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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나는 누구인가, 줌파 라히리 <이름 뒤에 숨은 사랑>,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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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2,187회 작성일 15-02-16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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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 나는 누구인가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 (The Namesake)>을 읽고
                                                                                                                                           
                                                                                                                                                                                    김미연
 


두 정체성 안에서

누구의 인생에도 아귀가 꼭꼭 들어맞는 순간은 별로 없다. 삶에 있어 완벽한 순간이 얼마나 될까. 소외되고 경계에 놓여있는 삶이기는 제 나라든 남의 나라든 마찬가지다.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의 소설<이름 뒤에 숨은 사랑 (The Namesake)>에 나오는 인도 청년 야쇼케 강굴리(Ashoke Ganguley)는 기차 사고가 생의 전환점이 되어 미국 이민을 온다. 사고가 났을 때 그는 기차에서 책을 읽고 있다가 책장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눈에 뜨여서 구조된다. 그의 생명을 구해준 책은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의 단편<외투 (The Overcoat)>였다. 사고 후 오랜 기간 움직이지 못했던 그는 몸이 회복되자 너른 세상 미국으로 유학을 온다. 
 
소설 <외투>는 초라한 낡은 외투를 입고 다니는 말단 서기에 대한 이야기다. 외투가 다 해져서 수선이 불가능하자 주인공은 힘들게 돈을 모아 새 외투를 장만한다. 새 외투로 인해 기분이 좋아진 그는 마치 다른 세상을 사는 듯 하다. 사람들도 갑자기 그에게 친절해진다. 하지만 불한당에게 외투를 강탈당하고 관청에 신고하지만 오히려 모욕을 당한다. 그는 정신적인 충격과 추위로 병이 나서 죽는다. 인간이 입고 있는 외투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조건임을 희화화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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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마(Ashima)는 중매로 만난 남편 아쇼케를 따라 미국에 온다. 아시마는 미국 생활을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산 세월에 비유한다. 낯선 땅에서 하나도 정상적인 것이 없는데도 정상적인 듯 살아내야 한다. 아들이 태어나자 출생증명서에 기입할 이름이 필요하다. 인도인은 유년 시절에는 애칭으로 불리다가 학교에 들어갈 즈음에 최고로 좋은 이름을 가지게 된다. 아기를 위해 인도에서 할머니가 이름을 지어서 편지로 부치지만 분실된다. 급해진 아쇼케는 기차 사고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작가의 이름 ‘고골(Gogol)’을 일단 써 넣는다. 고골이 태어난 후 아쇼케를 괴롭히던 기차 사고의 악몽은 사라지고, 대신에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한 기적으로 여겨진다.
 
고골은 6개월이 되자 ‘이유 예식’을 치룬다. 고골 앞에 흙, 펜, 돈을 늘어놓고, “너의 운명을 골라잡으라 (Confront your destiny)”고 친지들이 말한다. 강요된 선택에 직면한 고골은 부유(浮游)할 자신의 정체성을 예시하는 듯 아무 것도 못 잡고 울음을 터트린다. 언뜻 보면 우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사는 것 같지만,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그리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드디어 아버지 아쇼케는 대학 교수가 되고 딸 소냐도 태어난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고 보스톤 교외에서 안정된 삶을 꾸려간다. 하지만 그는 액센트가 있는 영어로 학생을 가르치고, 가장 노릇을 하느라고 한 번도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표현한 적이 없다. 삶의 의무와 부담으로 인해 이민 1세대의 정서는 다 메말랐는가? 학생을 가르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는 아쇼케에 비하면 어머니 아시마의 성취감은 저조하다. 그녀는 미국 생활이 불편하고 항상 무언가 결핍이 있다고 느낀다. 뭘 잃어버려도 남편이 전화하여 찾아주고, 운전을 못해서 어디든지 남편과 함께 가야 한다. 인도 여자의 미덕은 의존과 순종이며, 여자가 독립적이면 흉이 되는 문화에서 자란 그녀는 이민 생활에 적극적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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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굴리 가족은 이민 생활이 오래 되어도 인도 친구만 늘어간다. 인도 가족들은 주말에 모여 남자, 여자, 아이들로 나뉘어 놀며, 인도음식만 먹는다. 부모들은 캘거타에 가면 자아를 찾는 듯 하다. 그들은 애칭으로 불리고 갑자기 크게 웃고 자신감이 넘친다. 고골과 소냐는 이런 부모의 모습이 낯설다. 사랑을 넘치게 받던 인도 여행에서 돌아오면 강굴리 가족은 백인 동네에서 자신들만 고립된 듯 느껴진다. 자신을 알아주는 인도 친구들과 만나면 그제서야 존재감이 생긴다. 하지만 고골과 소냐에게 있어서는 아는 사람이 없는 인도는 그들의 고향이 아니다. 고향이란 어떤 장소가 아니라 나를 아는 타인의 기억 속이다.
 
