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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여자, 엘레나 페란테의 <홀로서기>를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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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1,927회 작성일 16-02-25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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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여자

엘레나 페란테(Elena Ferrante) <버려진 날들(The Days of Abandonment, 한국제목: 홀로서기)>를 읽고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2002년에 소설 <버려진 날들>을 출간했다. 작가는 자신의 신상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고, 소설 자체로만 읽히기를 원한다. 그래서 작가의 얼굴도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서면 인터뷰를 통해 페란테는 나폴리 출신의  50-60대 여성(남성이라는 설도 있다)이며, 자녀가 있으며, 교사 혹은 교수라고 추정된다. 그녀는 결혼, 이혼, 모성 등 여성의 이야기를 불편할 정도로 솔직하게 다루며, 현재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작가다.

 

남편이 떠났어요 


4월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집을 나갔다. 전에도 두어 번 있었던 일이다. 5 년 전에도 그랬다. 남편이 대학에 취직이 되어 올가(Olga)네 가족은  토리노로 이사를 왔다. 그 때 한 여자 동료가 집을 구해주며 무척 친절하게 굴었는데, 친절은 족쇄가 되었다. 그 여자는 15살 난 딸이 있는 부유한 과부였다. 남편은 그 딸에게 공부도 가르치고 보호자 역할을 했다. 올가는 잠시 그 과부와 남편의 관계를 의심했지만, 우연히 그녀의 딸이 남편에게 키스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문제를 직시하는 것을 꺼리는 성향의 올가는 며칠 후 그 문제를 남편에게 거론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정신이 잠깐 나갔었다고 하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바로 정리했다. 그런 일이 있었으므로 올가는 이번에도 별 일이 아닐 것이라 여긴다.   


나폴리 태생인 올가는 감정을 그대로 내보이는 시끄러운 집안의 분위기가 싫었다. 그래서 정반대의 조용한 성격을 길러왔다. 그녀의 유년시절에 항상 자녀들을 뒤에 달고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요리를 하던 이웃집 아줌마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그녀를 떠났다. 그녀는 한동안 울부짖다가 자살을 시도했고,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 


양장점을 하는 올가의 엄마는 종업원들을 데리고 하루 종일 그 '버림받은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여자는 사랑을 잃으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어린 올가는 작업장에서 놀면서 그 여자 이야기를 생생히 들었다. 작가가 꿈이었던 올가는 남자에 목매는 그런 여자를 경멸했으며, 지적이고 강인한 삶을 사는 여자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올가는 학생 시절에 마리오(Mario)를 만나 결혼하고 그가 교수가 되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그녀는 한때 출판사에서 일하며 소설책도 냈지만, 남편의 반대로 전업주부가 되었다. 엔지니어인 남편은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올가는  감정을 억누르는 성격이라서, 부부는 한번도 소리 높여 싸워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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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와요 


이제 가출한 남편은 매일 같은 시간에 집에 들린다. 아이들과 놀고, 애견 오토(Otto)를 산책시킨 후에 돌아간다. 그는 올가에게 자신은 문제가 많은 형편 없는 남편이니 버리라고 말한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감지한 그녀가 여자 때문이냐고 묻자 그는 긍정한다. 올가와 다툰 후 남편이 더 이상 소식이 없자 그녀는 물이 마른 화분처럼 말라간다. 그러다 한 달 후 남편이 집에 오겠다고 뜬금없이 전화를 한다. 올가는 화장도 하고, 시할머니의 귀걸이도 달고, 청소도 하며 아이들까지 깨끗하게 준비시킨다. 그가 이제 제 정신으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초췌한 모습의 올가와는 달리 남편은 젊고 행복해 보인다. 감정이 격해진 올가는 '그 창녀가 누구냐'고 다그친다. 그 옛날 피를 흘리며 자신의 손목을 그었던 나폴리의 '버림받은 여자'가 스쳐간다. 올가는 짐을 챙겨가는 남편을 붙잡기 위해 테라스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낀다. 며칠 후 남편이 몰래 시할머니의 귀걸이를 가져갔음을 발견한 그녀는 현관 열쇠를 바꾼다. 이제 보호해 줄 남자도 없고 벌거벗은 채 세상에 노출된 듯 하다. 


