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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낭만주의 미술: 그로, 앵그르, 제리코 11/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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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edpig 댓글 0건 조회 7,001회 작성일 11-11-1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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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19 세기 12th hour: Romanticism in France
 
 
 
낭만주의Romanticism는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와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동 작용으로 1800년 경 나폴레온 시대 부터 나타나서 1820-50년 사이에 무르익는다. 신고전주의는 인간의 이성, 지성을 강조하여 종교를 허물고, 합리적 과학적 사고를 가지고 식민지로 진출했다. 인간의 영웅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신고전주의와는 달리 낭만주의는 인간의 극단적인 모습을 들추며, 과거에 대한 향수  nostalgia 를 중시하고 이국적인 면에 치중한다. 신고전주의에서 소외시켰던 인간이 처한 불행, 불평등한 관계 등 인간 개개인의 state of mind 를 드러낸다. 이성의 반대편에서 서서 정상에 못 미치는 정신 병자 및 수용소 감금인 등의 인간의 극악한 상황이 그림에 나타난다. 또한 자연으로의 회귀가 주제가 되어 영국의 터너 Turner, 독일의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등은 풍경화를 그린다. 신고전주의에서는 기독교의 logos 에 의하여 인간 중심으로 규율에 고착되었지만 낭만주의에 들어와 자연에 치중하며 인간의 감성을 개발하며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
 
프랑스에서는 1850년이 지나면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상징주의, 인상주의가 시작된다. 하지만 낭만주의는 유럽 변방의 식민지 등으로 퍼져나가 20세기 초 까지 계속 되어 1910-30년대에 아시아에서는 일반인의 지적 사조가 된다. 낭만주의는 genius천재, creativity창조, authorship 작가의 독창성을 중시 한다. 이때부터 천재 개념이 생기면서 오래된 manuscript 이 한 장이라도 발견되면 누구의 것인지 꼭 밝혀 내려는 노력이 시작된다. 루벤스의 그림도 직접 그린 부분과 조수가 그린 부분을 밝히는 연구를 한다. 신고전주의는 로마 공화정 시대의 문화로 돌아감을 주장 했지만 낭만주의는 사람의 독창적 unique 인 움직임으로 역사를 창조하려 하여 근대적 학문이 낭만주의에서 부터 출발한다. 전에는 티션의 그림을 따라서 그리면 ‘똑 같게 참 잘 그렸다’ 라고 평했지만 이제는 ‘네가 직접 창안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Copying 이나 plagiarism 이 부정적으로 간주 되고  originality 를 중시하게 된다.
 
낭만주의 음악가로는 베토벤, 슈벨트, 슈만, 파가니니, 차이콥스키 등이 있으며 문학에는 Edgar Allen Poe, Nathaniel Hawthorne, Goethe, Ruskin 등이 활동 한다. 에드가 포우는 추리 소설 이랄 수도 없는 인간의 꼬인 심성, 이상한 도덕을  소재로 가지고 온다.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 을 1774 년에 발표한다. 신고전주의의 영웅적인 모습에 반해 유약하고 상처 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 여자에게 버림을 받고 베르테르는 감정에 치우쳐 자살을 한다.
 
Anne-Louis Girodet, Sleep of Endymion 1791
 
잘생긴 청년 앤디미온은 사냥의 여신 Selena (Diana) 의 사랑을 받는다. 셀레나는 달이 떠오르는 한 밤중에 앤디미온의 몸 위로 빛을 보내 보호해주며 자는 모습을 감상하며 사랑을 느낀다. 쟈크 루이 다비드의 제자 지로드의 그림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주제로 한 신고전주의적 그림 이지만 낭만주의 그림으로 분류된다.  지로드 자신은 다비드와 프랑스 Royal Academy 의 전통을 따라서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낭만주의적 요소가 있다고 후대 학자들이 해석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앤디미온의 자세가 살짝 왜곡되어 있다. 신고전주의가 강조했던 완벽, 절제, 조화에서 벗어나  엄격한 규율이 약간 흐뜨려지는 경향이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몸을 강조하다가 형태가 일그러진다. 르네상스의 절정 High Renaissance (1490-1527)에 이르자 1530-1600년대 사이에 이탈리아 미술은 매너리즘으로  흘러 형태가 과장, 왜곡 된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신고전주의의 조화, 절제에서 벗어나 앤디미온의 몸은 많이 휘었고 어떤 부분은 지나칠 정도로 밝다. 곧이어 들라쿠루와(1798-1863) 라는  파격적인 낭만주의 화가가 출현한다.
 
