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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가르쳐 드립니다 -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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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173회 작성일 21-05-2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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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1980년대 한국의 대학가를 휩쓸었던 철학 교양서다. 친구들이 이 책을 산다기에 따라서 샀다.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성의 겉멋이 들려있던 시절이라, 책을 그냥 팔에 끼고 다녔다. 남녀 간의 사랑이 다인 줄 알았고, 인연을 만나 결혼하면 그냥 살아지는 줄 알았던, 사랑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이었다.

 

 몇십 년 결혼 생활을 하고 난 지금, 그 책을 다시 읽었다. 그간 맺어온 나의 인간관계를 분석이라도 해 주듯이, 이번에는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되었다. 깊고 넓은 사귐이 없었던 과거의 내가 이 책을 이해 못 했던 것은 당연했다. 남편, 자식, 친척, 친구들과 본격적인 관계가 시작되면서, 나는 미로를 헤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과는 처음부터 뒤틀렸고, 친구들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갈등이 생겼다. 사람들은 결혼은 그냥 체념하며 사는 것이라 했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골라 만나라고, 그래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조언했다.

 

 다른 사람들도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사람들의 관계는 두 자아가 만나므로 충돌하기 마련이며, 사랑도 공부해야 할 과목 같은 것이라고 한다. 사람과의 관계는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 노력이라고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 모두의 화두인 인간관계. 프롬은 집중과 인내와 실천을 거치면 관계와 사랑의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사랑이 습득 가능한 기술인 줄은 미처 몰랐다

 

사회적 심리


 프롬의 <사랑의 기술> 1956년에 발표됐다. 이 책에서 프롬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한다. 유럽의 사상적 계보를 살펴보자.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르네상스는 근대까지 영향을 미친다. 1900년에 프로이트는 그토록 중요했던 이성을 비판함으로써 유럽 사상의 근간을 흔든다. 이제껏 알려진 대로 인간은 이성을 갖춘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숨겨진 감정과 무의식의 지배를 받으며, 성적 욕구가 가득찬 존재라고 역설했다. 예술을 창조하는 행위도 성적 불만족의 다른 표현임을 주장하는 프로이트 이론은 전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

 

 반세기 후 프롬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한다. 프롬은 인간은 무의식, 감정 등의 개인적 심리보다는, 자신이 사는 사회와 문명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회적 심리를 제기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인간은 성숙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본은 인간 위에 올라서서 인간을 상품으로 만들고, 상품화된 인간은 레이블에 따라 평가받는다. 생각과 확신이 없어진 인간은 고립을 피하기 위해 대중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간다. 프롬은 사람들이 선으로 믿는 사회적 가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선악은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시대와 사회의 관점에 따라 변한다. 선악의 유동성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분리의 불안


 사랑은 무엇인가. 왜 인간은 끊임없이 사랑을 원하는가. 외롭고 불안하기 때문인가. 외로움과 불안에 대한 근원적 이유는 무엇인가. 프롬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은 절대적 존재로부터 이탈하여 스스로 에덴을 걸어 나왔다. 에덴을 탈출한 인간은 불안하여 신과의 합일을 다시 꿈꾼다. 원시 종교는 제사를 통하여 신에게 돌아가는 시도를 끊임없이 해왔다. 초기 종교에서 신은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인간적 존재로 부각되다가, 점차로 정의 진리 사랑의 개념으로 변한다. 신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 개념이다.

 

 신에 대한 사랑과 어버이에 대한 사랑은 비슷한 점이 있다. 무력한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에 의지하다가, 힘과 사고의 원리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옮겨간다. 그러다가 성숙해지면 자신이 어버이가 된다. 여신인 어머니에 대한 무력한 애착에서 남신인 아버지에 대한 순종적 애착을 거쳐, 정의와 사랑의 원리를 자신 속에 흡수하여, 어버이가 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른다.

 

 인간은 짐승과는 달리 이성을 사용하여 자연에서 스스로를 분리시켰다. 태어날 때도 어머니와 한 몸에서 분리를 경험한다. 심리적 생물적 분리를 거쳐 세상에 나온 인간은 불안하기 그지없다. 이 분리의 불안감을 극복하고자 인간은 많은 것을 시도한다. 외부와의 연결을 위해 꽃을 기르고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창조행위를 한다. 요즘 유행하는 SNS 현상도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다. 자신을 밝히기는 싫지만 또한 혼자이기도 싫다. 얼굴 없는 다수라도 연결되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분리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타인과 융합하는 사랑 뿐이다.

