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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호랑이, 얀마텔의 <라이프 오브 파이>를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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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2,388회 작성일 14-03-2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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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속에 내재하는 신과의 조우

만약 누군가가 인간 관계 때문에 고민을 한다면, 혹은 사는 게 별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면, 나는 얀 마텔이 쓴 소설< Life of PI 파이의 삶>을 읽어보라고 하고 싶다. 우리는 대체로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배려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소설의 주인공 파이는 구명보트에 함께 탄 호랑이에게 일찌감치 잡혀 먹혔을 것 이다. 침몰하는 배에서 부모와 형을 다 잃어버리고 혼자가 된  파이는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보트 안에서 호랑이를 길들여서 슈퍼 알파가 된다. 호랑이 앞에서 절대로 기죽지 않고 당당하며 친절하게 때로는 멸시하고 겁을 주면서 자신이 우월한 위치임을 각인시킨다. 인간관계나 생존경쟁에서도 그저 착하게 물러나 있는다고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합리적 사고를 이용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결해야 한다. 파이가 호랑이에게 쓴  다양한 테크닉을 연구하면 아마 누구라도 인간 관계의 매스터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파이에게는 배 안의 호랑이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성으로 풀 수 없는 표류라는 절대 절명의 상황이  넘실대고 있었다. 구조되기 위해 파이가 보내는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다 실패를 한다. 분노, 절망, 약함으로 마음이 바다에 가라앉지만 파이는 그런 순간에  ‘이건 신의 모자, 이건 신의 고양이’ 라고 소리치면서 다시 노력을 한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므로 내가 아무 것도 않하고 있으면 절망만이 자리를 틀 뿐이다. 이 표류 상황은 파이가 호랑이에게 기울인 이성적 노력으로는 결코 풀 수 없다. 신에게 마음을 열어놓는 것, 가장 비이성적으로 보이는 믿음이 요구된다. 맹수에게 잡혀먹힐 지도 모르는 이 순간에 집중하느라고 표류는 오히려 이차 문제가 된다. 호랑이가 없었더라면 파이는 표류를 절망하여 아마 구조되기 전에 죽었을지도 모른다.

파이는 신의 축복으로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두가지, 즉 현실에 대처하는 냉철한 사고와 신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인생에 들이닥치는 호랑이에 집중하면서 영혼 속에 내재하는 신과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살면, 마치 파이가 멕시코 해안에 도착하듯, 우리도 제대로 항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작가소개

  캐나다인 작가 얀 마텔은 외교관 부모를 따라서 스페인에서 태어났으며, 퀘벡 지방에서 자랐고 동시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성장했다. 작가는 친밀한 모국어 불어 대신에 외국어 영어로 <파이의 삶>를 썼다. 영국작가 제임스 조이스는 작가와 작품은 위계질서를 지켜서 마치 '신이 손톱을 깎으며 인간 세상을 무심히 내려다보듯’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조셉 콘라드 역시 모국어 폴란드를 제쳐두고 영어로 소설을 써서, 영미권에 중요한 작가가 되었다. 작가들은 자신의 창조물인 작품과 너무 사랑에 빠지지 않고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어로 글을 쓰기도 하는 것 같다. <파이의 삶>은  작가의 실제 이야기로 시작되고 녹취록으로 끝이 난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실화인가 하는 의아심이 들게 할 정도로 얀마텔은 이리 저리 주물럭거리면서 소설을 펼쳐나간다. 작가는 이 소설로  문학적 상업적 조명을 받았고,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영어로 쓰여진 소설 중에 하나를 뽑아서 주는 부커상을 받았는데, 부커상을 탄 다른 어느 작품들 보다 훨씬 많이 팔린 책이다. 종교, 동물, 이야기(storytelling)가 얀 마텔의 소설들에는 반복적인 주제로 나온다.

227일간의 태평양 표류

<파이의 삶>의 주인공 인도소년 파이의 본래 이름은 '신도 수영하기에 흡족할 만한’ 최첨단 수영장의 이름을 본따서 피신 몰리터 파텔로  지어졌다. 그런데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그 이름이 문제가 된다. 학교에서 피신(Piscin)을 피싱(Pissing, 오줌싸기)으로 잘못 발음하여, 주인공은 놀림을 받다 못해 '이제부터 내 이름은 파이 파텔’ 이라고 선언한다.

파이는 수영을 잘 하고, 동물원집 아들이므로  동물의 습성에 익숙하고, 어릴 적부터 흰두교, 기독교, 이슬람의 세 신을 다 모신다. 인도의 정치에 불만을 품은 아버지가 몇 마리 동물을 실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가던 중,  태평양에서 배가 침몰한다. 파이가 탄 구명 보트에는 침몰당한 배에서 튀쳐나온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 호랑이가 타고 있었다. 야비한 하이에나는 다리를 다쳐 꼼짝 못하는 겁에 질린 얼룩말을 잡아먹고, 그의 잔인성에 충격을 받은 오랑우탄이 하이에나를 내려치자, 오랑우탄도 잡혀 먹힌다. 배 밑에서 침몰의 충격과 멀미로 움직이지 못 하고 있던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마침내 나와서 하이에나를 잡아먹는다.

