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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현대미술10 한국 70년대 아방가르드 미술 1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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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2,943회 작성일 15-12-2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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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 10  1970년대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 12/3/15 Avant-Garde Arts in Korea during 1970s

한국은 60년 대 후반에 아파트 건립 붐을 탄 복부인이 등장하여 부를 축척한다.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따 1972년10 월 유신을 감행한다. 70년대 예술인들은 자유의 제한을 받으면서도 물질 만능 풍조를 냉소하며 사회참여를 하기도 한다. 박완서의 <아파트>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아파트를 굴려 부를 마련하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국은 일본보다 아방가르드 미술이 10년 정도 늦게 시작된다. 70년대에 서울대 홍대가 주축이 되어 엥포르맬 위주의 국전에 반기를 드는 협회 AG (한국아방가르드 협회)가 결성되어 곽훈, 김구림, 김차섭, 김한, 박석원, 박종배 등이 활동한다.(1969-1975)협회의 저널에 평론가 이일의 전위 미술론 및 마르셀 뒤샹, 루치오 폰타나 등이 소개된다. 기존의 예술과 반대되는 개념 소개 및 한국 현대 미술의 문제를 진단하는 글을 싣는다. 잡지 홍익미술 (1972년)에 이우환의 글 <오브제 사상과 정체와 그 행방>이 소개되어행위 예술가에게 영향을 끼친다. 이론 공부가 붐을 이룬다.

신학철 가위 1974, 제 1 회 서울 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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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서울 비엔날레에서 신학철은 가위에 실을 감아 붙인다. 변기를 작품으로 가져온 마르셀 듀상을 쫓아 작품이 듀상피엔해진다. 김구림 이강소 등이 중심이 된다.

이강소, 소멸, 선술집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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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는 첫번째 개인전을 연다. 명동 화랑에다 선술집을 차려 술을 파는 관객 참여형 예술이다. 더 이상 작가가 작품을 만들지 않는다.

이강소, 무제 75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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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소는 첫번째 개인전 선술집이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2년 후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한다.바닥에 석회가루를  뿌리고 닭을 풀어 놓으니 닭발자국이 그림을 그린다. 폴락의 액션 페인팅을 패러디하는데 작가가 아닌 닭이 액션을 한다. 프랑스의 이브 클라인은 여성 누드 모델로 바디 페인팅을 50년대에시도했다. 이강소가 누드 퍼포먼스는 70년대한국 미술계에센세이션을 가져온다. 낙동강에 가서 모래를 뭉치는 등 의미가 없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최초로 비디오 아트를 한 최전선에 있는 작가이다.

김구림 걸레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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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성은 김구림과 어울려 활동한다. 서사가 없는 장면을 나열하는 낯선 실험 영화를 만들기도 하는데 영화계, 미술계에서 소외되자 외국에 간다. 1973년에 김구림은 일본에 가서 미술 수첩을 구독하며 비디오 아트를 한다. 15 년 걸레질을 하면 헤지는 걸레를 비디오로 단 5 분으로 압축하여 헤지게 한다. 허구 속의 공간인 브라운 관과 나와의 관계를 조명한다. 5 분 동안 같은 동작을 보는 것은 길다고 느끼는 반면 한평생은 짧다고 느낀다. 이우환의 모노화 이론과도 일맥상통한다.

양승권은 파리에서 유학을 하고 전자 미술전(kinetic art)을 1969년에한국에 선 보인다. 정지된 조각을 움직이는 아트로 바꾼다. 하지만 전자 미술이 냉대를 받자 그는 해외로 나가 버린다.키네틱 아트는 당시 유명한 미술 사조 중의 하나로서 미니멀리즘, 팝아트, 사물을 해체시키는 듀상적 아이디어와도 연관이 된다. 이런 맥락들에 대한 설명없이 신문은 전시 자체만을 설명하니 대중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아노 위의 정사, 정찬승, 차명희 제 1회 서울 현대음악제 1969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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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도 전위적 움직임이 일어난다. 한국 아방가르드음악의 선구자강석희는 독일에서 전자 음악을 공부하고 서울 현대 음악제를 기획한다. 백남준의 <Composition>이라는 작품을김구림 연출로 선보인다. 두 작가가 피아노 위에서 정사 행위를 하자 다리가 움직이는 대로 피아노가 소리를 낸다. 또한 듣기에도 힘든 전자 음악을 틀어놓고 얼굴에 검은 천을 쓴 김구림을 어떤 남자가 빨래 방망이로 때린다.(김구림 해프닝 1969)이 무렵 뉴욕에서는 1967년에 백남준과 반라의 샬롯 무어맨이 첼로를 연주했고 경찰에 연행됐다. 백남준은 음악에서 성을 다루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며 항의한다.

박현기 만다라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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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대 후반, 70년대 초 한국의 전위 및 행위 예술이 포문을 연다. 박현기는 백남준에게 자극을 받아 한국의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다.

