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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들의 빨강 노트 - 폴오스터의 <뉴욕 삼부작>을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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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156회 작성일 21-05-26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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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시티는 길을 잃기 쉬운 곳이다. 도시 전체가 비슷하여 미로 같기도 하다. 거리의 악사는 사람들이 듣거나 말거나 음악을 연주하고, 홈리스는 신문지 아래서 잠을 자고, 사람들은 제 갈 길을 간다. 남에게 무관심하고, 자신에 빠져서 걷다가, 자신을 잃기도 하는 곳. 폴 오스터의 소설 <뉴욕 삼부작>은 이런 뉴욕을 무대로 한다. 뉴욕 삼부작은 <유리의 도시>, <유령들>, <갇힌 방>의 세 중편 소설로 구성되지만,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진다.

 

  건물과 길과 사람들이 끊임없이 쓰레기 조각을 쏟아내는 뉴욕. 수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모여드는 곳. 그들이 쏟아낸 생각은 언어가 되어 잠시 공중을 떠돌다 허망하게 부서진다. 그래서 뉴욕은 파편이 만연하는 <유리의 도시>일 수밖에 없다. 쓸거리가 바닥난 작가들은 방구석에서 고전을 탐독하며 허구의 세계에 몰입한다. 작가들은 <갇힌 방>에서 읽고 쓰기만 하는 <유령들>이 되어간다.


  <뉴욕 삼부작>은 탐정이 사건을 맡는 데서 시작한다. 보통 탐정 소설은 현실에서 일어날 것 같은 사건을 다루며, 작가가 준 힌트를 따라가면 해답이 나온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탐정소설은 현실적인 장르지만, 이 소설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비현실로 빠진다. 인물 간의 대화가 모놀로그인지, 탐정이 쫓는 인물이 자신의 분신인지, 독자가 판단해야 한다. 오스터는 현실과 상상을, 심리와 행동의 경계를 허무는데, 독자들이 그것을 알아내는지 게임을 벌인다

 

  우리는 모든 소설이 허구임을 알고 있지만, 정작 읽을 때는 '현실'로 착각하고, 감정 이입까지 한다. 이 점에 오스터는 회의적이다. 소설은 언어가 만들어낸 작위적인 상황이므로, 어떤 설정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탐정놀이에 빠져든 독자는 이 점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 하고 혼란에 빠진다. 뉴욕 삼부작은 소설의 한계와 작위성을 탐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메타픽션(meta fiction)에 속한다.

 

 유리의 도시


   <유리의 도시>는 책에 수록된 첫 번째 소설이다. 퀸에게 오스터 탐정을 찾는 전화가 잘못 걸려 오자, 그런 사람은 '여기 없다'로 소설은 시작한다. 여러 번 같은 전화가 걸려오자, 퀸은 자신이 오스터라고 거짓말하고, 사건 의뢰인 버지니아의 아파트를 찾아간다. 버지니아와 피터 스틸맨은 20대 후반의 부부다. 피터의 아버지는 보스턴의 부자 가문 출신으로 한때 컬럼비아대 신학 교수였다. 아버지는 피터가 두 살 때 그를 방에 가두고 사람들과의 접촉을 금했다. 인간은 실낙원과 더불어 타락했고, 영아가 타락한 인간들의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신의 순결한 언어를 재현할지도 모른다는 발상을 한다. 아들을 빛을 차단시킨 어두운 방에 가두고 피터가 말을 하면 매질을 하면서 언어 실험을 몇 년에 걸쳐서 한다.


   9년 후 아파트에 불이 나자 피터는 발견되고, 아버지 스틸맨은 정신 이상으로 감옥에 간다. 재산을 상속받은 피터는 병원으로 보내져 스무 살이 되도록 정신과 및 언어 치료를 받지만, 정상으로 회복하지 못한다. 버지니아는 피터의 언어 치료사인데, 결혼하여, 그를 돌본다. 아버지 스틸맨이 13년의 감옥살이를 끝내고 나올 때가 되자 피터 부부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그가 복수하러 올지도 몰랐다. 퀸의 임무는 아버지 스틸맨을 감시하여 버지니아에게 매일 보고하는 것이다. 퀸은 매력적인 버지니아에게 반하고, 이것을 눈치챈 버지니아는 기습적으로 퀸에게 키스하여, 그가 이 사건에 매달리게 유도한다.


   퀸은 사건 착수를 위해 스틸맨의 교수 시절의 논문을 열람한다. 그의 논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600년대 유럽의 종교가 타락하자, 신대륙 미국에서 신의 신세계가 건설될 것이라는 신학적 해석이 있었다. 아담이 사물을 명명할 당시의 언어는 신성했지만, 낙원을 이탈하자 선과 악은 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언어로 결탁한 인간들은 바벨탑을 지어서 신처럼 되고자 했고, 이에 노한 신은 탑을 부쉈다. 노아의 홍수 이후 320년 만에 바벨탑이 섰듯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지 320년 후, 1960년에 신의 도시(city fo god)가 이 땅에 서고, 인간은 신의 언어를 회복하리라는 것이 스틸맨의 이론이다. 1960년은 스틸맨이 아들을 방에 가둔 해였다.