먹이사슬이 차례로 진행되는 동안 파이는 호랑이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뗏목을 만들어 구명 보트에 연결하여 리차드 파커의 영역 밖으로 나간다. 파이는 채식주의자이지만, 생존을 위해 온갖 바다 동물을 잔인하게 잡아 먹는다. 배고픈  호랑이에게 잡아먹힐까봐, 파이는 자신은 굶더라도 힘들게 사냥을 하여 리차드 파커에게 먹이와 물을 제공한다.

파이는 표류 중에 아름다운 식인섬을 만나는데 그 섬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열매라고 생각한 잎사귀에서 인간의 이빨이 나오자 파이는 재빨리 그 섬을 떠난다. 식인섬은 재생력이 없는 극한의 비관과 절망의 장소이며 거기서는 파이의 정신이 죽어간다. 섬에 안주할 수도 있었지만,  구조라는 마지막 희망도 죽어갈 것이다. 이성적으로 구조가 불가능해 보이지만, 파이는 망망대해 태평양 한가운데로 다시 떠난다. 바다에 고립되어 있는 자신의 위치를 알려서 계속 구조되려는 노력을 하지만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다 실패한다. 파이는 구조될 희망을 전제로 일기를 쓰는데, 그것조차 펜이 다 해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어진다.

마침내 파이는 멕시코 해안에서 구조되는데, 표류 생활을 같이 한 리차드 파커가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린다. 삶에 있어 형식을 중요시 하는 파이는 호랑이와 마지막 인사를 망쳐서 내내 가슴아파 한다.  구조가 된 파이는 침몰 경위를 조사받으며, 호랑이와 공존한 표류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이 믿지를 않자 동물 대신 인간을 넣어서 두번째 이야기를 꾸며낸다. 구명보트에 탄 프랑스 요리사(하이에나)는 다리를 다친 중국 선원(얼룩말)을 잡아먹고, 파이의 엄마(오랑우탄)가 화가 나서 요리사를 야단치자, 요리사는  엄마를 목졸라 죽인다. 이것을 본 파이(리차드파커)는 참을 수 없어서 요리사를 죽였다고 말한다. 조사관은 사람이 등장하는 두번째 이야기는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는 한편, 파이의 두 이야기가 동물을 사람으로 바꾼 동일한 스토리임을 감지한다. 소설의 서두는 작가의 관점, 파트 1과 파트 2는 파이의 관점으로 성장 과정과 태평양에서 표류하는 긴 이야기, 파트 3은 일본인 조사관의 파이 인터뷰 녹취록으로 전체 소설은 100개의 챕터로 끝난다.

종교의 의미

2001 년에 작가는 <파이 이야기>의 서두에서 '두번째 소설을 실패하고 굶주려 있을 때' 이 소설을 썼다고 했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종류의 굶주림을 경험한다. 당시에 얀 마텔은 작가적 성공에 주려 있었고, 난파선의 파이는 본능적 배고픔과 초월적 존재에 대한 열망으로 몸부림쳤다. 언뜻 보면 무의미해 보이는 인생이지만 초월적 수직적 존재가 있으며 그 존재를 향하여 열어놓고 있는 마음을  종교라고 할 수 이다.  

아직도 종교가 중심에 있는 인도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았는 상상적인 공간이기도 한다. 어른들은 파이에게 절대로 세 신을 동시에 믿을 수 없다고 하자, 파이는 간디아버지가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했고 모든 신들은 사랑을 공통적으로 말하는데 왜 세 신을 믿으면 안되는지 모르겠다고 반박한다. 파이는 종교의 형식이 오히여 신을 쫒아버리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벵갈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자신의 이해 능력을 벗어나는 문제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다. 파이가 음식과 물을 줄 것을 철썩같이 믿으면서  ‘깡마른 별난 호랑이’의 말을 듣는다. 유조선이 구명보트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에도 호랑이는 주인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지만 곧바로 다시 낮잠으로 빠져든다. 파이가 자신을 보호할 것 이라는 절대적 신뢰 속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태평하게 잘 지낸다.  그런 리차드 파커를 보고 파이는 자신이 죽더라도 호랑이는 육지에  데려다 줄 것을 약속한다.
우리의 신에 대한 태도도 이래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므로 잘 알 수도 없고 느끼기도 힘들지만. 파이의 호랑이처럼  부족한 가운데서도 먹고, 흔들리는 보우트 지만 최고의 쉼터로 여기며 미소지을 수 없을까? 그래야 절망이 자리를 잡지 않을 것 이다. 인간 안에 있는 영적인 힘은 마치 우물이 지하수에 닿듯이 세상의 영혼과 닿아있는데 지나치게  이성적이면 연결고리를 끊는 것과 같아서 내 삶이 버석 마르게 된다.

