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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연 북리뷰


 

폭력성은 인간의 숙명인가 ,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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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171회 작성일 21-05-26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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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이 쓴 소설 <채식주의자> 2016년에 맨부커상을 받았다.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에 버금가는 문학계의 최고상을 탄 것이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그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는 뜻 밖이었다. '좀 이상해, 기분 나쁜 이야기야, 안 읽는 게 나아.' 왜 사람들이 이 소설을 불편해하는 것일까? 구태여 들추고 싶지 않은 이런 이야기를 풀어낸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가부장제의 폭력성


 
영혜와 인혜는 자매이며, 밑으로 남동생이 있다. 아버지는 베트콩을 때려잡았음을 자랑으로 여기는 시대착오적 영웅의식으로 꽉찬 월남 참전용사다. 맏딸 인혜는 지친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의 술국을 끓이므로 아버지가 어쩌지 못한다. 하지만 둘째 영혜는 술 취한 아버지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자주 매를 맞았다. 남동생도 매를 맞았지만, 그는 대신에 동네 아이들을 때리고 다녔다. 표현이 없는 어린 영혜는 해 질 무렵이면 대문 밖에 서 있곤 했다.


 
둘은 자라서 시집을 갔다. 돌봄에 익숙한 인혜는 지쳐 보이는 한 남자를 만나서 연민을 느끼고 결혼을 했다. 인혜는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며 집안의 경제를 책임진다. 남편은 자본주의의 현실을 부각하는 비디오작가로 생계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작품을 한다고 며칠씩 집에 안 들어와도 인혜는 속으로 삭힌다. 예술가 남편이 존경스럽지만, 남편의 작품이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서민의 비참함을 담은 그의 작품 한구석에는 항상 새가 날고 있다. '저기 새는 왜 있어?' 물어봐도 남편은 별 대답이 없다.


 
식구들의 무관심 속에서 자란 영혜는 5년 전에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그는 작은 회사의 적은 봉급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존재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 여자가 편했다. 매일 12시가 넘어서 귀가하고 주말에는 TV 앞에서 뒹군다. 영혜는 한마디 불평이 없다. 그녀는 집안일하고 아르바이트하고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건넛방에 있다가 시간이 되면 나와서 잠자코 밥을 한다. 밥이 조금만 늦어도 남편은 소리친다. 이렇게 남편이 고함을 지르면 영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군림하는 남편과 복종하는 아내의 일방적 관계다.


 
어느 날, 영혜는 자신이 피가 묻은 생고기를 먹으며 피투성이가 되는 섬뜩한 꿈을 꾼다. 그런데 꿈을 꾸기 바로 전날, 남편은 다시금 영혜를 닦달했다. 아침밥을 차리던 중 고기를 썰던 칼 조각이 어디론가 튀었고 영혜는 손을 베었다. 밥을 먹던 남편은 칼 조각이 씹히자 죽을 뻔했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그 순간 갑자기 영혜는 멍해지면서, 자신에게서 무엇인가 빠져나감을 느낀다. 왜 이러지? 현실이 둥둥 떠다닌다. 벤 손가락의 피를 빨면서 영혜는 자신이 남편을 죽일 수도 있음에 쾌감을 느낀다. 동시에 어린 시절이 표면으로 떠오른다. 매질하는 아버지를 피해 산으로 도망갔던 일, 주인집 딸 영혜를 물었다고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매달려 죽어가던 개, 그리고 그 바로 죽은 개로 끓인 탕을 한 그릇 다 비운 그녀. 영혜는 자신이 당한 폭력이 싫다 못해 자신이 무심코 행한 폭력조차 너무 싫다.


