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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현대미술6 월북 예술가 10/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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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2,508회 작성일 15-11-06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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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현대미술6 월북 예술가
 
해방 후 육이오(1950년)를 전후하여 많은 화가들이 월북을 한다. 사회주의와 보수파의 갈등이 심화되자 남한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당시 인테리 계층은 대부분 사회주의에 동화되었다.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던 예술인들은 다 붙잡힌다. 강제로 단체에 가입 시켜 사상 교육을 받고 순화가 되면 삐라 제작에 투입된다.  3개월 후 구이팔 수복이 되자 이승만 정권이 들어와서 친북부역자를 색출하자 사형이 무서워 월북한다. 미술가 협회에서 부역자 심의위원회가 차려지고 고희동, 김은호가 심사위원이며, 김환기, 고상봉은 A급 부역자로 분류된다. 미술가 협회가 양분화되는 알력의 시작이다.
 
남한이 독재 정권이라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한 한국은 1988년 올림픽을 맞아 월북 작가들을 해금시킨다. 1990년에 신세계 미술관에서 해금작가유화전이 열린다. 복권된 화가는 배운성, 김용춘, 이쾌대, 변월룡, 김용순 등이다. 해금조치가 되자 미술 사가들은 월북화가들을 연구한다. 
 
 
이응노, 한강도감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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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배를 타고 건너려고 모여있다. 육이오가 터져도 이응노는 피난을 가지 못한다.
 
 
이수억, 6.25 동란 1954
18동아시아미술5 011.PNG 

50년대 대한미술협회 화가들은 일본 유학파 출신들이다. 엥포르맬의 선배 세대로서 구상화 세대이다. 이수억은 월북하지 않고 국전의 심사위원이 되고 화단의 원로가 된다.
 
 
김용환(1912-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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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를 지나니 70-80%가 글을 못 읽는다. 화가, 만화가를 동원하여 그림으로 된 삐라를 만든다. 일본에 가서 만화 공부를 하고 활동을 하다가 해방 후에 서울에 와서 코주부 만화를 그린다. 김용환은 피난을 못가고 삐라를 그렸다고  9.28 수복 후 사형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집행이 취소되고 이번에는 반공삐라를 열심히 그린다. 김용환은 후에 일본에 가서 잡지 자유의 벗의 표지를 그리다가 미국으로 이민간다. 그는 '삐라는 남이든 북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상관없다. 나는 그림만 그리면 된다. 똑같이 그리고 이름만 바꾸면 된다.' 라고 했다.
 
 
간송미술관, 보화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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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북한은 남한의 문화재 수장고인 국립 박물관과 간송미술관을 털어 북으로 이송했다. 서울 수복 후 남한은 남아있는 것들을 부산으로 이동시켰다. 훈민정음 하나만 가슴에 품고 피난을 갔던 전영필(간송미술관)은 사방으로 흩어진 자신의 수집품을 재구입하고 추스려서 미술관을 이어간다.
 
 
이여성, 격구, 1936 신미술가협회 전시회 개막식 1943 이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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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미술가 이여성은 <조선복식고>의 저자로 유명하다. 조선 복식을 최초로 연구한 학자이다. 이쾌대의 형이다. 이여성은 화려하게 산 만석꾼의 아들이다. 1918년 중국 남경에 유학가서 조선의 인테리들을 만나 독립 운동에 가담한다. 아버지 땅문서를 훔쳐서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독립군 중요 인물로 발각이 되서 복역을 한다. 후에 일본 유학을 가서 여운형을 만나 사회주의자가 된다. 48년에 자진 월북하고, 행적이 묘연해진다.
 
 
이쾌대 푸른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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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는 어머니로 인해 피난을 못 간다. 9.28수복 때 인민군에 가담해야 남한측의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인민군으로 전쟁하면서 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된다. 한 미군 장교는 그가 그림을 그리도록 화구를 주며 전시회도 데려간다. 형 이여성이 육이오 전에 월북했으므로 남한에서 살 수가 없었다. 1953년에 자진 월북한다.
 
이쾌대 해방고지 194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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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송 가족도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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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했던 배운송은 동양척식회사 호남지구 대표의 아들인 백인기의 종으로 들어간다. 그가 독일 유학을 가자 몸종으로 따라간 배운송은 그곳에서 미술 공부를 한다. 조선 최초로 유럽으로 유학을 간 사람이다. 1939년 동아일보에 프랑스 파리에서 ‘배운송 전시 주목받다’ 라는 기사가 실린다. 1930년대 당시 유럽과 동양의 필치가 섞인 추상적 화가로 알려져 파리 베를린 등에서 전시를 한다. 40년대에 귀국하여 징용을 종용하는 그림을 그리며 친일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 부인과 함께 월북하여 평양 미대 교수를 지낸다.
 
 
배운성 장고춤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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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무용가 최승희를 그린다. 월북 작가들은 소련에 유학하며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배워서 북한에서 가르친다. 하지만 출신이 브르조와인 월북화가들은 프롤레타리아 미술을 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박헌영이 축출되고 김일성이 등장하자 공산주의가 아닌 1인 독재체제에 넘어간다. 일본에서 배운 미술도 부르주아 미술로 비난 받고 좌천된다.
 
 
변월룡, 판문점에서의 북한 포로 송환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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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부모와 함께 연해주로 이민간다. 1937년 스탈린은 한인들을 몽고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레닌그라드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교수가 된다. 소련 대표미술가로 평양 미대에서 가르친다. 국적이 소련이므로 자유롭게 판문점을 드나들며 그림을 그린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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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이 고향이지만 일본으로 유학갔다가 남한을 선택한 월남화가다. 화가들은 미국 트럭에 기름을 때며 부역을 하며 고생을 한다. '전업 거지는 역전에서 굶지만 자신들은 다방에서 굶고, 밥주는 집에 가서 빌붙으며, 하루 종일 할일이 없다는 점에서 전업 거지와 별 다를 바 없다'고 한다.
 
 
부산 광복동 거리 김동리 문학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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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시절의 모습을 보이는 문학이다.  화가들은 리어카를 끌고 구걸을 하고 길에서 자면서 대구 부산으로 힘들여 간다. 그곳 다방에서 서울의 명동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부산 광복동 밀다원 다방에 예술인들이 몰려 앉아 전쟁이 주는 절망, 고독, 허무를 서로 나눈다. 대구의 르네상스 다방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곳을 넘어서 다방이 전시 공간이 되기도 한다. 전쟁 중에 부산, 대구에서 100건이 넘게 전시가 열린다. 예술인들은 감수성이 예민해 정신이상이 되거나 자살을 하기도 한다. 다방은 그들이 살려고 모이는 곳인 동시에 자살 하는 곳이다. 집에 돌아가도 집문서가 없고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임응식, 전쟁고아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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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예술가들은 남한 사회에서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종군 화가, 종군 사진가에 가입한다. 전쟁화, 국군의 모습, 폐허가 된 서을 등을 그리며, 유엔군과 국군의 인천 상륙 작전 등을 사진으로 남긴다.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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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든 아니든 무조건 죽이는 무서운 시대였다. 여교생들이 반란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다 잡혀온다. 라이프 메거진에도 사진을 통해 전황이 보도된다.
 
 
임응식 구직 195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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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사회가 흉흉해진다. 미도파백화점 앞에서 구직 사인을 걸고 있는 남자 뒤로 말쑥한 신사들이 보인다. 극빈층와 부유층의 차이가 심화된다.  전후 한국사회에서 북한과 관계된 가족들은 죽은 듯이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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