무질서에 질서 부여하기

작가의 역활은 글을 통해 마음에 묻어둔 인간의 이야기를 들추어 풀어주면서 꼬인 삶을 정리해준다고 할 수 있다. 파이는 우연히 수영장 이름을 딴 것 처럼 보이며, 우연히 동물원 집 아들로 자라고, 우연히 세 종교를 다 믿는 것 같지만, 그의 배경은 표류에 살아남기 위한  절대적 요소가 된다.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던져진 돌에 맞은 듯, 아무런 이유 없이 제멋대로 인 것 같지만, 사실은 기승전결로 발전이 될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이야기에 질서와 의미를 추가한다면 시가 되고, 수필이 되고, 드라마가 될 수 있다.
인생의 겸허한 진실은 우리 모두의 삶에 들어있기 마련이다. 마치 숫자 파이가 무질서하게 가는 것 같아도 원주 안에 있는 것과 같고, 소년 파이가  무질서하게 표류한 것 같지만 지구 한 바퀴를 원으로 빙 돌지 않았는가?  결국 파이의 고통도 거대한 원주라는 질서  안에 들어 있었다.

예리한 이성으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또한 파이의 삶은 우리 모두의 삶이기도 하다. 생존에서 살아 남으려면 이성이 최고의 수단임을 알려준다. 세상을 사는 방법론적인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라면, 파이가 호랑이를 길들인 방식을 연구하면 될 것이다. 먹이를 주고 보살피는 동시에 자신이 항상 우월한 위치임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각인 시킨다. 호랑이의 배설물을 치워주지만 동시에 가지고 놀면서 그에게 수치심을 준다. 공격적으로 눈을 보고, 위협적으로 호루라기를 불면서 동물을 힘들게 한 후에 쉬게 한다. 밀림이라면 모를까 바다 한 가운데서 다른 방도가 없는 리차드 파커는 자신에게 먹이를 주며 보살피는 동시에 은근히 겁을 주는 파이에게 글복한다.
아무리 극한상황이라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는데 눈 앞의 호랑이가 없었더라면 파이는 표류 상황에 대한 무기력과 절망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생존은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부터 시작된다. 호랑이는 표류를 견디게 한 힘을 제공한 셈이다.  
 
인간과 동물의 알레고리

또한 이 소설은 동물을 통해 인간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인간은 생존을 위협 받으면  동물과 비슷해진다. 바다 동물을 살해하고, 인육을 먹은 파이의 동물적 본능이 호랑이로 표현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파이와 호랑이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파이는 실제로 일어난 참혹한 트라우마를 덮기 위해 이솝 우화처럼 동물적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동물과 절대로 존립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를 받고 자란 파이지만 아버지의 로고스를 거슬리면서 호랑이와의 존립은 물론 훈련까지 시켜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선다. 파이는 주어진 이름 피신 몰리터가 싫어서 새 이름 파이를 스스로 가진다.

동시에 사제와 부모의 말을 거슬리고 세 종교를 믿는데, 이 종교들은 파이의 표류 동안 구조선 역할을 한다. 이 소설은 한 소년이 전통과 교육이라는 수영장 사각틀에서 벗어나, 무한대 원으로 향하면서 정체성을 새로 만들어가는 홀로서기 과정에 고통을 겪으며 성숙하는 성장소설 (Bildungsroman) 이기도 하다.

결론 나의 파이 이야기를 향하여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일본 조사관은 호랑이와 함께 한 표류 생활이 말이 안되니 사실만 이야기 하라고  다그친다. 그러자 파이는 몇 백년 된 나무가 그렇게  작은 것(분재)을 내 눈으로 본 적이 없으므로 믿을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 화법으로 공격한다. 결국 조사관은 인간과 동물이 이토록 오랫동안 같이 표류한 예는 없었다고 보고서를 쓴다.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는 저널리즘에서 파이의 호랑이를 인정한 셈이다. 사실 파이 이야기는 어느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파이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세상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과 언론 보도들이 이치에 맞는 사실로 들리지만, 그것을 들리는 대로 다 믿으면 안 된다. 작가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글을 써도 창조의 과정이 들어가므로 걸러지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파이가 보내는 모든 구조 노력이 실패했듯이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은 그리 견고하지 못 하다.

작가는 서두에 어른이 된 파이가 토론토에서 잘 살고 있다는 결말을 미리 알려주고 궁금해하지 말라고 한다. 어차피 그것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매 순간 다가오는 현실 속의 호랑이는 나를 원의 중심에 묵직하게 묶어두는 구심점이며  나를 살게 하는 힘이다. 영혼 반지름을 만들어 원에 걸쳐 둘 수만 있다면, 나도 삶의 어느 한 시점에 나만의 파이 이야기를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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