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하나, 펄벅(Pearl Buck)의 <대지(The Good Earth)>를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 김미연 북리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미연 북리뷰


 

삶과 죽음은 하나, 펄벅(Pearl Buck)의 <대지(The Good Earth)>를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페이지 정보

작성자 Mint 댓글 0건 조회 1,960회 작성일 14-11-30 10:05

본문

삶과 죽음은 하나
펄벅(Pearl Buck)의 <대지(The Good Earth)>를 읽고   
 
 

                                
 
미국 작가 펄벅(1826-1973년)의 1931년 작 <대지>의 주인공 왕룽(Wang Lung)은 말이 많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는다. 하지만 가난한 농부를 왕대인(大人)으로 만들어 준 아내 오란(O-lan)은 정작 말이 없다. 오란은 비록 종 출신이지만 남편에게는 대박 와이프였다. 아내로 인해 왕룽은 부자가 되고 슬하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둔다. 살만하자 왕룽은 못 생기고 전족도 하지 않은 아내가 보기 싫어져 첩을 얻는다. 그는 안 그러고 싶었지만 저절로 눈이 다른 여자에게 돌아갔다고,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오란은 가슴앓이를 하다가 병들어 죽고, 그는 노년에 어린 첩을 또 얻기도 한다. 왕룽의 사설은 계속 이어진다. 내가 죽으면 백치 딸을 누가 돌보냐고, 그래서 그 첩에게 딸을 부탁하고 죽을 준비를 마쳤다고, 나 잘 하지 않았냐고. 왕룽은 이제 머지않아 만날 부인에게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 놓는다.
 
오란은 살아있는 동안 말이 없었지만, 우리는 왕룽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알아진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땅으로 돌아가 오란 곁에 묻힐 수 없음을.
 
여자의 일생

 
아버지는 청년 왕룽에게 여자는 노동력과 아들을 제공할 뿐이며, 반반하게 생긴 여자는 별로 소용이 없다고 가르친다. 아버지는 황부자댁에 가서 얼굴이 못 생기고 나이가 좀 찬 여종이 있으면 달라고 부탁한다. 반반한 어린 여종은 이미 그댁 도령들이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왕룽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황대인댁 여종 오란을 아내로 맞이한다. 오란은 어릴 적에 종으로 팔려서 매를 맞으며 부엌일만 줄곧 했고 말도 표정도 없다. 오란의 적극적 노동으로 왕룽네는 전에 없던 대풍작이 들어서 왕씨 집안에 부를 예고한다. 집안 곳곳에 음식이 저장되고, 노부의 건강이 좋아지고, 왕룽은 이런 오란을 만족해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를 궁금해 하고 위하는 것은 남자로서 창피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내를 '오란'이라는 이름보다는 '여자(the woman)'라고 지칭한다. 왕룽의 논리는 간단하다. 여자가 생명을 낳고 남자와 힘을 합해 땅을 일구면 땅은 생명을 이어가는 소출을 준다. 아기를 수유하면서 땅으로 젖을 뚝뚝 흘리는 여자를 보며 왕룽은 행복해한다. 별 대화도 없지만 부부는 자연스럽고 편한 관계가 되어간다.
 
시종일관 무표정인 오란이지만, 속으로는 생각이 많다. 오란은 자신이 종으로 있던 황부자집에 가슴 깊숙한 분노가 있다. 계집종들을 번갈아 유린하고 향락과 아편을 탐하는 황부자네가 별로 부럽지 않다. 오히려 평민의 아내가 된 자신이 자랑스럽다. 오란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아이를 낳는다. 설빔을 입힌 아들을 안고, 자신도 치장을 하고, 월병을 구워서 당당한 손님으로 황부자집에 새해 인사를 간다. 왕룽은 처음 오란을 데리러 갔을 때 황씨네 문지기에게 받았던 모욕감이 여전히 있지만, 이 설나들이가 너무도 자랑스럽다.
 

 
왕룽의 무의식 속에는 부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잠재하고 있었다. 오란을 통해 황부자네서 땅을 판다는 말을 듣자 만류하는 오란을 뿌리치고, '부자가 소유했던 땅'을 사면 신분 상승이라도 하는 듯 그 땅을 사고야 만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그의 욕심에는 불이 붙는다. 오란이 둘째를 임신하자 밭일을 못 할까봐 심통을 부리니, 오란은 출산을 한 날도 나와서 일을 한다. 왕룽은 일이 고되어 아들이 태어나도 기쁜 줄 모른다. 왕룽의 모습은 우리 이민 일 세대가 물불 가리지 않고 일하는 현실과 비슷하다. 현재를 즐길 겨를이 없이 생활이 팍팍하기만 하다.
 
