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죽으라 - C J 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를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 김미연 북리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미연 북리뷰


 

죽기 전에 죽으라 - C J 루이스의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를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페이지 정보

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2,307회 작성일 14-06-03 22:14

본문

신에 대한 그리움
 
인간은 태고적부터 신에 대한 그리움을 가져왔다. 그 누적된 기억은 무의식을 통해 전달되어 내려와서, 우리의 영혼 속에는 신과 통하는 연결고리가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이기적인 생각을 떨치고 선한 생각이 날개를 펼쳐 올라갈 때 자유로움을 느낀다. 이 자유로움은 아마도 아름다움의 근원인 신에게로 부터 오는 것이리라. C J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의 소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Until We Have Faces >는 인간과 신의 사랑 이야기인 푸쉬케와 큐피드의 그리스 신화를 재구성한 것 이다. 이 소설에는 여러가지 형의 신앙인이 등장한다. 주인공 오루알 여왕은 신에 대한 의심과 고뇌로 얼룩진 생을 살면서 종국에는 신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복동생 푸쉬케는 어딘가 있을 세상의 근원을 그리워하였기에 신이 내민 손을 쉽게 잡을 수가 있었다. 오루알의 충성스런 신하 바르디아는 신과 인간의 자리를 철저히 구별하고 신과 연관되기를 두려워하며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다간다. 한편 공주들의 가정교사인 여우 선생은 세상을 자연적 이치와 이성으로만 설명한다.
 
도대체 이 차이는 무엇일까? 신은 사람을 골라가며 모습을 드러내는가? 여러분이 만약 글을 써 본 적이 있다면 기억하고 있지 않던 생각들이 불쑥 튀어나와 진실로 이끌어 주는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오루알의 경우가 그랬다. 오루알은 신의 신부가 된 푸쉬케를 자신이 망쳤다는 왜곡된 신화가 떠도는 것을 바로잡기 위해 신에게 고소장을 쓴다. 동생 푸쉬케를 얼마나 사랑했나를 쓰는 과정에서 실제로는 그녀를 질투했음을 깨닫는다. 이처럼 자신의 참 얼굴을 가린 채 평생토록 헛소리를 늘어 놓는 오루알에게 신이 무어라 답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얼굴을 가린 수건을 벗고서야 오루알은 비로소 신을 만난다.

신에게 동생을 빼앗기고  

아주 옛날 그리스 신화가 형성되고 있을 무렵, 그리스 남쪽의 작은 왕국 글롬에 포악한 왕이 살고 있었다. 왕비는 두 딸 오루알과 래디발을 낳고 죽었고, 새 왕비가 들어와 푸쉬케를 낳다가 또 죽는다.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푸쉬케는 인간의 눈에도 그 상서로움이 보여서 일찍부터 사람들의 숭앙을 받는다. 하지만 장녀 오루알은 추녀라서 아버지 왕의 구박을 받는다. 그리스에서 잡혀와 노예가 된 박학다식한 여우 선생이 공주들의 가정교사로 들어온다. 오루알은 경박한 래디발은 본체 만체 하지만 푸쉬케를 끔찍하게 돌본다.
 
사람들이 푸쉬케를 숭배하자 이로 인해 왕국을 지배하는 웅깃여신의 노함을 사서 나라는 온갖 재앙에 시달린다. 시민들은 푸쉬케를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한다. 오루알은 막내딸을 기꺼이 바치는 왕에게 푸쉬케를 살려 달라고 울부짖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푸쉬케는 소문처럼 야수에게 먹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고 신의 신부가 되어 행복하게 살지도 모른다며 오히려 언니를 위로한다. 오루알은 자신이 가르쳐 주지도 않은 신의 세계가 동생의 마음 속에 있음을 알고 의아해한다. 오루알은 충직한 군인 바르디아를 데리고 동생의 시신이라도 수습하려고 푸쉬케가 끌려간 험한 산으로 간다.
 
