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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현대미술9 일본 70년대 전위 미술 Japanese Avant-Garde in 1970s 11/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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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2,312회 작성일 15-12-09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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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현대미술9 1970년대 일본 미술 Japanese Avant-Garde in 1970s
 
일본 60-70년대 정치 상황
 
다시바나 타카시 Tachibana Takashi (1940-):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그 금맥과 인맥, 문예춘추, 1974 도쿄 고양이 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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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겸 작가 다시바나 타카시의 개인 서재였던 고양이 빌딩. 지금은 도서관이 되었고 장서가 5만권이 넘는다.)
일본의 60년대는 미안보조약 체결에 대한 반대 데모가 극심했던 안보 투쟁기이다. 데모에도 불구하고 소리 소문 없이 조약이 체결된다. 이 여파로 기쉬 노부스키 총리(아베 총리의 외조부)가 물러나지만,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가 이어서 총리가 된다. 70년대는 소련이 건재했던 냉전 시기였기에 미일한의 공조가 곤고해진다. 일본 총리들은 한결같은 친미 정책을 펼치며 정치적으로 우익화 된다. 에이사쿠 총리는 오사까 만국 박람회를 아시아 최초로 개최하고. 72 년에 미국으로부터 오키나와 섬을 반환 받으며, 74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는다.
 
70년대 후반은 정치적 스탠들로 인해 카쿠에이 총리가 사임하며 또한 좌파가 재편성 된다. 초등학교만 나온 시골 출신인 가쿠에이가 총리가 되자 신화적 인물이 된다. 저널리스트 다시바나 타카시는 총리의 배경을 파헤쳐 그의 금맥과 인맥을 탐사 보도한다. 총리는 고향 나카타의 쌀 부자 유지들과 로키드 (무기 회사)와 관련되어 엄청난 뇌물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타카시의 보도는 엄청난 파문을 일으켜 총리는 사임하기에 이른다. 타카시는 또한 일본 사회당사를 연구 발표하여 부패상을 폭로한다. 그의 저술로 인해 공산당의 입지가 약해지며 야권이 분열된다. 다음 총리 Ohira Nasayoshi는 밀약의 귀재로서 실리를 챙긴다. 한일중 관계를 개선하고 히로시마 원폭 이후 불문율이었던 핵협상을  성사시켜 원자력 발전소를 구축한다. 70년대에 일본은 강대국 대열에 오르고 경제적으로 풍족하니 국민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진다.
 
 
70년대 플럭서스 운동
 
Mieko Shiomi Happening for Sightseeing Bus Trip in Tokyo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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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최초의 해프닝은 1961년에 일어난다. 플럭서스는 유럽 및 뉴욕, 도쿄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운동이다. 도쿄 플럭서스는 오노요코, 시게코 구보타 등 여성 작가들에 의해 뉴욕의 플럭서스와 연결된다. 30-40명의 전위예술가들이 관광버스를 대절해 타고 토코의 20곳 정도를 다니며 해프닝을 벌인다. 공터에 TV를 놓고 계란을 던지거나, 참가자들을 줄로 묶고, 악수로 끝을 낸다. 66 년 경 도쿄의 플럭서스 운동은 절정에 달하며 각광을 받는다.
 
 
IBM, Happening and Musique Concrete, Sogetsu Art Center, Work by Ichiyanagi To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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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이미 60년대 초반에 문화 전반의 인프라가 갖추어진다. 소케츠 아트 센터는 1958-72 년 사이에 아방가르드 및 전위예술의 핵심지가 된다. 일본 및 미국의 플럭서스 작가들이 여기서 공연을 한다.
 
 
Sogestu Contemporary Series 18: John Cage and David Tudor,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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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위예술의 대부격인 존 케이지는 뉴 스쿨에서 가르치며 전위작가들을 배출한다. 존 케이지, 백남준 등도 일본에 와서 소케츠 센터에서 공연을 한다.
 