 
Antoine Jean Gros 1771-1835, aged 20, by Francois Gerard 
 
20살의 그로는 다비드가 명성을 날리던 시기에  제자가 된다. 앵그르와는 달리 어린 시절에 천재 소리를 듣지 못 했던  그로는 20 몇 살에 화가 였던 아버지가 혁명의 와중에 죽는다. 혁명이 시작되고 10-20년 동안은 그림을 소비하던 귀족들이 거의 다 죽어서 화가들은 방황을 하는데 그로 역시 로마로  떠난다. 나폴레온의 부인 죠세핀과 친해지고 나폴레온이 권력을 잡자 종군기자 처럼 그를 따라 다니며 그림을 그린다.
 
Antoine Jean Gros, Pesthouse at Jaffa 1804
 
나이 어린 그로가 나폴레온을 따라 험한 곳을 마다치 않고 다니는데 이집트의 자파에 간다. 나폴레온이 자파의 역병 구제소를 1799년에 방문하는데 그림은 1804년에 그려진다.  무슬림 스타일 모르크 안의 courtyard 에 전염병자를 몰아 넣었다. 잘 차려입은 나폴레온이 무대 핵심 인물처럼 늠름하게 들어가서 마치 예수닙 인양 병자들을 만져주는 gesture 가 그의 정치적 위상을 높인다. 나폴레온을 실물보다 더 예쁘게 embellished 그리지는 않았지만 sympathetic 한 사람으로 보여진다. 아픈 사람이 죽어가고 악취와 기아 속에 있는 인간의 극악한 조건이 드러나 낭만주의 그림으로 분류한다. 신고전주의 고대 신화가 아니더라도 그로의 낭만주의는 영웅적 그림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뒷배경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고 있어 프랑스 점령 지역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진짜 현실은 나폴레온이 이런 곳에 방문을 하겠는가?  프랑스 점령 지역에 역병이 퍼지니까 프랑스 체면이 손상이 간다. 병이 퍼지기 전에 음식에 독이라도 타서 조용하게 죽이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1799년 경에 이런 rumor 가 계속 퍼지고 있었고 1804년 쯤에 반대파의 캠패인이 벌어지니까 나폴레온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으로  이런 그림을 그리게 한다.
 
Antoine Jean Gros, Napoleon on the Battlefield of Eylau 1807
 
에이라우는 독일의 동부에서 프러시아로 넘어가는 지역으로 지금의 폴란드, 헝가리 쯤 되는 곳이다. 러시아의 맹 추위로 인해 나폴레온이 망한 곳으로 그로가 전쟁터에 따라간다. 모자 쓴 나폴레온이 말에 앉아있고 적진 장군과 대치하고 있다. 군인들은 싸우고 있으며 시체 위에 눈이 쌓인다. 왜 낭만주의 그림이라고 하는가?
 
Detail
 
신고전주의 다비드의 그림에서는 나폴레온의 승리 이미지만 드러났는데 그로의 그림에서는 전쟁의 현실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나폴레온이 이기기는 했지만 프랑스 군 만명 이상이 죽은 덧없는 승리 이다.  전경 구도에 죽어가는 군인들의 푸르죽죽 얼은 손 등이 여과 없이 비참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팔 다친 불구 군인, 적진 동유럽 사람의 헤어스타일, 승리한 장군은 위에 있지만 밑에는 극악한 상태가 그려진다. 군인이 죽어도 얼은 땅이라 묻어주지도 않는다. 전쟁은 4시간 만에 결판이 나고 나폴레온은 바로 떠나면서 장군에게 뒷수습을 지시한다. 낭만주의 그림에서는 승리와 승리를 위해 죽어가는 사람의 현실이 동시에 나타난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Self-Portrait at Age 24, 1804
 
나폴레온의 집권 시기에 24살의 앵그르는 혁명의 격동기를 경험하지 않고 편안하게 로마로 간다. 기술이 다비드 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앵그르는 그림의 선이 굵고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을 흠모했다. 잘 생겨서 장터의 많은 여자들과 연애를 했던 라파엘 처럼 앵그르도 미남 이었다. 프랑스 남부 시골 출신으로 앵그르 아버지도 동네 환쟁이 수준의 화가 였다. 아버지는 앵그르를 둘루즈로 데려가 교육을 시키고 뎃생 공모전에 입상을 하자 19살에 파리로 이사를 간다. 여기서 앵그르는 다비드의 눈에 들어 에코데 보좌르의 정식 멤버가 된다. 1801년에 Prix de Rome (로마로 가는 상) 를 타고 1804년에 로마로 가서 프랑스인 초상과 교회 장식 등의 활동을 한다. 앵그르도 바이얼린을 켰기에 파가니니와 친구가 된다. 1820년에 플로렌스에 갔다가 1825년에 파리로 돌아온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Portrait of Napoleon on His Imperial Throne 1806
 