박현기 비디오 돌탑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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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미국문화원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소개되자(1973) 박현기는 비디오를 통해 예술적 아이디어를 표현한다. 비디오 안에 돌탑을 보이고 그 위에 돌을 올린다. 사물을 가져다 놓고 실존적인 공간 안에서 사물과 인간이 만나서 관계가 형성됨을 말한다. 이우환의 현상학적 모노화적 아이디어를 비디오를 통해서 발전시켰다. 하지만 백남준은 TV 및 비디오 아트를 세계를 하나로 묶어 우토피아를 구현하는 새로운 예술 장르로 보았다. 같은 비데오 미술을 하지만 백남준은 박현기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대구 미국문화원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소개(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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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기 물 기울기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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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돌의 영상을 TV로 보여준다. 돌, 물, 등 선불교적 모노화적인 아이디어를 비디오를 통해 보여준다. 대구 현대 미술제에서 이강소와 박현기가 비디오 작업을 보인다.


이강소 Painting, Video Art, Single Channel, 29min 45sec,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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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20분 동안 투명판을 페인트하면 작가의 몸이 점점 안 보인다.아방가르드 미술을 비디오 매체로 보여준다. 액션 페인팅은 작가가 부각되지만 이것은 작가가 지워진다.


최병서 Drawing Video Art Channel 1978 

칠판에 분필로 11분 동안 그리는 것이 끝이다. 당시의 주류인 단색화, 모노크롬에 대한 패러디다. 단색화가들은 작품을 화랑에도 걸기고 팔기도 한다. 하지만 최병서의 드로잉 퍼포먼스는 비디오로 기록만 보여준다. 소수의 작가들만 비데오 아트를 했고 대부분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항상 형사들의 감시를 받는다.


백남준 Good Morning Mr. Orwell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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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 월 1일 동시간에 뉴욕 프랑스 런던 등에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방송되고 한국 시간으로는 자정에KBS 에서 3시간 동안 방영했다. 백남준 및 비디오아트에 대해 소개가 되자 억압을 받던 비데오 예술에 미술사적 가치가 부여된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은 80년대 한국 작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세계 미술에 대세가 될 것이라는 평과 한국 대중과 시각적 감각적 차이가 너무 크다 라는 엇갈린 논평이 나온다.


김점선 홍씨 상가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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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 교육 공학과 출신으로 나중에 홍대 미대에 들어가 미술 공부를 한다. 미국 유학의 인터뷰에서 떨어지고 부글부글 끓던 차에홍대 친구가 자신의 졸업식에 꽃들고 오라고 하자 분노한다. 그 친구를 묻겠다고 관을 짜고 <홍씨 상가>라는 팸플릿을 만들어 홍대로 쳐들어간다. 홍씨가 죽었다는 종이를 교문에서 뿌리자 소동이 일어난다. 자서전 <점선뎐>을 내고 90대 초반에 병으로 죽는다. 아들을 칭찬만을 하면서 키웠다고 한다.


이건용 <신체항 71-20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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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그룹의 일원인 이건용은 국립 현대 미술관의 땅을 파고 나무를 미술관에 가져온다. 이우환의 <관계항>처럼 현상학적인 작품이다. 청와대 가까운 곳에서 땅을 팠다고 공산주의 활동으로 지목된다. 70년대 한국 전위 미술은 정치적 압박으로 발전을 못하고 AG, 제4집단도 다 해체된다.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지 않는 미술을 주로 한다.


이건용 달팽이 걸음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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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에 한 퍼포먼스를 최근의 회고전에서 재연한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분필로 그리면서 조금씩 움직인다. 고문 휴우증으로 잘 걷지 못하지만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간다.


에저또 극단, 행위미술과 팬터마임과 돼지들의 산책 1978

사무일 베켙의 <고도를 위하여>같은 부조리 극이 주류를 이룬다. 한국에서도 부조리 극이 등장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킨다.팔이 없는 사람과 다리가 없는 사람이 같이 살기로 하여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2개다. 두 사람이한 여자를 좋아하여, 둘은 계단에서 굴러서 죽는다. 머리가 둘이지만 생각을 못하고 탐욕에 빠지는 70년대 시대상을 보인다. 이런 부조리극은 실험적 예술가들이 고문을 받으며 어렵게 살던 시대를 반영한다. 추송웅, 운여정, 유인촌 등이 창고 극장을 통하여 나타난다. 
 

에저토, 무너지는 소리 1972

김구림, 방태수 등이 한국 전위 연극을 이끈다. 방태수는 뉴욕에서 판토마임을 배워서 한국에 소개하며, 카페 떼아뜨르 등 8개가 넘는 소극장을 만들고 연극의 정의를 새로 내린다. 한국의 말 중에서 에- 저- 또- 라는 간사가 있다.  70년대 말을 할 수 없는 정치적 상황을 빗대어 극단의 이름을 에저토라고 짓는다.  당시 한국에서 행해졌던 장발 단속에 대한 비판을 연극으로 올린다. 장발의 미학에 관한 시가 낭송된 후 관객들이 정찬승의 머리를 자르고 나누어 가져간다.(정찬승, 이건용 삭발 1978,에저또) 방태수는 공공화장실에 적힌 낙서를 가져다가 연극으로 올린다. 또한 연극 <이 연극들은 제목이 없다>는 아무도 나오지 않고 불도 켜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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