고골이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고골의 정식 이름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을 따서 '니킬(Nikil)'로 짓는다. 하지만 고골은 '니킬'이라는 낯선 이름이 싫다. 부모는 너는 학교에서만 ‘니킬’이고, 집에서는 영원히 '고골'이므로 걱정 말라고 한다. 하지만 꼬마 고골은 이로 인해 병까지 난다. 교장은 ‘니킬’이라는 부름에 대답하지 않는 아이의 출생증명서를 확인하고, 고골로 부르기로 했음을 부모에게 통지한다. 미국 학교는 부모의 의견보다 아이의 의견이 존중된다니 부부는 어이가 없다. 고골은 아이들이 ‘기글 (giggle), 가글 (goggle)’ 하며 놀려도 자신의 이름이 자랑스럽다. 하지만 우편함에 새겨진 ‘Ganguli’가 할로윈에 ’Gang’으로 뒤바뀌고, 상점 점원들이 인도 액센트를 쓰는 부모를 투명인간 취급하자 수치심을 느낀다. 어느날 고골은 학교에서 묘지로 현장학습을 간다. 그는 묘비명의 탁본을 뜨면서 미국 최초의 이민자들이 존경스럽고, 초기 청교도들을 자신의 조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민 1세대와 2세대는 뿌리에 대한 의식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름에 얽힌 아버지의 기차사고를 모르는 고골은 커가면서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이름 ‘고골’이 싫어지면서 ‘니킬’로 불리기를 희망하게 된다. 하지만 이민자 부모들은 미국 사회에 익숙하지 않아서 법적 절차를 되도록 피해간다. 강굴리 부부는 애칭 ‘고골’이 이름으로 굳어지자 복잡하다는 이유로 구태여 개명 절차를 밟지 않는다. 하지만 청년 고골은 스스로 법원에 가서 정식으로 이름을 '니킬'로 바꾼다. 이유를 묻는 판사에게 그는 "내가 (고골이라는) 이름이 싫어서 " 라고 답한다. 미국이란 나라는 “내가 싫다”라는 이유가 통하지만, 부모 세대는 “내가 싫어도 어쩔 수 없다”라는 사고에 익숙하다.
 
미국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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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는 여전히 고골이지만 대학부터 집 밖에서는 니킬로 알려진 그는 두 이름 사이에서 종종 헷갈린다. 그간 니킬은 몇 명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러다 뉴욕에서 건축설계사로서 취직을 한 후에는 맥신을 만나 첼시에 있는 그녀 부모의 저택에서 같이 산다. 맥신은 눈치를 보고 산 적이 없는 미국 주류 사회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의 일원이다. 둘의 관계에 있어서도 고골의 의사는 별로 중요치 않다. 고골은 백인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니 은근히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딸의 남성 편력에 대해 별 간섭을 하지 않는 맥신 부모는 마치 자신들의 미술 콜렉션에 이국적인 풍경화 한 점을 보태듯 니킬을 대한다. 맥신 부모는 전문 직종의 친구들을 선별 초대하여 인맥을 넓히고, 양보다 질적인 음식이 놓인 식탁에 앉아 지적인 대화를 즐긴다. 온 동네 벵골인을 다 초대하여 지나친 음식 대접에만 신경쓰며 번잡한 파티를 여는 고골의 부모와는 다르다. 애정 표현에 꺼리낌 없는 맥신 부모에 비하면, 고골 부모의 사랑은 누구에게 내보일 만한 성질이 못된다. 맥신 부모는 뉴햄프셔 호숫가 별장에서 자연 속으로 침참하는 둘만의 연례 휴가를 가지지만, 고골 가족의 인도 여행에는 수많은 선물을 챙겨야하는 의무감이 우선한다. 고골 부모에게는 맥신 부모가 가진 지성도 부도 안정감도 없다.
 
