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기억은 왜곡된다 -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 김미연 북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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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연 북리뷰


 

살기 위해 기억은 왜곡된다 -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을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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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157회 작성일 21-05-26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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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속마음을 잘 말하지 않는다. 트라우마나 죄책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건드리면 아픈 기억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우리의 심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의 기억은 변조되고 왜곡되어,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이시구로의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은 인간이 트라우마를 다루는 심리상태를 주제로 한다. 소설의 화자 에츠코는 실제로 일어났던 중요한 이야기는 슬쩍 넘어가고, 남의 이야기, 사소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다. 그래서 그녀의 서술만 100% 따라가다 보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놓치기 쉽다. 그렇다고 화자가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이 그녀를 그렇게 몰고 간다. 그래서 독자는 행간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화자의 내심을 끌어내 가며 읽어야 한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일본 패전 당시 나가사키에 살던 에츠코는 맏딸 게이코를 낳은 후 남편과 이혼한다. 일본에 파견 중이던 영국기자와 재혼하여 7살 게이코를 데리고 영국에 와서 니키를 낳았다. 성년이 된 아이들은 집을 떠났고, 몇 년 전에 남편을 사별했다. 혼자 살던 중 맏딸 게이코가 자취방에서 목매달아 자살하는 일을 겪고, 둘째 딸 니키의 방문을 받아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원폭이 떨어진 나가사키


 1950년대 전후 일본은 혼란스러웠다. 제국주의의 종말을 본 신세대들은 전쟁을 일으킨 기득권을 맹렬히 비판한다. 기성세대는 사회에서 자취를 감추지만, 여전히 일본제국 시절을 그리워한다. 미군정 치하 일본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얽히고, 젊은이들은 새 이념을 빠르게 흡수하여 사회는 변하는 듯했다. 하지만 가부장적 가치관은 그대로였다. 민주주의의 열풍으로 아내가 남편과 다른 정당에 투표하고, 이에 화난 남편이 아내를 골프채로 때리는 일도 벌어진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나가사키는 원폭이 투하된 곳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을 잃었다. 에츠코의 가장 큰 비극은 폭격으로 부모를 잃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부모의 죽음과 자신과 자신의 집안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기에 에츠코에 대한 파악이 쉽지 않다. '한집에서 같이 살며 아버지처럼 여기던 오카타상을 시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이상하다'는 표현에서 그녀가 한 동네 사는 교장 선생님인 오카타상 집을 의탁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은퇴한 오카타상은 옛 일본의 항수에 젖은 제국주의자지만, 에츠코를 아버지처럼 돌봐준다. 에츠코는 말이 없고 자신을 억누르고 억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오카타상만은 예외로 대한다. 그와는 스스럼없이 농담하고, 자신의 의사를 밝히는 것으로 봐서, 부모 슬하에서는 명랑했고 자기 의견이 분명한 성격으로 짐작된다. 

 

 에츠코는 오카타상의 아들 지로의 구애로 결혼하지만, 사실은 전쟁 중에 폭격으로 애인을 잃었다. 화자인 그녀는 이 사실을 암시만 할 뿐 절대 말하지 않는다. 그 시절에 에츠코가 바이올린을 켜고, 죽은 애인이 명문가 출신인 점을 봐서, 그녀 역시 상당한 집안 출신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그런지 오카타상은 에츠코가 다소 처지는 자신의 집안 며느리가 된 것에 고마워한다. 부모와 애인을 전쟁에서 잃었음은 이십 대 초반의 처녀에게는 세상의 끝과도 같다. 그녀도 죽고 싶었을 것이지만,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은 그녀로 하여금 그 일에 대해서 함구하게 만든다.


 또한 에츠코는 이혼의 이유 역시 밝히지 않는다. 대신에 오카타상과 아들 지로가 체스 두는 장면에 빗대어 남편 성격의 단점을 나열한다. 즉흥적이며, 곤란하면 시간만 끌고, 마음이 상하면 풀지 않는 성격이다. 지로와의 결혼 생활에 나타난 작고 사소한 이야기들을 유추해 보면, 아내를 하녀 취급하며 회사 일로 바쁘다는 핑계로 대화가 없는 결혼 생활이었던 것 같다. 시아버지 오카타상과는 즐겁게 대화를 나누지만, 남편과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속으로 억누른다. 가부장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지만, 받아들이고 살기에는 에츠코는 자아가 강한 여성이었다.

 

사치코는 에츠코의 또 다른 자아


 여기서 에츠코의 회상은 현재로 돌아온다. 엄마를 방문 중인 니키는 의붓언니의 죽음에 자신과 엄마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니가 썼던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악몽을 꾸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언니와는 사이가 나빴다. 게이코는 가족과 섞이지 않고, 방문을 닫아걸었고, 어쩌다 나오면 새아버지와 니키에게 싸움을 걸었다. 게이코가 식구들과 절연하고 맨체스터에 나간 후로 얼굴을 본 적도 없다. 몇 년 전 아버지 장례식에 오지도 않은 의붓언니였다. 그녀의 장례식에 니키 역시 오지 않았고, 이번에 집에 온 것은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서다.

