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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연 북리뷰


 

내 몸이 나를 배신할 때 - 프랜즌의 <인생수정>을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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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298회 작성일 21-05-27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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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어디선가 본듯한 장면이었다. 나의 이야기, 내 이웃의 이야기 같았다. 1950년대에서 2000년대 초기다. 미국의 중서부 도시인 세인트 쥬드에서 사는 70대 부부 램버트 가족이 등장한다. 아내를 존중하지 않는 남편, 자식에게 목매는 어머니, 늙은 부모를 피하고 싶은  자녀들이 나름 열심히 살지만, 인생은 늘 그런 것처럼 어딘가 미진하다. 철도 석탄 등 기초 산업이 부흥하던 미국 사회가 컴퓨터 출현으로 인하여 하이테크로 달음질치고, 사람들은 주식 덕에 백만장자가 되고, 물질 만능주의가 미국 사회를 흔들어 놓는다. 시골 보수적인 부모 밑에서 성장한 램버트 가의 세 자녀는 도시로 나와서 다양한 정체성을 경험한다.

 

가장 알프레드


아버지 알프레드는 철도 회사에서 기술부 수장으로 평생을 충성스럽게 일했다. 트레일러가 등장하고 시대가 변하자 기업 사냥꾼이 나타나서 회사를 합병한다. 회사는 철도 노선을 폐쇄하고 컴퓨터를 모르는 나이가 많은 직원을 해고한다. 청교도 사상을 부모에게 물려받은 알프레드에게 세상은 감옥같은 곳이다. 즐거움을 찾는 것은 죄악이며, 고통을 당연시한다. 가족에게 애정을 보인 적이 없고 오직 분노만 표현하며 살았기에, 그의 뇌는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다. 65세의 생일에 맞추어 은퇴하려 했는데몇 달 전에 갑작스럽게 사표를 낸다. 연금이 확 주니 아내는 만류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 무렵에 손 떨림이 시작되었다. 파킨슨병이다. 십오 년 지난 지금은 욕조에서 혼자 나오기도 힘들다. 먹는 약이 늘어나자, 환청, 환각도 나타난다. 문 꼭지를 수도꼭지로 착각하고, 밤에는 잠도 안자고 수없이 기저귀를 갖다댄다. 평생 모든 일을 혼자 처리했던 그는 아내의 도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아내 이니드


내막을 훤히 아는 자그만 시골 동네에서 이니드는 남편의 사랑을 못 받는 여자로 소문날까 봐 두렵다. 임신할 때마다 불룩한 배를 내밀고 자랑하며 다닌다. 황량한 가정에서 이니드도 원한으로 저녁상을 차린다. 남편과 둘째 아들 칩이 제일 싫어하는 간과 순무를 식탁에 자주 올린다. 알프레드는 늦은 밤에 식탁에서 잠든 일곱 살 아이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접시를 비우기 전에는 식탁을 떠나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엄명에 따라 아이는 음식을 조금 뜯어 먹다가 고개를 처박고 잠이 들었다. 자신에 대한 원한으로 만만한 작은 아들에게 화풀이하는 아내에게 이를 간다. 이니드는 사실을 조금만 왜곡하면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남편의 파킨슨병도 약 잘 먹고 운동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딸이 유부남을 만나는 눈치고, 둘째 아들이 갑작스럽게 교수직을 그만둔 것도 수상하지만 그런 생각은 지워버린다. 마약, 프리섹스 등 요상한 풍조에 물든 도시 아이들에 '비하면 내 아이들은 품격이 다르다. 작은아들이 임시로 일한다는 '웨렌 스트리트 저널' '월스트리트 저널'이라고 바꾸고, 소규모 은행에서 일하는 큰아들을 잘 나가는 투자 은행의 중역으로 둔갑시키고, 며느리와 손주는 천사같고, 막내 딸은 타임지 표지에 나온 세계적인 요리사라고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다 자란 세 아이를 아기 예수처럼 흠없는 존재라고 여긴다. 이니드는 이번 성탄에 귀한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 모을 결심을 한다.

 

큰아들 개리


아버지에게 흑인은 감옥에 가두고 죽여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들은 개리는 엄마가 세일에서 사 온

이쑤시개로 감옥과 전기의자를 만들면서 놀았다. 폭군인 아버지를 대신해서, 개리는 다정다감한 아들 노릇을 했다. 결혼한 개리는 자신의 가정이 얼마나 민주적인지 아버지에게 보이고 싶다. 주말에는 바베큐를 굽고, 자전거 하이킹을 가는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지만, 아이들이 생기자  아내 캐롤라인과 갈등이 생긴다. 부자 조부모 밑에서 성장한 캐롤라인은 아이들에게 TV를 무제한 허용하며, 장난감을 무제한 사주며, 외식과 주문 음식으로 산다. 거금의 신탁 보유자인 아내를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이길 방법은 없다. 아내 덕에 오버 타임도 안하고, 필라델피아 부촌에서 성공한 경제인으로 사는 것 아닌가. 물질은 넘치는데 알 수 없는 불안은 무엇인지. 거기다가 성탄 비행기표를 예약하라고 보채는 어머니 때문에 아내와 또 냉전 중이다.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는 개리를 아내는 시아버지의 우울증 유전 인자를 받았다고 몰아간다.

 

차남 칲과 막내 드니즈


대학에서 '현대 산업주의 비평'을 가르치는 칩은 교수 종신 계약을 일년 앞두고 있다. 현대 산업은 소비를 부추기고, 대중 미디어는 새것을 사게 만들고, 쓰레기를 불려서 환경 문제를 초래한다.

