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쳐가는 전쟁, 침묵하는 인간 -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 김미연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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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연 북리뷰


 

미쳐가는 전쟁, 침묵하는 인간 -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을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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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190회 작성일 21-05-26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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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차 세계대전 말기다. 독일군에게 잡힌 미군 포로 백 명은 드레스덴으로 후송된다. 국제법으로 보호받는 비무장 도시이니, 폭격의 위험이 없다고 한다. 그곳에서 공장일을 좀 하면 집에 보내준다는 말에 포로들은 안심한다. 돼지를 도축하는 제5도살장에 수용된 지 한 달 후, 도시는 대규모 폭격을 당한다. 칼과 바늘과 면도날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드레스덴은 사라지고, 재로 변한 달 표면 같은 광물만 남았다. 미전투기가 내려와 살아남아 움직이는 몇 사람을 보고 총을 쏘았다.

 

 커트 보니것은 1943년 스무 살에 징집된다. 5도살장 지하에 갇혀 있다가 살아남는다. 전후 미국 사회는 이차대전을 좋은 전쟁(good war)으로, 참전 용사를 영웅으로 추대하는 분위기였다. 1960년대에 월남전 반전 운동이 퍼지자, 보니것은 <5도살장>1969년에 발표한다. 20여 년 동안 지고 있던 돌덩이를 블랙 유머로 희화화한다. 미 공군은 드레스덴 공격을 23년 동안 비밀에 부친다. 이만오천의 사상자를 낸 드레스덴 폭격, 민간인 도시에 꼭 그래야 했는지 비난을 받는다.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는 당시 유행했던 사이비 과학 우생학을 정치 프로파간다로 이용했다. '우수한' 아리안족이 '열등한' 종족을 말살할 근거를 지어낸다. 당시 독일은 유대인의 몸에서 나온 지방으로 초와 비누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문제되는 인종 차별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만들어 낸 허구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소설에 전쟁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러니에 가득 찬 나와 너 같은 에브리맨이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결말을 알려주니 기승전결도 없고, 소설을 쓰는 과정도 공개한다. 보니것은 자료 수집차 옛 전우를 찾아간다. 전우의 아내는 반전 주부다. 너 역시 프랭크 시내트라가 나오는 전쟁 영웅 소설을 쓰냐고, 너희는 그때 애들이었는데, 전쟁을 이해했냐고, 내 아이들이 나가 죽게 하지 말라고 일침을 가한다. 보니것은 소설의 부제를 소년 십자군(Children's Crusade)으로 하겠다고 약속한다. 인간 대학살을 지적으로 묘사할 방법이 없어서, 내용이 엉망이라고 한다. 소설은 나오자마자 베스트 셀러가 되고, 무명작가 보니것은 세상에 알려진다.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메타픽션이며, 전쟁의 잔혹함을 초현실을 빌어서 표현한 실존주의 소설이다.


전쟁이란


 주인공 빌리는 야간대학 검안부에 다니다가 군종 사병으로 입대한다. 총도 잡아보지 못한 상태에서 룩셈부르크로 전입된다. 사단은 전멸하고, 낙오병 두어 명이 숲속을 헤매고 있다. 주검이 널려 있고, 천지 사방에서 연기가 난다. 빌리는 총알의 위협과 굶주림과 추위로 빈사 상태가 된다. 구두에 눈이 가득 찼는데, 스케이트를 탄다고 착각한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순간이 편안하여, 나를 냅두고 가라고 말한다. 싸워 본 적도 없고, 살려는 의지도 없는 무능한 군인이다.

 

 빌리는 독일군에게 잡힌다. 그 지역에 사는 십 대 초 소년과 노인 농부들이 전쟁 막바지에 징집되어 나왔다. 빌리는 갇혀있던 미군 포로들과 독일 국경까지 질질 끌려간다. 상이군인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며, 손을 머리에 올리고, 굴욕의 길을 걷는다. 사천 명의 부하를 잃은 한 연대장은 죽어가면서 부하들에게 연설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발이 피가 섞인 푸딩으로 변해서 죽어가는 병사도 있다. 종군 기자들이 독일의 승리를 기록하는 사진을 찍는다. 빌리를 도랑에 쳐 넣고 총을 들이대며 체포하는 상황도 연출한다.