의식의 경계


 
영혜는 꿈을 꾼 다음 날 냉장고에 있는 고기를 다 버린다. 사실 그녀는 고기를 좋아했고 밥상을 먹음직스럽게 차려내서 남편이 그 점은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꿈을 꾼 후에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된다. 이제껏 먹은 고기의 살과 뼈는 없어졌지만, 그들의 생명이 명치 끝에 들러붙어 그녀를 괴롭힌다. 영혜는 식물이 될 것이라며 남편의 반찬 불평을 무시해 버린다. 계속되는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잠자리도 거부하며, 대꼬챙이처럼 말라간다. 어린 시절에 당했던 물리적 폭력과 남편의 심리적 폭력이 함께 증폭되어 그녀의 방어기제는 작동을 멈춘 것일까. 현실의 끈을 놓고 경계의 저편으로 가 보니, 이제 아버지도, 남편도 무섭지 않다.


 
영혜의 괴상한 행동을 참다못해 남편은 이 사실을 처가에 알린다. 장모의 생일날 식구가 모였다. 장인은 고기 먹기를 거부하는 영혜의 뺨을 때리고 온 가족이 그녀의 팔을 잡은 가운데 탕수육 한점이 그녀의 입에 들이 밀어진다. 완강히 저항하는 영혜는 짐승같은 소리를 내고 마침내 과도를 들어 자신의 팔을 긋는다. 피를 철철 흘리는 영혜를 형부가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소동이 벌어진다. 퇴원 날이 되었다. 남편이 퇴원 수속을 하는 동안 영혜는 몰래 병실을 빠져나간다. 자신은 식물이라며 정원에서 웃통을 벗고 햇볕을 쬐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작은 동백새를 물어뜯어 입술에 온통 피를 묻힌 그녀 주위에 구경꾼이 에워싸고 있었다. 영혜는 정신병동으로 옮겨져서 한동안 치료를 받는다. 그리고 미친 여자와 살 수 없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이혼당한 그녀는 언니 인혜가 마련한 거처로 옮겨간다.


 
이제 결혼 10년 차에 들어가는 인혜부부는 5살 아들을 사이에 둔 서먹한 관계다. 일주일 내내 가게를 나가는 그녀는 날마다 한밤중에 도둑처럼 살그머니 들어오는 남편에게 지쳐간다. 일요일 하루만이라도 아들을 봐달라는 그녀의 부탁을 남편은 무시한다. 아들은 '우리집에 아빠 있어?'라고 묻는다. 잘 웃지 않는 엄마를 웃기려고 온갖 짓을 다 하는 아들이 가여워서 인혜는 눈물이 난다. 생각해보면 한 번도 생이 즐겁지 않았다. 살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견디고 있을 뿐이다.


 
중년으로 접어든 인혜의 남편은 모든 것에 시들해진다. 머리는 빠지고 배도 나왔다. 자신의 몸도 싫고, 색 바랜 것 같은 자신의 작품도 혐오스럽다. 열정과 색채가 살아있는 새로운 것을 찾고 싶다. 그러던 중 처제가 병원에서 나와 자취를 시작할 무렵, 아내가 처제의 엉덩이에 아직도 푸른 몽고반점이 있다는 말을 한다. 그 순간 그는 영감이 섬광처럼 떠오른다. 식물이 되려는 처제의 몸에 남아있는 몽고반점. 원시의 순수를 간직한 몸, 그 몸에 꽃과 잎을 그려 넣어 남녀의 원초적인 본능을 카메라에 담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예술이 아니라 포르노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다.


야만성과 반이성


 
형부는 처제의 자취방을 찾아간다. 몸에 식물을 그려줄 테니 작품의 모델이 되달라는 형부의 부탁에 영혜는 순순히 응한다. 그는 자신의 나신에도 꽃을 그리고 둘이 결합하는 장면을 촬영한다. 그날 마침 인혜는 나물 몇 가지를 만들어 동생의 자취방을 찾아온다. 그런데 동생이 어떤 남자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알록달록한 것이 너무 해괴했다. 바닥에 뒹구는 낯익은 남편의 캠코더가 눈에 들어왔고, 인혜는 필름을 돌려서 내용물을 다 본다. 충격에 쌓인 그녀는 동생이 다시 발광했으며 남편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인혜는 황급히 정신병원 구급대를 부르고, 두 사람은 병원으로 끌려간다.