하지만 니킬은 차츰 자신이 맥신 가족안에서 이방인임을 느낀다. 그들은 평소에는 니킬을 ‘흠잡을 데 없는 미국인’으로 여기는 듯 하지만, 그들의 백인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 친구들은 고골에게 “인도 여행할 때 병에 대한 염려가 없어서 좋겠다”고 말한다. 그들은 고골의 국적에는 관심도 없고, 단지 외적인 모습으로 그를 인도인으로 단정짓는다. 고골은 백인과의 문화적 동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거절을 당한다. 이민 2세들은 이러한 미묘한 인종 차별(casual racism)을 사회에서 빈번하게 겪고 있을 것이며, 그들의 정신 세계는 흠집이 상당히 나 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 아쇼케가 타지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한다. 고골은 황급하게 비행기를 타고 병원으로 날아간다. 그는 흰 천으로 덮인 아버지의 나체를 보자 수치심에 얼굴을 돌린다. 우리는 옷을 입어야 비로소 인간답다고 여기며 벌거벗은 몸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외투처럼 걸치고 있는 인종, 문화에 따라 이토록 달라지는가?
 
아버지의 죽음은 ‘니킬’에게 ‘고골’을 일깨운다. 니킬이 자신의 가족과 잦은 왕래를 갖자 맥신은 그 문화적 이질성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는 드디어 이러한 맥신과 헤어진다. 맥신은 그녀의 부모가 그랬듯이 WASP의 전통을 이어서 이 땅의 자신만만한 주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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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킬은 어머니의 주선으로 어린 시절에 본 적이 있는 인도 아가씨 모슈미(Moushumi)를 만난다. 모슈미는 모범생 공부벌레였고 부모님께 순종하는 소녀였다. 하지만 어른이 되자 인도와 미국 모두를 피하여 제3의 문화권 파리에 가서 제멋대로 살아왔다. 미국인 약혼자가 그녀의 가족을 폄하하자 서로 싸우고, 남자는 떠나고 모슈미는 절망에 빠져 있을 때였다. 백인 문화권에의 동화에 각각 실패한 고골과 모슈미는 인종적 동질감과 어머니들의 후원으로 신속하게 결혼한다. 하지만 모슈미는 결혼 후에 곧 바람을 피운다. 그녀의 뿌리에 대한 열등감은 그녀의 별명 마우스(mouse)처럼 숨어서 활동하는 익명의 존재가 되게 한다. 그녀는 잘 나가는 백인 친구들 그룹 안에서 인정받고 싶다. 모슈미는 삶의 의무에서 도망치고, 물질주의를 좇아가며, 자아에 대한 확신도 없다. 현재의 삶에서 도망쳐서 낯선 곳에서 항상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그녀의 문제는 환경에 있지 않다. 고골은 그녀와 이혼하고는 비로소 편안함을 느낀다.
 
완성을 향하여
 
아시마의 세계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 남편은 없고, 아이들은 자신의 세계를 따로 열어간다. 아시마는 나이 50에 인간은 결국 혼자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혼자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시들어가는 것은 싫다. 아시마는 늦게나마 운전면허도 따고 도서관 사서로 일도 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임신처럼 힘들었던 미국생활. 그래도 의무를 다하면서 살다보니 어느새 새로 이민오는 인도인에게 대모같은 존재가 되었다. 과거에는 인도만이 고향이었지만 이제는 미국도 어엿한 내 집이 되었다. 이제부터 인도와 미국에서 반반씩 지내려 하는 아시마는 그 이름의 의미대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그녀 나름의 의미있는 삶을 창조해 갈 것이다. 또한 그녀는 문화적 친밀감이 결혼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아들의 이혼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아시마의 사고방식은 어느새 미국적으로 변해 있다.
 
어머니가 인도로 떠나기 전 니킬은 보스턴의 집을 방문한다. 고골이라고 불러줄 아버지와 어머니는 곁에 없게 되고, 이제부터는 건축가 니킬로서 살아갈 것이다. 한 때 그렇게 원했던 일, ‘고골’이 사라져 갈 것인데, 이것이 그에게 위안이 되지 못한다. 니킬은 방을 정리하며 아버지가 오래 전 생일선물로 준 고골의 단편집을 발견한다. ‘아들 고골에게’ 라고 서명된 것을 보자 마치 아버지가 기차 사고에서 고골에 의해 살아난 것처럼, 자기 내부의 고골을 재발견하고 기뻐한다. 그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완벽한 사람’이란 ‘니킬’의 의미처럼 이제 두 문화, 두 나라, 두 개의 자아가 어우러진 이민 2세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갈 것이다.
 
삶에는 예측 불가능한 일들이 일어나며 우리는 처음에는 그것들에 불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일들은 삶을 지배하는 동시에 삶을 견뎌가게도 한다. 처음부터 완벽한 이름, 완벽한 삶이 있을까.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인생을 의미있게 꾸며가다 보면, 어울리는 이름과 편안한 외투를 소유한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는 신이 주신 보편적 정체성이 또한 내재되어 있지 않은가. 외부 조건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아우르는 본질적 가치가 있기에 우리의 삶은 그래도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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