 될망정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불우하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patron 과 사회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Paul Gaugain, Self-Portrait with Halo 1889

후기 인상파 Post  Impressionism 으로, 문학 문예사로는 상징주의 시기이다. 보봐리 부인, 악의 꽃 등이 읽혔다. 세기말 현상 증후군이 19세기 말에 사회에 팽배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민중의 힘이 나타났고, 브르조아가 출현하여 자본주의가 돌아갔으나 사회가 나아지지 않으므로 염세주의 사상을 가지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농사보다는 공장일이 밥을 두 공기 더 먹는다 하여 공장이 있는 도시로 사람이 몰려 city 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도시의 모습에는 진보가 있었으나 법이 아직 못 쫓아와 법적 제제가 없었다. 생활 수준은 바닥을 치고 집주인은 맘대로 세든 노동자를 내 쫓았다.  창녀와 homeless, beggar  계층이 생기고, 사람이 갑자기 모이니 하수구, 쥐, 콜레라 등의 문제가 팽배한다. 사람들은 염세적으로 느끼기 시작했고 예술가들은 현실을 벗어나고자 했다. 여기는 지옥이며, 타락했고, 도덕은 바닥을 친다. 그래서 지겨운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낙향하거나 이민을 가려는 움직임이 생겼고 눈에 보이는 현실이 비참하여 보이지 않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종교에 귀의하려 했다.
 
기존 종교의 타락상을 잘 보아온 그들은 새로운 종교를 찾았다. 몬드리안을 위시한 당시 유럽의 대부분의 지성인 문학인들이 신지학 theosophy 를 믿었다. 철학과 학문이 합해진 이념으로 기독교를 대체할 만한 힘으로 닥아왔다. 학문의 boundary 를 넘어서서 예배, 집회 활동했으며 일반인들을 계몽하여 utopia 로 끌고 가기를 희망했다.
 
고갱은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파리 교외에서 그림 그리는 친구와 같이 작품 활동하다가, 타락한 파리의 civilization 을 벗어나  타이티섬으로 갔다.  타락한 문명을 벗어나기 위해 새로 나타난 사조가 원시주의 Primitivism상징주의 Symbolism 이다.
Primitivism 은 Euro-centric (유럽 중심) 사상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utopia를 찾아 이동하는 것이다. 공간 이동은 시간 이동이라고 생각했고 시간적으로 time machine 을 타고 과거로 간다고 여겼다. 고갱이 타이티에 갔을때 시간을 거슬러  문명화 되기 이전의 원시 사회로 돌아온 것 처럼 느꼈다.
 
또한 African Art 에 관심이 고조되어 피카소, 마티스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예술, 문화의 흐름의 뒤에는 정치, 역사, 국가적 net work 이 움직이고 있었다. 고갱이 선택한 타이티는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니 primitivism 과  colonialism (식민지주의) 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정치가 hidden structure 역활을 하게 마련이다.
 
Colonizer (식민지 통치자) 는 원시사회를 문명화시켜준다는 illusion (착각)을 가지고 동시에 그들의 때묻지 않은 자연을 취하려 했다. 허락을 받지도 않고 가져온 African masks 를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대규모로 전시했다. 마티스, 피카소는 African masks 를 보고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증폭시켰다. Mask 는 African 의 주술 실용 목적이었지만 프랑스 colonizer 들은 예술 작품으로 보았다.
Symbolism 은 Thoesophy 종교와 관련이 있다. 인간의 감정, 욕망 등은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학문적으로 설명이 안 된다. 1910년에 Freud 꿈의 해석이 발간되었고 1890년 대는 고갱, 고호의 시대로 Post Impressionalism 시기였고 상징주의 시기이기도 했다. 영적인 문제, 욕망, 잠재의식, 심리적 불안 등은 말로 설명이 잘 안 되므로 그림으로 표현했다. Apollinaire 의 시는 말도 안 되는 내용등을 담고 있다.
 
그런 영향을 고갱, 고호는 고스란히 받아서 예술이 representation 에서 expression 으로 넘어 간다. 글로도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함이 곧 Expressionism 이다. 19세기 말 원시주의와 상징주의의 두 견인차는 Expressionism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재현에서 표현하는 기능으로 넘어간다. Paul Gaugain Self-Portrait with Halo 에서 보다시피 말도 설명이 안되는 내용의 그림 뒤에는 이러한 프랑스 국가의 배경과 system 이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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