   퀸은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내린 스틸맨을 매일 감시한다. 스틸맨은 100가의 누추한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매일 8시에 아침을 먹고, 종일 뉴욕 시내를 배회한다. 길거리에서 쓰레기 조각을 주워서 버리거나, 가방에 넣거나 한다. 사람과 말도 하지 않으며, 센트럴 파크에서 낮잠도 자며, 종일 걷기만 한다. 퀸은 빨간 노트를 사서 별 특이한 사항도 없이 반복되는 그의 행동을 꼼꼼히 기록한다. 이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단서도 못 잡고 답답한 퀸은 스틸맨이 매일 걸은 행로를 지도로 그려 보았다. 그랬더니 알파벳 모양의 패턴이 나왔다. 그 글자를 맞춰보니 그의 논문에서 언급되었던 THE TOWER OF BABEL이 나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스틸맨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퀸은 이 사건에서 손을 떼겠다고 버지니아에게 전화한다. 버지니아는 스틸맨이 아파트로 찾아올까 봐 무섭다며 그를 찾아서 계속 감시해달라고 말한다. 이 전화 후에 퀸은 버지니아와 연락이 끊긴다. 수십번 전화하지만 통화 중 신호만 울리고, 이 신호음은 사건의 끝을 보라는 신탁처럼 들려온다. 그는 버지니아 아파트 앞 작은 골목의 철제 쓰레기통에서 몇 달을 기거하면서 스틸맨이 나타나는가를 감시한다.

 

  퀸은 쓰레기통에서 밤낮으로 하늘을 보면서 이것이 진짜 고독임을 깨닫는다. 퀸의 원래 직업은 작가다. 처음에는 본명으로 책을 냈지만, 쓸거리가 다 떨어지자, 윌슨이란 가명으로 탐정 소설을 내서 근근이 먹고 살았다. 가명을 사용하니 소설의 평판은 윌슨 몫이어서 마음이 편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며 살았는데, 이렇게 홈리스가 되니, 퀸도 윌슨도 사라졌다.

 

  그 사이 스틸맨이 브루클린 다리에서 자살했음을 알게 된 퀸은 이제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버지니아의 아파트로 찾아간다. 문은 열려 있었고, 아파트는 비어 있었다. 작은 방에 들어가 그는 어두우면 자고, 환해지면 빨간 노트에 글을 썼다. 외면의 세계와 단절되자, 내면의 언어가 곧바로 글이 되었다. 이것은 추락(falling)이 아니라 나를 붙잡는(catching) 것 아닐까. 자신과 세상사에 관심이 없어진 그는 하늘과 삶과 인간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썼다. 빨간 노트의 여백까지 다 채운 후에 그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유령들


   두 번째 이야기 <유령들>도 탐정 이야기다. 탐정 블루는 어느 날 블랙이라는 남자를 감시하는 사건을 맡게 된다. 의뢰인은 그를 감시해서 일주일마다 보고서를 보내라고 블랙의 맞은편 건물에 방도 얻어 주었다. 외면을 살피는 일은 탐정을 하면서 수도 없이 해왔다. 블랙은 종일 방에 앉아서 책을 읽고 글만 쓴다. 이런 편안한 감시로 매주 수표를 받으니 처음에는 편해서 좋았지만, 차츰 이 무위 상태가 견딜 수 없다. 이제껏 행동에만 반응했지, 내면이란 것을 몰랐던 그는 사건을 맡으며 변화한다. 블랙의 생각이 궁금해서, 그가 읽는 책도 뒤져 본다.


  거의 일 년을 감시하다 보니, 블루 자신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블랙이 들어와 있었다. 자신을 이토록 파괴하는 블랙에게 화가 날 대로 난 블루는 아파트를 찾아가 블랙을 대면한다. 뜻밖에도 블랙은 사건을 의뢰한 장본인이었다. 블랙은 방구석에서 허구의 세계만 들여다보고 허구를 만들어 내는 작가의 삶이 견딜 수 없었고, 자신을 쳐다봐줄 누군가가 필요해서 그런 일을 꾸몄다고 한다. 이에 격분한 블루는 그를 죽도록 때리고는 그 방을 나온다. 자신이 감시한다고만 생각했지, 감시당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 후 블랙이 죽었는지, 블루는 도망갔는지, 결말은 알지 못한다.