 

자아의 분열


 포로를 우송하는 화물 기차는 가다가 며칠씩 서곤 한다. 밖에서 잠겨 있어 나가지 못한다. 환풍구 하나로 음식이 들어오고 다른 하나로 철모에 담긴 배설물을 버린다. 포로들은 악다구니 치다가도 음식만 들어오면 아름다워진다. 오물로 가득 찬 액체덩어리 아니면 딱딱한 돌덩어리로 변해갔다. 

 

 좁은 화물차에서 교대로 서거나 누워야 했다. 병사들은 빌리가 옆에 오면 욕을 한다. 울고 소리치고 몸부림치는 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다. 빌리는 눕지 못하고 버팀대에 매달려 졸다가 말다 한다. 몽롱해지면서 갑자기 눈앞에 번쩍이는 우주선이 나타난다. 우주선은 그를 트라팔마도어 행성으로 데려간다. 평화로워 보이는 외계인들에게 행복의 비결이 뭐냐고 물어본다.

 

 트라팔마도어인은 말한다. 우주는 사차원이니, 시간이 영원히 존재한다.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볼 수 있다. 죽는 순간도 그때일 뿐 우주 어딘가에 살아있다. 지구인은 구멍이 하나 난 철모 끝의 가는 대롱으로 세상을 본다. 끝에 보이는 점 하나가 다인 줄 알고 산다. 그러니 불행한 순간은 무시하고 행복한 순간을 길게 늘려라. 세상일은 무작위로 일어나고, 자유 의지 같은 것은 없다.

 

순간을 살면


 빌리는 제대 후에 정신 병원에 입원하지만, 의사들은 별거 아니라고, 어릴 적 수영 배우던 트라우마가 원인이라고 한다. 빌리는 외계인의 충고대로 살기로 했다. 그랬더니 행복해졌다. 검안 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 설립자의 딸과 결혼한다. 집채만한 몸집의 그녀가 사랑스럽지는 않지만, 순간만 잘 넘기면 된다. 드레스덴에서 주워입은 민간인 털외투 속에서 찾은 투 캐럿 다이야몬드를 결혼 선물로 주었다. 장인은 검안 병원도 차려 주고, 빌리는 지역사회에서 출세한다. 라이온스 클럽 회장이 되어 연사도 초대한다. 해병대 소령 출신의 연사는 북베트남이 미국의 방식을 거부하면 석기시대로 돌려놔야 한다고 말한다. 빌리는 기립 박수를 친다. 베트남전에 대해 항의할 마음이 없다. 그저 그 자리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재밌게 지내면 된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자퇴한 문제아지만, 월남전 그린베레 부대에 들어가 자랑스러운 군인이 되었다. 다 그런 거지 뭐...


평범한 악


 소설에는 '다 그런 거지 뭐(So it goes)'라는 표현이 백번 넘게 나온다. 교사 출신의 늙은 군인 에드거는 백을 써서 애국적인 전쟁에 참여했다. 영광스러운 제대가 코앞에 닥쳤을 무렵, 드레스덴 폭격 더미에서 주전자를 가지고 나왔다고 해서 절도죄로 총살을 당한다. 다이아몬드를 가진 빌리는 살아남는데, 주전자 하나 때문에 사살당한다. 영웅적인 군인은 죽고, 한심한 군인은 살아남는다. 부조리에 부딪힐 때, 우리도 별수 없다. 다 그런거지 하고 넘어간다.

 

 소설에는 특별히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다. 자기 의견이 없이, 다른 힘에 좌지우지되는 사람 투성이다. 지상의 위험을 모르는 지휘관들은 지시했을 뿐이고, 지상의 소년병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자신은 선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바로 악으로 미끄러지는 지점이다. 히틀러를 있게 한 군중도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이다. 개인이 군중 속에 숨으면, 악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 악의 익명성을 경고한 바 있다.

 

선한 의지


 트랄팔마도어인의 충고를 따른 빌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정의가 없는 세상, 고민할 필요 없어서, 가볍게 즐겁게 살았다. 그랬더니 남몰래 울거나 잠 못 자는 날이 많아졌다. 심야 방송에 나가서 떠들었더니, 미친 소리 한다고 쫓겨났다. 딸은 병원에 가두겠다고 위협한다. 한계를 넘는 폭력 앞에서 분열된 자아, 순간이라는 마취에 빠져서 살았더니, 미쳐가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무역 전쟁, 핵전쟁, 인공 지능, 사차원 혁명 등이 꿈틀거리고 있다. 불안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선한 의지를 품고 살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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