매끈한 호남 스타일로 왕의 권위가 보이는 나폴레온 초상으로 신고전주의를 잘 보여주는 대작 이다.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scepter 와 크리스탈 지휘봉을  들고있는 근사한 초상 이다. 털같은 촉감의 옷과 무늬가 elaborate 하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귀엽고 매끈하게 잘 그린 의례용 그림으로 앵그르의 명성을 높여 주었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Grand Odalisque 1814
 
경력이 무르익을 스물 몇에 그린 그림 이다. 나폴레온이 나폴리 땅을 점령해서 식구에게 다스리라고 주어 여동생 뮤라는 Queen Caroline Murat of Naples이 되어 짧게 나폴리 여왕을 지낸다. 그 당시에 앵그르에게 그리라고 부탁한 그림 이다.  오달리스크는 Ottoman 터키 제국 말기의 chamber maid 로서 아직 후궁이 되지 못한 궁녀, 무술이를 의미한다. 공식적으로 궁전 안에서 지내면서 후궁도 될 수 있는 존재인 오달리스크는 프랑스인에게는  매우 이국적인 exotic 소재 였다. 머리에 쓴 터번, 깃털 달린 부채, 터키의 물담배 파이프—이런 것을 넣어야 이국적으로 보인다.  생김새는 전형적인 유럽 미인 이지만 터키 할렘에 거주하는 여자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외국 풍습을 넣는다. 앵그르는 서양 미술사의 reclining nude 의 계보를 공부하고 오달리스크를 그린다.
 
Giorgione, Dresden Venus 1510              Titan, Venus of Urbino 1532                David, Madame Recamier 1800
                   
앵그르는 지오르지오네와 티션의 비너스 포즈를 공부하였고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을  염두에 두고 오달리스크를  그린다.  이 세 작품을 reference로 하여 그리고 보니 엉덩이가 크고 목이 뒤틀려진 약간 이상한 오달리스크가 나왔다. 앵그르는 이 그림으로 인해 신고전주의의 비율에서 벗어났다는 혹평을 듣는다. 비평가들은 매너리즘과 비슷하다고 한다. 앵그르는 앙심을 품고 파리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이태리에서 산다.
 
Parmigianino, Madonna with a Long Neck 1594
 
르네상스 후기 16세기 중 후반에 정형을 추구하는 데서 변형을 하다보니 비율이 망가진 그림이 나왔는데 이를 매너리즘 이라고 한다.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도 이런 느낌의 그림으로 간주되었다. 오달리스크는 아름답고 흠잡을 데 없는 그림 이지만 비평가들은 신고전주의가 찬양하는 도덕적인 그림이 아니며 터키 할렘의 창녀를 그린 저속한 그림 이라고 혹평하였다. 앵그르는 상처를 받지만  육감적인 여인을 창조하기 위한 노력을 평생 계속 한다.
 
 
David, Madame Recamier 1800
 
19세기 파리 사교계를 주름 잡는 여자 마담 레카미에는 나폴레온의 여동생 뮤라와도 친구 지간으로 다비드도 소개 받아 자신의 초상을 그리게 한다. 레카미에는 15세에 30살이 많은 남편과 결혼 하는데 알고보니 아버지 였다. 레카미에는 아버지 라고  밝힐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여자의 태생 이었다.  그는 아들이 없어서 재산을 물려 주려고 일부러 딸인 레카미에와 결혼한다. 사교계의 공공연한 소문으로 이름만 부부지 실제로 부부가 아니었다. 1805년경 나폴레온이 권좌에 있을 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서 재산이 없어진게 된다. 그는 레카미에를 작위가 있는 유명 러시아 공작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이혼 절차를 밟지만 결혼은 성사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죽고 나폴레온이 축출된 후에 레카미에는 아파트를 얻어 salon 을 운영하면서 당시 파리 사교계의 남자들과 묘한 관계의 염문을 뿌린다. 다비드가 그린 그림이 유명해지고 레카미에가 앉아있는 의자가 유행이 되어 이런 의자를 레카미에 라고 부른다.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의 모습은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 처럼 보인다. 마담 레카미에는 71세에 자식도 없이 쓸쓸히 죽는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Louis-Francois Bertin 1832
 
뚱뚱하고 목도 없고 등, 손가락이 굽은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 이다. 머리도 단정할 수도 있는데 부스스  하게 내버려 두었다. 이 그림을 보는 대중은 ‘아 그림이 이렇게 사실적일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한다. 부유한 상인으로 눈에 캐럭터가 나타난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수준이 떨어지는 천박한 그림이라고 평하고 앵그르는 실망하고 이태리로 돌아간다.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Portrait of Madame Ines Moitessier 1858
로코코적  드레스에 거울에 뒷 모습이 살짝 드러나고 옷이 얼굴을 완전히 압도하지 않는다. 중국 화병과 부채, 머리 장식 등 이국적 item 을 선호 했음을 알 수 있다.
 