 
인혜의 남편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며 엄청난 스캔들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풀려나서 종적을 감춘다. 얼마 후 아들이 보고 싶다며 울먹이며 전화를 했지만 인혜는 전화를 끊어 버린다. 친정 부모는 짐승만도 못한 사위, 사위를 연상시키는 큰딸, 정신병자 둘째 딸과 다 연락을 끊는다. 이제 영혜를 돌볼 사람은 인혜뿐이다. 인혜는 음식을 준비해서 자주 병원에 가지만, 동생은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영혜는 병원에서 주는 음식을 완강히 거부하며 이제는 튜브 음식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너무 말라서 작은 여자애처럼 보인다.


 
얼마 전, 아마도 남편이 영혜를 촬영할 즈음인가. 인혜는 가게와 남 같은 남편과 병치레 잦은 아들과 성치 못한 동생 사이에서 너무 힘들어 그런지 몸에 이상이 생겼다. 병원에 가서 시술을 받고 몸은 나았지만,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인혜는 새벽에 아들의 장난감 끈을 가지고 뒷산에 올라갔다. 동생이 그리도 되고 싶다는 나무들을 보며, 인혜가 오히려 느낀 것은 살아있는 짐승처럼 완강한 그들의 생명력이었다. 나무들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줄 것 같지 않았다. 산을 내려온 그녀는 자고 있는 아들을 껴안으며 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한 것을 후회했다. 인혜는 자신의 가정을 무너뜨린 동생을 원망도 하지만, 죽어가는 동생을 바라보며, 그녀를 정신 병원에 가둔 것은 자신이 아닐까 자책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이성의 회복


 
이 소설에서 영혜는 가부장제에 희생된 하위주체(subaltain)로 그려진다. 어쩌면 가정은 안전한 곳이 아니라, 폭력이 가장 합법적으로 행해지는 곳일지도 모른다. 또한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소통이 절단되어 너무 외롭다. 억압을 늘 받아서 자신이 억압받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영혜. 하지만 어느 순간 심리적 방아쇠가 당겨지자, 가족 관계, 예의 범절, 사회적 규범을 다 무시한다. 목소리가 없었던 그녀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향해 가면서 비로소 정체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영혜가 끝까지 피해자라고만 할 수도 없다. 새를 물어 죽이는 그녀의 행동은 인간에게 내재한 폭력적 본능의 자동반사적 표출이다. 태곳적 인간은 상대가 적인지 친구인지 식별하는 동안에 죽임을 당하므로 일단 먼저 죽여야 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본능이 먼저였고, 생각은 나중이었다. 영혜는 폭력이 싫어서 자살한다지만, 자살도 폭력의 한 형태다. 이렇게 인간은 태생적으로 모순적 존재다.


 
폭력에 저항하는 영혜와 원초적 본능을 추구하던 형부는 한 순간에 친족 관계를 파괴했다. 이렇게 제도를 해체하고 나면 그 끝은 어디인가. 원시의 동굴 시절이 순수하기만 했을까. 무지와 몽매의 시간을 거쳐 여기까지 내려온 인류의 문명과 문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폭력은 어쩔 수 없었고, 지금도 어쩔 수 없다고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강 작가는 불편한 진실을 들추며,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질문을 소설에서 던진다. 극중 인물 형부의 경우처럼 예술은 이성이 멈춘 곳이 아닌, 이성이 가장 빛을 발해야 할 지점이 아닐까.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거의 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하지만 언니 인혜만은 그러지 못한다. 인혜는 어쩌면 동생이 미치지 않았고, 남편이 그 엄청난 일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자신이 먼저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삶의 과중함이 나를 괴롭혀 못 살 것 같아도 오히려 그 고통으로 인해 우리는 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의 냉정함 속에서 다 잊혀진다.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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