 
이치야나기 토쉬 Ichiyanagi To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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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는 58년에 음악가 이치야나기 토쉬와 결혼하고 뉴욕으로 온다. 토쉬는 줄리어드에서 존 케이지에게 음악을 배우며 부부의 살림집 loft는 전위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된다. 오노는 남편을 통해 음악을 배우고 존 케이지도 알게된다. 1962-63년에 오노는 존 케이지를 일본으로 초청한다. 일본의 플럭서스는 '케이지 shock'에 빠지고, 실험 음악이 대 유행한다.
 
 
John Cage, Piano Walk with Yoko Ono, Tokyo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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죤케이지가 기획하고, 오너의 남편 토쉬가 지휘하고, 오노가 피아노 위에 누워있다.
 
 
머스 커닝햄 Merce Cunningham (1919-2009) 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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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도 소케트 센터에서 공연을 한다. 일본의 Fluxus 는 유럽, 미국과 더불어 동시 다발적으로 자리매김한다.
 
 
Group Ongaku 그룹 온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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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시에미 미에코 등 음악인과 문학인이 전위 음악 그룹을 만든다. IBM punch card를 연주자에게 주고 자신의 해석대로 즉흥 연주를 하라고 한다. 2시간 동안 연주자들은 접시도 깨고 풍선껌도 터뜨리고 숨소리만 낸다. 60년 대 초반에 소케츠 아트 센터에서 이런 연주가 열린다.
 
 
Ono Yoko May 1962 Sogetsu Art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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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 미술수첩은 중요한 인프라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는 해프닝을 가쉽 정도로 여겼지만 일본은 저널 및 신문에서 전위예술 및 해프닝의 개념을 잘 소개한다. 이미 완성된 것은 예술이 아니며 관객과 호흡하는 과정이 예술이다. 작품이 결과물로 남지 않는다.
 
 
Ono Yoko, Cut Piece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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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오노 요꼬의 옷을 가위로 자른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를 생각케 하는 퍼포먼스<Cut Piece>를 한다. 65년에 카네기 홀, 최근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재연하기도 한다. 40년이 흐른 지금 여성을 보는 시각이 진화했는지 생각하게 한다.
 
 
Ono Yoko, Grapefruit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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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가 만든 잡지이다. 이벤트에 대한 설명 및 작품에 대한 악보가 있다. 예술의 한계를 넘어가는 실험들이다. 오노는 뉴욕과 도쿄를 오가며 일본 프럭서스의 세계화에 촉매 역할을 한다. 뉴욕의 조지 마시오나스가 만든  플럭서스 저널에 일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한편 오노 요코는 동시대 일본 작가들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표절 시비에서 자유롭지 않다.
 
 
Nam June Paik, Covered in Detergent on Stage, Tokoyo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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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독일에서 공부하고 일본을 거쳐서 뉴욕으로 온다. 일본 전위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뉴욕에 오라고 격려한다.
 
 
시오미 미에코 Shiomi Mieko Endless Box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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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그룹 온각구를 만든 작곡가인 시오미 미에코는 백남준에게 영감을 받는다. 디미뉴엔도 (점점 작게)를 형상화한 박스를 만들어 뉴욕의 플럭서스 숖에다 팔아서 비행기 값을 마련하여 뉴욕에 온다. 사운드를 오브젝트 (sound as object)화한 전위 음악의 개념이다. 백남준과 조지 마시오네스는 이 박스를 극찬한다.
 
 
조지 마시오네스 George Maciu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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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케이지의 제자인 마시네스는 뉴욕 플러서스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일본의 젠 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독선적인 성향으로 멤버를 제외시키기도 한다. 남녀가 같이 모여서 커뮤니티를 이루고 살지만 밥은 주로 오노, 시케코 등 여자가 전담한다.
 