 

닫힌 방


 마지막 이야기는 화자, 화자와 연락이 끊긴 유년 시절 친구 팬쇼, 팬쇼의 아내 소피가 등장한다. 어느 날 화자는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소피라는 여자에게 편지를 받는다. 그녀는 자신이 팬쇼의 아내라며 남편이 실종된 지 육 개월이 넘었다고 알린다. 팬쇼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의 글을 화자에게 넘겨서 화자의 처분을 따르라고 했다고 한다. 비평가인 화자는 팬쇼가 책을 낸 적이 없음을 알고 있다.

 

 화자는 팬쇼의 막대한 양의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보였고, 책들은 출판하자마자 성공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화자는 아름다운 미망인 소피와 결혼하고 팬쇼의 갓난쟁이 아들 벤을 입양한다. 인세는 들어오고, 믿을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팬쇼를 발굴한 화자는 팬쇼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과 동일시한다.


  어느 날 화자는 출판업자에게 이상한 말을 듣는다. 팬쇼는 존재하지 않으며, 화자가 팬쇼라는 가명으로 책을 냈다는 소문이 떠돈다고 한다. 출판업자는 소문을 잠재우고, 팬쇼 신화를 완성하려면, 화자가 팬쇼의 전기를 내면 어떠냐고 운을 뗀다. 그렇지 않아도, 소피와 더불어 행복하긴 한데, 글을 한 줄도 쓰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죽었다고 믿었던 팬쇼에게서 편지가 날라온다. 내 책이 출판된 것을 산문에서 봤다. 나는 이제 글쓰기라는 병을 극복했으니 글에는 관심 없다. 나는 남은 인생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으니, 너는 소피와 행복하라는 내용이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소피에게 말도 못 하고, 자신의 영혼과 맛바꾼 전기(傳記)의 계약금은 받았고, 화자는 진퇴유곡에 빠진다. 팬쇼의 행적을 답사 고증한다는 명목으로 타주로 유럽으로 헤매고 다니지만 내심은 팬쇼를 찾는 것이었다. 팬쇼에 집착하는 화자를 못 견디는 소피와도 별거에 이른다. 아무리 찾아다녀도 팬쇼는 나타나지 않고, 정신이 반쯤 나가서, 타락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화자는 팬쇼의 등장을 차분히 기다리기로 한다.


 화자는 다시 소피와 결합한다. 계약금을 돌려주고, 팬쇼의 수익금은 벤 앞으로 신탁을 들고, 팬쇼 작품의 대리인도 새로 정하는 등, 팬쇼를 그들의 결혼생활에서 몰아낸다. 소피와의 사이에 아들도 태어났다. 이 삼 년 후 이번에는 팬쇼가 못 견뎌 하며 보스턴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보낸다. 팬쇼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문틈으로 화자에게 말한다. 소피에게 새 남편을 얻어주기 위해 옛 친구인 자네를 찾아가라고 했지. 자네가 나의 글을 다 없앨 줄 알았어. 그 글은 다 쓰레기야. 작품이 세상에 나오자 화가 나더군. 내가 살아 있다는 편지를 보내서 자네 결혼 생활의 중심에 내가 있음을 기억하게 하고 싶었지. 나는 이제 죽을 것이야, 약을 먹었네. 나의 모든 것을 기록한 빨간 노트를 자네에게 주겠네.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팬쇼가 닫힌 방에서 실제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화자는 그 노트를 받아서 읽고는 그것을 다 찢어서 버린다. 더 이상 팬쇼의 글에 집착하지 않지만, 뉴욕행 기차는 이미 떠난 후였다. 그가 가족이 있는 뉴욕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 없다.

 

빨간 노트


 팬쇼의 빨간 노트는 뒷문장이 앞문장을 지우는 식으로 쓰여 있어서, 해독되지 않는다. 오스터는 언어의 상대성과 모호성을 지적하며, 이성 중심주의(logocentrism)에 질문을 던진다. 이성 중심주의는 언어의 절대적 힘을 과시하며 소설 자체의 완결성을 중시한다. 이 소설에서 스틸맨은 신의 언어를 회복하려는, 절대적 로고스를 믿는 이성중심주의적 인물이다. 언어에 회의적인 작가가 해결도 없는 이야기를 쓰려고 왜 그토록 애를 썼을까? 오스터는 이야기(words) 자체보다는 글을 쓰는 과정(struggle)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다중적 정체성을 찾기도 하고, 추락했다고 믿는 순간에 각성이 일어나기도 한다


우연히 휘말려 타인을 쫓아가는 듯 하지만, 결국 종착점에는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것은 한 가지 모습이 아니다. 오스터, , 블루, 화자. 팬쇼는 한 인물이면서 다른 인물이다. 정체성의 다중성은 죽을때 까지 계속되므로, 우리는 자신이 이렇다고 단언할 수 없다. 같은 이유로 남을 이해하고 안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소설은 여러 정체성을 경험해야 하는 작가들의 고민을 다룬 성장기(킨슬러로망 kunstlerroman)로 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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