 

 에츠코는 니키와 한적하게 시간을 보낸다. 함께 산책하던 중에 그네 타는 소녀를 우연히 보게 되고, 에츠코는 일본에서 잠시 알았던 사치코와 딸 마리코를 떠올린다. 당시 에츠코는 게이코를 임신했고, 여전히 불안했고 불행했다. 동네 여자들과 사귀지 않고 혼자서 지내던 그녀는 어느 날 냄새나는 강가 오두막에 이사 온 사치코 모녀에게 관심이 간다. 사치코는 전쟁 중 남편을 잃고, 시삼촌 집에서 지내다가, 미군과 사귀면서 그 집을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함께 미국에 갈 희망을 거는 미군은 술주정뱅이 바람둥이일 뿐이다. 사치코는 데이트하느라고 딸을 내버려 두고, 에츠코는 그 딸이 마음에 걸려서 자주 돌본다. 그 집에 가는 것을 남편이 싫어해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전쟁 중에 엄마가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는 마리코는 그 후에 종종 그 여자가 자신을 데리러 왔다고 말하곤 했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마리코는 여기저기 옮겨 사느라고 친구도 없고 학교에도 잘 가지 못한다. 엄마의 미군 남자 친구를 돼지같다며 싫어한다. 집에 혼자 있는 마리코는 고양이를 애지중지 기르며 정을 쏟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미국이든 삼촌 댁이든 고양이는 못 데려간다는 이유로 물에 빠뜨려 죽인다. 화가 난 마리코는 집을 뛰쳐나와 어두운 물가를 배회하고, 에츠코는 마리코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마리코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에츠코 손에 들려 있는 운동화 끈을 보고 자신의 목을 해치려는 줄 알고 도망간다. 이런 일련의 회고에서 에츠코는 자신은 모성이 넘치는 정숙한 여자로, 사치코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여자로 묘사하며, 자신과는 차별화를 시킨다.


 하지만 사치코는 에츠코의 내면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자아로 보인다. 딸을 생각하면 시댁에 가서 살아야 하지만, 빈방뿐인 그곳에서 자신은 늙어갈 뿐이라는 사치코의 말을 빌려서, 에츠코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며, 미군과 바에 가는 사치코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또한 나중에 사치코가 영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개화파 지식인의 딸임을 알고 그녀를 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긴다. 에츠코는 마리코가 뛰쳐나가면 즉각 찾으러 가지만, 정작 엄마인 사치코는 태연하다. 딸을 몰아 세우지 않고 혼자서 생각할 시간을 주며, 상황을 잘 해결할 것이라는 딸에 대한 믿음도 있다. 이런 태도를 보면서 에츠코는 자신이 영국에 온 후에 게이코를 얼마나 구속했나를 생각한다. 집을 나가겠다는 그녀를 좀 더 일찍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변명해 주는 딸 니키


 결국 사치코의 미국행은 판타지에 그쳤고, 마리코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본에서 컸을 것이다. 이에 비해 에츠코는 영국행에 성공했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듯 했지만, 자신의 딸 게이코는 자살했다. 에츠코는 딸이 영국에 가면 불행할 것을 이미 알았다고 한 두번 인정한다. 드물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만, 그럴 때 마다 니키가 옆에 있다. 니키는 엄마의 선택이 옳았다고 옹호해준다. 혼혈인 니키는 독립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영역을 고집하며 엄마와도 거리를 둔다. 사회가 여자에게 부과한 가치관의 전형에는 관심이 없다. 대학은 갈 필요가 없고, 런던에서 남자와 동거 중이며, 결혼과 자식에 얽매여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작가 친구가 일본을 떠난 엄마의 용기있는 삶을 시로 쓰겠다고 한다며 에츠코에게 확신을 준다. 엄마는 최선을 다했고, 자신을 위해 살 권리가 있다고 강조한다.

 

 집에서 니키는 아버지가 썼던 전후 일본에 대한 기사를 찾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친딸인 자신의 존재 자체가 게이코에게 위협이었임을 알지 못하는 그녀는 오히려 자기를 괴롭힌 것은 언니라며 자신을 면책시킨다. 하지만 그녀도 죄의식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않다. 언니의 유령이 있는 듯한 집이 편치가 않아 서둘러 런던으로 돌아간다. 아버지는 언니를 거의 무시했으며, 그러면 안 되었다고, 좀 더 살폈어야 했다는 말을 엄마에게 남긴다.

 

  혼자 남은 에츠코는 게이코의 방에 들어가 본다. 이 집이 고향이었고 일본은 잊고 살았다. 하지만 인과의 고리는 다시 그녀에게 되돌아 왔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에츠코는 게이코의 굳게 닫힌 방에 한기를 느끼고 집을 팔 결심을 한다.


삶의 딜레마


 이 소설은 자신의 인생과 딸의 안위가 상반할 경우에 딜레마에 빠진 여자의 이야기이다. 일인칭 화자(I narrative)가 서술하기에 감정의 이입은 쉽지만, 화자의 신뢰성에 문제가 있다. 결국 이야기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며, 제삼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또한 기억은 기억을 하는 상황에 좌우되므로, 게이코의 자살에 직면한 화자의 기억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가 없다. 죄의식에 갈등하는 에츠코가 어떻게 자기 기만과 자기 보호의 언어를 사용하는지 보여준다. 에츠코는 사치코를 통해 자신을 합리화하고, 니키를 통해 자신을 변명한다. 니키의 죄의식 역시 아버지에게 투사되어 비난의 대상은 아버지가 된다.


  과거를 생각할 때 마음 아프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흐릿해진 기억으로 자신을 위로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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