 
Kubota Shigeko, Vagina Painting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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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미술 교사 구보타 시케꼬는 자신이 받았던 연애편지를 갤러리 바닥에 뿌리는 첫번째 개인전을 일본에서 하지만 어떤 리뷔도 받지 못한다. 자신의 작품이 이해받지 못하자 일본의 보수적 분위기에 실망한다. 64년에 요꼬의 주선으로 플럭서스를 하기 위해 미에코와 같은 비행기로 뉴욕에 온다. 조지 마시네스가 그들을 공항에서 픽업한다.
 
쿠보타는 마시오네스와 함께 플럭서스 공연을 펼치며 유명해진다. 무대 공포증이 있어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그녀는 버자이너 페인팅을 한다. 잭슨 폴락의 남성성을 강조하는 액션 페인팅을 패러디한 것이다. '나도 몸으로 페인팅을 하며, 작품이 남는 것이 좋다'고 한다. 쿠보타는 백남준의 부인이지만 자신의 작품세계는 그와는 별개라고 말한다. 쿠보타는 마르셀 뒤샹의 그림<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video sculpture 로 만든다. 이 작품은 독일의 도큐멘타에서 전시되고 모마에서 구매한다.
 
 
Ay-O(Takao Iijima) Finger Box 1964/ Flux Shop and Hall on Canal Street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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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는 핑거 박스를 만들어 플럭스 숍에 1불에 파는데 다 팔린다. 박스 안에 각각 모래, 스폰지, 톱밥 등이 있는데 볼 수는 없지만 손가락을 넣으면 느껴진다. 60년 대 초반에 눈으로만 보는 작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을 바꾸려고 시도를 한다.
 
 
Poster for Fluxus Symphony Orchestra in Fluxus Concert, Carnegie Recital Hall,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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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럭서스 심포니 오케스트라도 있었다. 죠지 마세니스가 이벤트를 기획하고, 전위 음악가 Akiyama Kuniharu에게 지휘를 부탁한다. 연주자들이 연주는 안 하고 악보를 넘기면서, 거친 숨을 쉬거나, 지휘봉을 들고 사무라이 흉내를 내기도 한다
 
 
From Space to Environment, 1966 Sogetsu Art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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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활동하던 일본 전위 예술가들이 귀국하여 일본 아방가르드에 힘을 실어준다. 공연 무대에 어항을 놓고 온도를 재고, 미에코는 재가 될 때까지 담배를 피우거나, 악보에 맞추어 극한까지 몸을 구부린다.
 
 
Shiomi Mieko and Alison Know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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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각구 그룹인 시오미 미에코는 양파껍질로 악보를 만든다. 바이올리스트가 악보를 보고 해석하여 연주한다. 또한 그룹의 행위자가 나와서 스크림 scream을 7 번 소리 지르기도 한다.
 
 
Shiomi Mieko, Disappearing Music for 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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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미는 '웃으세요 그리고 서서히 스마일이 사라지게 하세요' 라고 말한다. 음악 전공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관객 참여형 음악이다.
 
 
Shiomi Mieko Smile Music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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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단이 '태양을 봤다고 상상해보세요.' '미소를 뛰었다가 점점 사라지게 하세요' 등등 노래하면 그 노래대로 performer가 행동에 옮긴다. 그룹 온각구, 오노 요코, 시케고 쿠보타, 백남준 등은 뉴욕 플럭서스 운동의 중요 멤버가 된다. 이들은 일본과 뉴욕을 오가며 양쪽의 전위 예술을 소개하며 영감을 전달한다. 이러한 문화 교류는 미일 관계가 너무 좋았던 정치적 분위기에 편승한다. 한국에서는 전위 예술가들은 체포를 당하지만 일본과 미국은 정치적 메세지가 전혀 없는 안전한 전위 미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플럭서스의 시초인 다다 운동은 정치적인 메시지가 있었다. 일차 대전이 더 미친 짓이지 우리가 하는 행동이 미친 짓이 아니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60-70년대 네오다다는 선배 다다와 다르게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다. 이러한 네오 다다가 회의가 생기고 70년대에 개념 미술이 나온다. 거기에 모노화가 다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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