올가는 남편과 여자를 찾아 밤새도록 거리를 헤매기도 한다. 거리에는 '자유로운 삶, 자유로운 우리'라는 전광판이 현란하다. 남편은 저 문구대로 자유를 찾아간 것일까? 그가 찾은 자유로 인해 나는 지금 얼마나 큰 족쇄에 묶여 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올가는 거리에서 여자와 함께 있는 남편과 맞닥뜨린다. 그런데 남편 옆에 5년 전의 바로 그 과부의 딸 카를라(Carla)가 있는 것이 아닌가!  남편은 그 애가 성년이 될 때까지 기다리며 올가를 떠날 준비를 했던 것이다. 같이 사는 여자의 몸은 나의 남은 시간을 알려주는 미터기라고 그가 말한 적이 있던가? 올가는 카를라의 귀에 걸린 시할머니의 귀걸이를 낚아채고 싶지만, 남편의 셔츠만을 찢었을 뿐이다. 아, 저 애를 감싼 젊은 육체를 열어서 추악한 내장을 보일 수만 있다면...   

 

여자 나이 38살에 남편도 직장도 없는 올가는 이제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다. 그러자 언어와 행동을 절제했던 평소의 올가와는 다르게 폭력적 행동들이 분출한다. 남편이 카를라와 동침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발음해 본 적도 없는 욕이 절로 나오며, 충고하는 친구들과도 싸우고, 오토를 때리기도 한다. 남편의 말투와 태도를 닮은 아이들이 미워서 한번은 길에 버리려고도 했다. 정신이 거의 나가버린 올가는 고장난 전화도 못 고치고, 현관 열쇠도 못 열고, 자신의 공간에 갇혀서 쩔쩔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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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고 살았어요 


남편과 카를라를 목격한 올가는 미움과 모욕감과 복수심이 끓어 넘친다. 나는 결코 죽음을 택한 나폴리의 그 여자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올가는 아래층 남자 카라노(Carrano)의 면허증을 주웠었는데, 그것을 돌려 준다는 핑계로 그를 찾아간다. 마지막 한 조각의 양식도 던져버린 것이다. 한번도 남자를 유혹해 본 적이 없는 올가는 자신이 아직도 매력적인지 알고 싶다. 파자마 차림의 카라노는 한밤중에 와인을 들고 나타나 신세타령을 하는 여자의 말을 열심히 들어준다. 그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나이 탓으로 몸이 따라주지 못한다. 올가는 아차 싶지만, 이제 돌아갈 수도 없다. 한 순간에 이렇게 자신을 방치(abandon)하다니. 얼굴이 뜨거워진다. 


올가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글을 쓰면서 지난 15년의 결혼생활을 정리해본다. 영혼은 이리저리 부는 바람이었으며,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났다. 우리는 일어난 일들에 반응하며 살 뿐이다. 마리오를 만나 단 하나의 사랑인 줄 알았고, 기계의 암수적 결합을 믿는 남편에 맞추어 소녀처럼 살았다. 그녀가 임신과 육아에 지쳐있을 때 카를라가 나타났을 것이다. 


카라노의 아파트에서 돌아온 다음날. 아들이 아프다. 그 와중에도 올가는 자신의 헝클어진 모습이 싫어 화장을 한다. 올가의 엄마는 말했다. 여자는 항상 몸을 가꾸며 남자를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고. 그녀는 화장으로 본 모습을 숨겼지만, 남편은 사랑의 말로 본 마음을 숨겨왔다. 아름다움은 우리의 본 모습을 감추고, 매끄러운 언어는 본 마음을 감춘다.

 

남편의 애견 오토가 사납게 짖어댄다. 나도 지금 정상이 아닌데 모두 자기들만 돌봐달란다. 할 수 없이 올가는 개를 데리고 나간다. 개는 엄청난 생명력으로 오물을 배설하고는 나비를 좇아 숲으로 사라진다. 마치 현실을 쳐내고 욕망을 좇아 간 남편처럼.  하지만 오토는 다시 잡히는 것이 싫을텐데도 어느 새 그녀 옆으로 돌아온다.