 
여성의 능력

 
심지가 굳은 오란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어쩔 줄 몰라하는 왕룽보다 사태를 더 잘 해결한다. 기근이 들자 왕씨네는 남으로 피난을 가려 하지만 노자돈이 없다. 오란은 땅을 헐값으로 사려는 사람을 설득하여 땅 대신 가구를 처분하여 피난 갈 여비를 마련한다. 피난지에서 오란은 아이들에게 동냥질을 가르치고 왕룽은 노동을 한다. 오란은 아들이 돼지고기를 훔쳐오자 화를 내는 왕룽과는 달리 '고기는 고기일 뿐' 이라며 태연하게 가족을 먹인다. 왕룽이 미처 몰랐던 오란의 행동들이 부각되자, 왕룽의 머리 속에서 단지 '여자'(the woman) 였던 아내가 '오란'으로 변한다.
 
근대화가 이루어지는 도시에서 피난민은 부자를 더욱 부자로 만들어주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온 가족이 종일 노동과 동냥을 해도 겨우 끼니만 해결되었다. 귀향하기 위해 어린 딸을 팔아야 하는 고민에 처하자, 세상 돌아가는 기운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오란은 며칠만 기다려 보자고 말한다. 전쟁이 나자 부자들은 집을 버리고 도망을 가고, 노략질이 시작된다. 왕룽은 여기에 합류하여 약간의 은전을 가지고 나오며, 이 돈으로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사를 다시 시작한다. 어느날 왕룽은 오란의 가슴에 숨겨진 한뭉치의 보석을 발견하고 놀란다. 오란은 피난지에서 부잣집에 들어가 벽속에 숨겨진 보석을 노략질했던 것이었다. 오란은 작은 진주 두 개만 달라고 부탁하고, 왕룽은 나머지 보석으로 망한 황부자네 땅을 사들여 대지주가 된다. 황부자네와 연결고리가 되어 남편에게 부의 비젼을 제시했던 오란은 이번에는 훔친 보석을 통하여 그의 비젼을 현실로 옮겨준다.
 
 
삶이 무료하다
 

호수는 잔잔해 보여도 항상 흔들리고 있음을 오란은 아는데 왕룽은 이를 놓친다. 집사를 시켜 일꾼을 부리는 대지주 왕룽의 세계는 평온해 보인다. 그가 정신을 빼앗겼던 생존은 이제 별 것 아니다. 시간이 남고 무료해지자 인간의 본능이 움찔 깨어나니, 모순되게도 고생에 찌든 아내와 그녀의 큰 발이 보기 싫다. 마침내 왕룽은 송편같은 발을 가진 첩을 들여, 비단과 보석과 산해진미에 종까지 들여준다. 물론 왕룽 자신도 사치에 빠진다. 오란의 진주를 빼앗아 첩에게 주기까지 한다.
 
악은 늘 우리 내부에 있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을 때는 사라진다. 악을 따라가는 것은 무료함 (restfulness)에 빠진 인간의 선택이다. 밭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왕룽은 너무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라고, 만약 노부가 병이 나거나, 지붕이라도 무너졌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힘들어 하는 실존이 나를 악으로 부터 붙들어 주고 있는 셈이다. 왕룽에게는 보이는 물질의 세계만 존재하므로 그는 그 방향으로 치닫는다.
 
20 세기 초반 중국은 외세 및 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정치, 사회 시스템이 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전통적 가치관은 그렇게 확확 변하지 않는다. 왕룽과 시골 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에는 전혀 관심도 없다. 오천 년이 넘게 내려온 사회적 가치에 여자들은 순응할 수밖에 없다. 오란이 딸을 낳았을 때 왕룽은 부정 탔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전족을 시켜서 자유를 박탈해 키우거나, 종으로 팔아 살림에 보태기도 한다. 거의 천 년 동안 내려온 전족 제도는 발을 반으로 접어 못 자라게 하니 그 고통이 극심하다고 한다. 부축을 받으며 다니므로 정숙함의 상징이 되었다. 일을 척척 해냈던 큰 발을 힐책하는 남편 앞에서 오란은 기가 죽는다. 오란이 전족을 했다면 소처럼 일하며 살림을 일굴 수 있었을까? 이를 잘 아는 왕룽은 양심에 찔리지만, 오란이 한마디 항변도 하지 않음에 그녀를 더욱 무시하고 심술궂게 대한다. 오란은 이 세상 어떤 일에도 끄덕하지 않지만, 유독 남편은 무서워한다. 항변은 커녕 오란은 막내딸의 발을 감아주면서 '이래야 남편에게 귀염을 받아'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오란은 끝까지 첩을 한번도 보지 않으며 자존심을 지킨다.
 