기업가들은 억만장자가 되어 일찍 은퇴하는 것이 꿈이다. 칩이 이런 내용으로 수업을 하는데,

여학생이 도전장을 던진다. 주식을 모집해서 회사를 키우고 부자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묻는다. 자신을 집요하게 유혹하는 그 여학생과 불미스러운 일로 해고당한 그는 뉴욕으로 가서 시나리오를 쓰며 빈둥거린다. 자신감을 상실하고 방황하던 중에 우연히 만난 리투아니아 남자의 사업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다. 리투아니아로 날아가서 그럴싸한 가짜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투자자를 속이는 인터넷 사업을 벌인다.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돈으로 호화판 생활을 두세달 하지만, 내전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긴다. 교수에서 뉴욕의 힙스터로 인터넷 전문가로 미국사회의 변화를 몸으로 체험한 후에, 결국 중서부로 돌아와서 정착한다. 드니즈는 딸이 귀한 램버트 집안에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의 집요한 관심을 받으며, 완벽한 딸 노릇을 했지만, 항상 도망가고 싶었다. 어머니의 센티멘트는 강아지 만큼 얄팍했다. 큰오빠가 사는 필라델피아로 대학을 가지만, 중퇴하고 요리사가 된다. 식당 주인과 결혼하여 요리를 배운 후에 이혼하고, 셀레브리티 요리사로 성공한다. 아버지의 가부장적 태도를 보고 자란 드니즈는 사회에 나와서도 남성적 정체성을 동경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동성애와 마약이 친근한 기호품이며, 성취에 대한 불안감이 극도에 달하여 방황하는 X세대를 나타낸다.

 

가족 싸움


성탄 이브 저녁이다. 우여곡절 끝에 전 가족이 모였다. 손주들 없이 혼자 온 개리를 보고 이니드는 매우 실망한다. 세 자식은 오즈의 마법사처럼 두려움과 존중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지푸라기 같은 남자로 탈바꿈한 현실을 악몽처럼 느낀다. 음식도 다 떨어뜨리고, 관절이 마비되어 온종일 꼼짝 않고, 관장을 한다고 벌거벗고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이니드는 밤새 헛소리하는 남편 방에 아들 개리를 밀어 넣는데, 개리는 아버지를 떠맡는 것이 아닌가 겁이 덜컥 난다. 다정한 아들 노릇은 이제 그만 하고, 어머니에게 악동처럼 굴겠다고 결심한다. 자신의 결혼 생활이 편하려면 어쩔 수 없다.

정신이 혼미한 아버지는 공항에서 들어서는 드니즈를 보자 헛소리를 한다. '그놈이 너와 잤다며 나를 위협했지' 드니즈는 뜬금없이 십오 년 전 이야기를 꺼내는 아버지에게 소스라치게 놀란다. 고등학교 시절에 아버지가 다니는 철도회사에서 인턴을 잠시 했다. 그때 어떤 하급 기술자에게 몸을 내던지듯이 처녀성을 버렸다. 정리 해고 대상이던 그 남자는 기술부의 보스인 아버지를 찾아가서, 자기를 자르면, 당신 딸과 잤다는 소문을 회사에 퍼뜨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이제야 드니즈는 당시 아버지가 갑작스레 회사를 떠난 이유를 알게 된다. 딸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기 위해서 희생을 했다니. 그런 아버지를 피해 늘 도망다녔다니. 드니즈는 숨이 막혀온다.

 

성탄날 아침 식탁에서 개리는 언성을 높인다. 자기는 이제 자주 못 온다고, 고물이 된 이 집을 팔고, 관리가 가능한 작은 아파트로 이사 가라고 한다. 그러자 부모를 짐짝 취급하지 말라는 드니즈와 싸움이 시작된다. 간신히 앉아있던 알프레드가 쿵 하고 바닥으로 쓰러진다. 병원에 실려 가고, 파킨슨과 치매와 우울증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요양병원으로 들어간다. 이니드는 매일 남편을 방문해서 깨끗한 옷을 입히고 집 음식을 먹인다. 그녀가 엉덩이 수술하는 날을 빼고는 하루도 방문을 거르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부모를 책임지라고 한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자신의 귀중한 세 아가를 성탄에 다시 한번 집으로 모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부모를 책임지라고 할까 봐 아이들은 하루빨리 돌아갈 궁리만 했다.

 

이니드는 혼자 남편을 돌본다. 결혼 생활 오십년 동안 남편이 잘못한 것을 하나씩 들추며 수정한'. '말도 없이 열흘 동안 집에 오지 않은 것은 정말 잘못했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도 잘못했어요'. '출근할 때 키스를 해 주지 않은 것도 잘못했어요' 남편을 난생처음 마음대로 주무르면서 감히 한 번도 못 했던 불만을 터뜨린다. 알프레드는 이년을 더 버티다가 곡기를 끊어서 죽는다.

 

수정의 시작


경제학적 용어로 수정(correction)이라는 말이 있다. 주식 시장에서 상향하던 주가가 하향하면서,

스스로 조정하는 현상을 말한다. 노년이란 짐승이 엉큼한 모습을 드러내고, 몸이 배신을 시작할 때, 인생도 하향장에 들어선다. 내 마음대로 했던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고 수정되는 시점이다. 알프래드의 사후에 주식이 폭락하자, 이니드는 노후 자금을 남겨준 남편에게 감사한다. 남편이 넣어둔 안전한 채권과 온퇴연금 덕분에 걱정이 없다. 자식들을 곁에 두고자 하는 마음은 이제 없어졌다. 75살에 눈부신 인생을 다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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