 

온 집안에 병의 기운이 퍼지는지 아들도 열이 심해지고, 오토도 독을 먹었는지 몹시 아프다. 오토는 마리오의 서재로 찾아들어 주인의 냄새를 맡으며 죽어갔다. 한바탕 울고 난 올가는 오토가 희생양이 된 듯하여 더욱 괴롭다. 며칠 전 개미떼가 집 안으로 침입했을 때, 세상이 자신을 공격하는 듯해서  그녀는 밤새도록 살충제를 뿌려 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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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지나왔어요


올가는 죽음이란 현실을 지켜보며, 지금까지의 자신의 고통은 비현실적이었음을 느낀다. 생각은 사람을 한없이 미궁 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더욱 두려움을 준다. 마치 애인의 변신을 의심하여 기차에 뛰어든 안나 카레리나처럼. 이제껏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했던 오토의 죽음은 헌신적으로 살았던 과거의 올가의 죽음이기도 하다.

 

아침에 카라노가 찾아오자 올가는 그에게 오토의 시체를 치워줄 것을 부탁한다. 오토의 죽은 몸은 너무도 무겁다. 이에 비해 생명력은 얼마나 가벼운지!  그 누구도 이 생명력을 무겁게 짓누를 수 없다. 하물며 떠난 남편이 뭐라고... 그녀는 결혼 반지도 던져 버리고, 아들을 치료하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을 지나왔더니 단조로운 일상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실제로 나락으로 떨어져 봤더니 그것도 별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삶을 알았어요 


직장을 잡은 올가는 바쁘기 그지없다. 아이들은 정기적으로 남편과 카를라를 보러 간다. 그들은 카를라 부모의 근사한 맨션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점차 카를라의 말투를 닮아가며, 그녀가 엄마보다 예쁘다고 칭찬한다. 카를라는 벌써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이들 안에는 올가만이 아닌 수많은 사람이 공존하면서, 그들만의 독립적인 개체로 성장할 것이다. 이 아이들이 어떻게 나만의 것일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두 집을 오가며 심술을 부리면서 올가의 화를 돋구지만, 올가는 참아 넘긴다. 분노의 뚜껑이 다시 열리면 원초적인 본능이 튀어나올 것이므로. 인간의 행동과 언어가 추락하는 것도 한 순간임을 그녀는 안다.  


생활은 안정되어 가지만 삶의 활기는 별로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올가는 친구의 초대로 음악회에 간다. 그런데 뜻밖에도 첼로를 연주하는 카라노를 무대에서 발견한다. 유명한 연주자라고 친구가 귀띔한다. 관객에게 환호를 받는 이 음악가! 전에 그토록 초라했던 남자가 영혼을 울리는 음악가로 변신한 것이다. 카라노가 사라지고 조명이 꺼졌다. 아, 삶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환호를 받다가도 사라지고, 심장이 뛰다가도 갑자기 멈추고. 인간의 삶에는 항상 죽음이 같이 있는 것을.


어느 날 올가는 마리오와 카를라를 직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다. 마리오는 그새 늙었다. 올가는 얼마 전에 사람들이 남편을 기회주의자이며 건방진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소문대로 그런 사람이었냐고 묻는다. 그는 '내가 어떻게 아냐'고 답한다. 이제 남편의 실체를 본 그녀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진실성 없는 말과 행동으로 살아가는 남편은 아마도 평생 육체만을 좇으며 살아갈 것이다. 남편에게 버려진 시간을 살면서 올가는 온갖 몸부림을 쳤는데, 그것은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었다. 버림 받을까봐 전전긍긍했는데 버림 받아보니 그것도 별 것 아니다. 깊숙이 숨어있던 두려움을 꺼내어 대면하고 나니, 오히려 거기서 벗어나고 성숙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사람도 사랑도 다 소비된다. 제한적이고 외로운 존재들인 우리. 그렇기에 우리 신자들은 저 너머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스스로 방치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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