마침내 오루알은 푸쉬케를 만나는데 남편인 신과 함께 궁전에서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생을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루알의 눈에는 신의 궁전이 보이지 않는다. 오루알은 “실제로 신은 없는데 너는 속고있다” 라고 하면서 밤에 불을 밝혀 신의 얼굴을 보라고 동생에게 강요한다. 푸쉬케는 신의 행동에는 선한 근거가 있으니 인간인 우리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데 언니는 왜 일부러 어두운 생각으로 자신의 영혼을 어둡게 하느냐고 묻는다. 신을 통해 인간을 더욱 사랑하게 된 푸쉬케는 신이 궁극적으로 이해할 것이라 믿고, 시키는 대로 안하면 자살하겠다는 언니의 말을 따라 불을 켜고 신의 얼굴을 본다. 신의 노여움을 받은 푸쉬케는 울면서 유배를 떠나고 오루알은 자신이 동생을 불행에 빠뜨린 것을 알게 된다. 그녀는 잠시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숨기고 글롬으로 돌아온다.
 
참 사랑이란?
 
여왕이 된 오루알의 귀에는 푸쉬케의 울음 소리가 내내 들린다. 잠시 찔끔했던 양심을 깊숙히 묻어버린 오루알은  추한 얼굴 역시 베일로 가리고 살아간다. 추녀라는 열등감이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오루알은 마음이 황폐하기 그지없어 다른 사람의 사랑을 열심히 추구한다. 하지만 오직 남에게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은 자생력이 없으니  금방 시들고 오루알은 곧바로 다시 피폐해진다. 여왕은 자신에게 무술을 가르쳐 준 바르디아와 나라를 다스리며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나라 일을 한다는 핑계로 그를 아내 안싯 곁에 못 가게 붙잡아 둔다. 과도한 업무로 인해 병이 난 바르디아가 죽은 후에 안싯은 여왕에게 “당신에게 속을 다 파먹히고 빈 껍질만 남은 남편이 밤늦게 집에 돌아오곤 했지만 나는 남편이 뜻을 펼치며 살게 하고 싶었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안싯의 사랑은 오루알의 사랑과 대조가 된다. 오루알의 사랑은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들어 통제와 조절을 하며, 그의 행복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푸쉬케를 곁에 두고자 그녀로 하여금 신을 배신하게 했고, 바르디아의 사랑을 탐한 나머지 충직한 신하로 하여금 아내와 여왕 사이에서 고단한 삶을 살게 했다. 또한 지극 정성으로 자신을 보필해 온 여우 선생이 그리워하던 고향 그리스로 돌아가려고 하자 오루알은 그를 노예에서 해방시킨 것을 후회한다.
 
안싯은 “남편을 내 것으로 만들어 옆에 붙잡아 두었으면 과연 그가 행복했을까? 인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야 행복하다” 고 말한다. 우리는 어느 날 문득 “나는 무엇인가? 내가 뭘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의 만만치 않은 인생에 의무와 역할을 하느라고 자신을 잊고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리 늦지는 않았다.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것, 아주 조그만 것이라도 자신을 위해 하다 보면 고요한 마음 속에 생동감 있는 행복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각자의 신을 향하여
 
이 소설에는 네가지 형의 신앙인이 등장한다. 오루알은 푸쉬케가 사는 신의 궁전을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았다. 하지만 확실한 표징을 보여주지 않는 신을 순간의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어둠 속에서 슬쩍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에게 불평을 깨알같이 적으며 산 오루알의 인생은 적잖이 힘들었다. 한편 신 앞에서 불완전함이 부끄러운 푸쉬케는 신이 주는 불행이 진짜로는 불행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여기며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 난관이 술술 풀려 나간다. 또한 신을 크게 원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으면서 절대적으로 믿는 바르디아 같은 사람도 있다. 그에게 신은 인간이 결코 넘나들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이다. 신의 지시를 따르며 분수에 맞게 행동하면 신이 자신의 삶에 개입하지 않을 것 이라 굳게 믿는다. 아내에게 정직하게 여왕에게 층실하게 살다 간 바르디아의 일생은 겉으로는 꼬이지 않은 것 같지만 결국은 인간에게 휘말려 일찍 죽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신을 저 높은 곳에 모셔 놓고 결코 다가간 적이 없는 바르디아가 과연 신을 만났을까? 의심하다 못해 신을 고소까지 한 오루알과 비교하면 누가 더 솔찍하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시는가? 한편 여우선생은 신이 없다고 오루알에게 가르친 것을 마지막에 후회하며 이 세상은 너무나 오묘하다고 말한다. 신의 불공평을 불평하는 오루알에게 그는 “신이 공평하다면 우리 모두는 다 큰일 났다. 그 엄정한 심판을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라고 말한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느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하시는가? 혹은 자신 안에 네가지 모습이 다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글을 쓰며 자신을 비추고
 