남자들은 종종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여자를 더욱 억누르는 경향이 있다. 오란처럼 참다가는 속병을 얻어 일찍 죽을 수도 있다. 재산을 가진 홀아비가 처녀장가를 가는 후처 스토리는 거듭 되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변하고, <대지> 전반에 흐르고 있는 가부장적 사고도 현대에서는 도전을 받고 있음도 사실이다.
 
겪고 나서야

 
오란은 지주 댁 안방마님이 된 후에도 여전히 부엌일을 하며 외모도 전혀 꾸미지 않는다. 신혼 초에 왕룽은 오란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지만, 그것도 없어진지 오래이다. 오란의 내적 세계는 막혀있고, 감정의 교류가 없는 부부 관계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오란은 왜 큰 돌에 눌려있 듯 그렇게 살았을까? 시대적으로 여자의 감성 표현은 허용 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오란은 종으로 학대를 받고 살았다. 시대 탓에 자신의 내재된 가능성을 전혀 모르고 오란은 이것이 전부인 줄 알고 살다 간다. 그렇지만 그녀의 내면은 세상사를 다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종에서 벗어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아들 셋을 낳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정의 내린다. 한편 왕룽은 오란의 임종의 시간을 지키면서 처음으로 죄책감을 가지지만, 그녀에 대한 애정이 우러나지 않음을 괴로워한다. 왕룽은 오란을 묻고 오면서 진주를 빼앗아 첩에게 준 것을 진정으로 후회한다.
 
 
 
 
세 아들도 결코 왕룽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계약서도 못 읽는 자신이 창피하여 큰아들은 대학까지 보내  '부잣집 도령'으로 키운다. 큰아들은 사치스런 생활을 하며 유식한 언변으로 변명을 하니 왕룽은 당할 재간이 없다. 둘째는 상인을 만들고자 일찍 곡물상에 가서 일을 배우게 한다. 그의 모든 가치 기준은 돈이며 형이 낭비한 돈을 유산 상속 시에 청구하려고 기록해둔다. 한편 셋째는 농부로 키우려 하지만 그는 땅에 묶여 가난을 면치 못하는 소작농들의 실태에 더 민감하다. 중국에서 공산주의 이념이 시작되는 시점으로서 셋째는 ‘땅은 자유로와야 한다’고 말하지만, 왕룽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마음에 둔 여종을 아버지가 첩으로 들이자, 셋째는 집을 나가 혁명의 일선으로 뛰어든다. 황부자네 아들들이 땅을 떠났기에 망했음을 목격한 왕룽은 자식 중 하나라도 농군을 만들고자 했지만, 그 어느 자식도 왕룽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
 
왕룽네 식구는 이제 대궐같은 황부자네 집에서 살지만 더 행복하지는 않다. 두 며느리는 서로 반복하고, 손자들도 편을 갈라 싸우고, 아들들도 노여움으로 가득 차서 집 안에 평화는 없다. 왕룽 외에는 백치 큰딸을 누구도 돌보지 않는다. 왕룽은 인생에서 원하는 것을 성취했지만, 동시에 망한 황부자의 노년과 자신이 닮아있음을 깨닫는다. 노년에 첩을 얻고, 아들들은 농사를 떠나 돈과 명예에 사로 잡히고, 가족들은 서로 질시를 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들도 삶의 질곡을 겪은 후에 왕룽처럼 깨달아 가리라.
 
땅으로
 
 
그 옛날 땅에 젖을 뚝뚝 흘리던 오란은 죽어서 대지와 한 몸이 되어 인내스럽게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긴긴 <대지>이야기를 세상에 하고 땅으로 귀향 하려는 그를 오란은  위로한다. 임종 무렵에 찾아온 아들들이 땅을 팔아 나누자는 의논을 하는 것을 듣자, 왕룽은 소리친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돌아가며, 땅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에게도 뺏기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하지만 왕룽과 다른 세대를 살아가는 아들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 그건 살아있는 자의 몫이므로 왕룽은 이제  삶에서 초연해져야 할 것이다.
 
<대지>는 매 순간 절절히 애를 태우며 사는 인간의 삶을 긍정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실수를 통해 시련과 깨달음을 받은 후에, 인간의 영혼의 세계는 자라므로 그 어떤 누구의 삶도 다 가치가 있다. 왕룽은 땅을 오로지 삶의 근원이라 보고 집착하면서 한 평생을 사는데, 죽을 무렵에 이르러 땅은 죽음까지도 포용함을 깨닫는다.
 
땅은 삶을 시작하고 죽음으로 끝을 맺고, 거기에서 또 삶이 시작된다. 실제로 태고적부터 땅으로 돌아가 묻힌 수 없는 생명체에 의해 오늘날 우리의 생명이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삶과 죽음은 선한 대지 안에서 결국 같이 돌고 있는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