 
Theodore Gericault (1791-1824), Self-Portrait 1822-23
 
제리코는 앵그르와 비슷한 나이 지만 결핵에 걸려서 34세로 일찍 죽는다. 제리코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체검시소 morgue, 정신병자 수용소 등 험한 곳을 다니다가 병을 얻는다.  당시에는 화가들이 과로사로 일찍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라파엘도 30 몇에 죽었다. 잘 생겨서 장터에서 인기가 있었던 라파엘의 경우에는 화가 수준에 맞는 사회계층 여자들- 빵집 딸, 보석 가게 딸 등등-과 바람 피우기에 바빴다.  낮에는 교황청에 들어가 그림 그리랴,  오래된 연인paramour 인 빵집 딸이 있음에도 항상 다른 여자가 있었다. 신인상주의 Neoimpressionism  점묘파pointillism  화가 쉐라는 역사화 같은 큰 그림을 점으로 찍다가 과도한 intensive 일로 인하여 일찍 죽었다고 한다.
 
Theodore Gericault, Charging Chasseur 1812
 
루벤스 그림 처럼 구불구불한 선, 색깔이 들어있고 이국적인 땅에서 싸우는 군인 모습을 피라미드 구조로 그린다.
 
Theodore Gericault, The Raft of the Medusa 1818-19
 
제리코는 다비드 류의 신고전주의 대규모 역사화를 생각하고 그렸지만 학자들은 낭만주의에 가깝다고 분류한다. 제리코는 이그림을 그리기 위해 스켓치를 무수히 남긴다. 마치 니콜라 푸생이 사빈 여자들의 납치를 그리기 위해 모델을 만들어 깊이를 쟀듯이 제리코 역시 small scale 로 만든 모델을 보고 그렸기에 그림이 상당히 입체적 이다. 망망 대해에 파도가 몰려 오는데  뗏목이 위태롭다. 사람들의 방향감은 위로 올라가 희끄무레한 그림자 같은 구조배를 향해 옷을 벗어 손을 흔든다. 등을 관객에게  보이고 있어 더 절박해desperate 보인다.
 
Detail 
제리코는 생존자를 만나서 당시의 정황을 물어보고 시체 검안소에 가서 스켓치를 하고 완벽한 준비 과정을 거쳐 이 사건을 그린다.
그림을 보는 당시 사람들은  1816년에 일어났던 이 사건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West Africa 식민지에 보낸 메두사  라는 이름의 배에 장교들, 가서 일할 사람들, 노예 무역의 아프리카 노예 등 147명이 타고 있었다. 열흘 넘게 표류하다가 살아남은 13명의 생존자들은  신문기자들의 질문에 인육을 먹고 버텼다고 대답했다. 이 사건을 조사 한 결과 무책임한 선장과 승무원들이 대피 명령도 안 내린 채  구조선을 타고 급히 도망갔고, 경험이 없는 자가 연줄로 선장이 되었음이 밝혀져 크나큰 정치적 스캔달을 가져왔다.

Theodore Gericault, Guache Drawing for the Raft of the Medusa
 
실제 그림을 그리기 전의 스켓치 인데 구도가 그림과 많이 틀리다. 
 
제리코는 메듀사의 뗏목의 small scale 을 만든다. Pyramidal 구조로서 무리의 사람들이 그룹을 이루고 있다. 흔드는 손 위로 one point vanishing point 가 있다. 제리코는  2-3년 전에 일어난 현대 사건을 가져와 많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림을 그리는데 낭만주의의 대작으로 인정 받는다. 이 그림에는 인간의 여러 조건들이 나타나 있다. 처참하게 죽은 사람, 자포자기한 사람, 실올 같은 희망에 매달리는 사람, 살아남은 선장 등등. 흑인과 신분이 낮은 승무원만 남기고 도망을 친 선장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The Raft of the Medusa, Salon Carre of the Louvre 1831
The Raft of the Medusa 가 루브르 박물관 안에 걸려있는 모습 이다.
 
 
Adad Hannah, The Raft of the Medusa (100 Mile House) 2009
 
현대 작가 아다드 하나가 제리코의 메듀사의 뗏목을 사진으로 만들었다. 원 그림에는 없었던 여자를 사진 속에 넣는다.
 
 
Theodore Gericault, Portrait of an Insane Man 1822-23
 
낮은 신분의 군인이 과대망상증에 걸려 자신이 장군 쯤 되는 줄 안다. 빈 공간을 응시하는 뀅한 눈이 미친 사람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얼굴에 blister 가 나 있다. 낭만주의는 인간성의 표본이 되는 normal 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에서 먼 다른 쪽에 촛점을 둔다. 소매에 붓터치 brush stroke가 표시가 날 정도로 wild 하게 보이는데 낭만주의 대표 작가 들라쿠루와에 와서는 색채가 느낌을 확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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