말년에 오루알은 우연히 어떤 신전에 들어가 이제 막 여신이 된 푸쉬케의 신상을 발견한다. 신전지기는 언니의 질투로 신을 시험하다 추방을 당해 세상을 떠돌던 공주가 비로소 용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루알은 자신이 푸쉬케를 질투했다는 말에 분개하면서 왜곡된 진실을 바로 잡고자 신에게 고소장을 쓰기로 한다.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던 사실을 적나라하게 써서 헛소문을 바로 잡고자 글을 쓰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한번도 생각지도, 가슴 속에 담아 두지도 않았던 과거의 일들이 문득 떠오르면서 오루알은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다. 글쓰기는 마음에 씌운 베일을 끌어내려 자신을 보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 인간의 영혼 속에는 신과 통하는 영역이 있어 마음을 다해 무엇을 쓰려고 하면 분노가 제 풀에 가라앉고 그 자리에 숨겨둔 진실이 나온다. 글쓰기를 통해 오루알은 신이 집도하는 수술을 받는다.
 
오루알은 고소장에 다음과 같이 쓴다. “푸쉬케 대신 나를 선택하여 사랑해주고 궁전에 살게 해 주었더라면 내가 그애를 당신에게 이끌었을 것이다. 내가 키우고 모든 생각을 심어준 아이가 건방지게도 신을 본다고 하니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푸쉬케가 아름다운 신에게 마음을 빼앗겨 나를 떠나서 괴로웠다.” 또한 오루알은 고소장을 쓰면서 자신이 얼굴 없는 바위 덩어리 웅깃을 닮았다고 느낀다. 웅깃이 동물과 인간의 생명을 제물로서 삼키듯이, 자신 역시 푸쉬케, 바르디아, 여우선생의 생명을 삼키면서 살았음을 깨닫는다. 오루알의 사랑은 9할이 미움으로 바뀌어도 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당신 것입니다
 
이 소설을 쓴 영국 소설가 C J 루이스는 성공회 가톨릭 신자이며 옥스퍼드대학에서 중세문학을 전공하고 신화에 심취한다. 많은 지성인들이 일차 대전을 겪으면서 무신론자로 전향하는 분위기에서 루이스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한 동안 종교에서 등을 돌리지만 다시 가톨릭에 귀의하여 교파를 초월한 다수의 종교 소설을 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오루알도 어떻게 보면 작가와 같은 길을 간 사람이다. 동생을 데려간 대답없고 애매한 신에게 화가 난 오루알과 어머니의 죽음을 격은 15세의 루이스 역시 한동안 신을 걷어차고 도주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루이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죽음을 앞둔 미국 시인 조이 데이빗먼 (Joy Davidman)와 결혼하여 4 년간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1956년에 이 소설을 쓴다.
 
<우리가 얼굴을 찾을 때까지> 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종교성에 비추어 궁극적으로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대상은 신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애가 강하여 세상의 기준으로 조명하여 자신이 선하고 옳다고 판단해 버린다. 행여 자신의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오루알처럼 바로 외면해 버린다. 오루알은 지혜와 용기를 갖춘 여왕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신에게 비추어 드러난 얼굴은 전혀 생각지 않았던 생소한 모습이었다.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본 오루알이 절망하여 죽으려고 하는데, “그러지 말라. 너는 죽기 전에 죽으라” 라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인간 영혼의 한 귀퉁이에는 신을 향하는 절대적 사랑이 있어 신의 목소리를 듣을 수 있다. 이제 오루알은 죽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빌어야 한다.
 
우리는 짧은 생을 사는 동안 부지런히 자신의 얼굴을 찾아서 신의 도움으로 영혼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한다. 신을 알지 못하면 결코 자신을 알 수 없다. 오루알을 비난할 것도 없다. 우리 대부분도 신에게 불만을 품으며 때론 의심하고 대들고 하지 않는가? 미완성인 우리는 그런 업치락 뒤치락이라도 벌여야지 비로소 신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오루알은 죽기 전에 푸쉬케에게 말한다. “나는 욕심 덩어리였고 한번도 당신을 잘 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시는 당신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며, 보잘 것 없는 나는 이제 당신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