 

사랑은 생명력


 사랑은 무엇인가. 두 존재의 내적 자아(inner self)가 결합하는 것이다. 두 존재가 그대로 있으면서 하나가 된다. 흔히들, 사랑을 받고 사랑에 빠지면 행복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랑을 받고 사랑에 빠짐은 다른 존재의 행동에 대한 나의 순응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자아가 결여된 일차적 반응이므로, 상대가 변하면 사랑도 없어진다. 사랑은 나의 생명성을 주는 나의 행위(action). 얼핏 들으면 나를 소비하는 것 같지만, 생명성은 외부를 향해 나가야만 살아남는다. 태아는 자궁에서 나와야 생존하고, 어머니 품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야만, 성숙해진다. 우리도 그렇다. 자신 속에 있는 기쁨, 관심, 지식, 이해, 유머, 슬픔 등을 외부와 나누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나의 생명성을 주면, 나는 오히려 팽창되어 풍요롭다.

 

 우리는 혼자 있으면 자신을 모른다. 너를 만나야 나의 모습을 알게 된다. 인간의 비밀을 아는 것은 지식과 사고가 아니라, 사랑으로 상대에게 스며들 때이다. 나의 생명성을 침투되면, 너는 반응을 보인다. 받은 자의 생명성이 꿈틀하며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되돌려 주지 않고는 못 배긴다. 사랑은 받는 자를 주는 자로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모순이고 역설이다.

 

자아 찾기


 사랑은 생명성인 자아를 먹고 산다. 이 중요한 자아(I ness)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라.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행복한지 불행한지, 명상을 하면서 집중해 보라. 몰입하면 자아가 깨어나고 그 시간을 넘치게 산 자아는 생기가 넘친다. 하지만 건성으로 무엇을 하거나, 빈 만남을 하고 오면 우리는 피곤하고 공허하다. 사람에게 휘말리는 번잡한 생활을 피하고, 사치 낭비 과욕도 삼가라고 프롬은 조언한다. 생활에 적당한 규율(discipline)이 있으면 좋다. 자아가 활동하지 않는 사람은 잘못된 사랑을 하기 쉽다.

 

자기애와 이기심


 자신의 자아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자신만 쳐다보니 나르시즘에 빠져 자신에게 취한다. 자신의 내면만이 존재하는 전 세계이며,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으니, 외부와 소통이 힘들다. 우리는 누구나 나르시즘적 경향이 약간은 있지만, 내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 겸손함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다.

 

 자신에게 이로운 가치에 따라서만 사물을 보는 이기적인 사람도 있다. 성경은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자기애(self love)는 자신의 자아를 사랑하는 것이며, 이기심은 자신만을 아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을 채우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을 공허하게 만든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므로 타인도 사랑하지 못한다.

 

 자식을 염려하여 자식만을 위해 살았다는 비이기적으로 보이는 어머니도 있다. 하지만 실은 자신의 자아 문제가 해결이 안 된 경우가 많다. 자아를 잃어버려 생명력을 나누는 능력이 없고, 삶에 대한 회의가 가득 차 있다. 그 보상을 받으려고 자식을 과잉보호하면서 세상으로 못 나가게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주지만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존재다.

 

 사람들은 사랑이 분쟁과 갈등이 없는 상태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사랑은 살아있는 두 존재가 만나므로 부딪치며 갈등하며 이를 통하여 성장한다. 부부가 사소한 문제로 싸운다고 하지만, 사실은 왜곡된 자아가 진짜 이유일 수 있다. 자신의 실존의 핵심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를 내 보이며, 상대와 잘 소통하면, 갈등이 해결된다. 이런 갈등은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준다. 사랑은 결코 평화로운 휴식처가 아니다.

 

사랑은 노력


 많은 젊은이들은 오늘도 여전히 TV 드라마에 나오는 사랑을 꿈꾼다. 우리의 문화는 잘못된 사랑을 매일 쏟아내고, 젊은이들은 그것을 매일 보고 있다. 젊은 시절 나 역시 사랑은 받는 것이고, 빠지는 것이며, 대상의 문제라고 여겼다. 한참을 살고 난 지금에야 사랑은 자아 문제이며, 행동이며, 노력임을 깨달았다. 이제 겨우 알았으니 사랑의 훈련이 되려면 얼마만큼의 세월이 또 가야 하는 걸까. 프롬이 말하는 사랑은 습득 가능한 기술이지만, 한평생 노력해야 할 과제 같은 것이다. 인간이 서서히 성숙하듯이, 사랑의 본질도 그렇게 조금씩 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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