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이중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 김미연 북리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김미연 북리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이중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

페이지 정보

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178회 작성일 21-05-26 23:57

본문

무라카미 하루키가 세계적 작가가 되기 전, 생계가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아내와 함께 재즈 카페를 운영했다. 그는 거의 음악가 수준이다. 음악적 모티브가 소설을 리드한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2013)는 프란츠 리스트의 음악 <순례의 해>에서 영감을 받았다. 당대의 아이돌 스타였던 리스트(1811-1886)는 어떤 백작부인과의 사랑의 도피 행각을 위해, 스위스에 있는 음악 학교에 선생으로 간다. 연인과 함께 스위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순례의 해>를 작곡한다.


 하지만 불륜과는 상관없이, <순례의 해> 1, 2부는 구도자적 고민을 표현하며, 3부에 이르러 색채를 표현하는 인상파 음악이 들어온다. 리스트는 화려한 외면과는 달리,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말년에 신부로 삶을 마감한다. 그의 이중적인 측면은 형식 안에서 자유를 추구한 그의 음악에서 잘 나타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항상 이중성을 내포한다. 형식 안에서 형식이 파괴될 때, 예술은 승화하고 인간도 성숙한다. 이 소설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마음이 닫힌 주인공이 자신의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조화로운 공동체


 주인공 쓰쿠루는 살면서 중요한 만남을 세 번 가진다. 고교 시절의 친구들은 그가 처음으로 만난 중요한 사람들이다. 남학생 셋, 여학생 둘은 봉사활동을 하다가 만난다. 다섯명은 마음이 서로 잘 통하여 같이 있으면 행복했다. 민감한 사춘기지만 이성적 끌림은 자제하고, 하나의 유닛으로서 공동체를 고집했다. 여학생 시로와 구로에게 끌리는 쓰쿠루를 포함하여, 다섯 모두가 내적 갈등이 있지만, 속으로 억누른다. 쓰쿠루는 자신은 색채가 없지만, 다른 넷은 색깔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튀는 색깔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역활이었다

  

 어릴 때부터 역과 기차에 매료되었던 쓰쿠루는 역 설계를 공부하려고 도쿄에 있는 대학으로 간다. 공동체를 떠나기 싫은 네 친구는 고향 나고야에 있는 대학에 진학한다. 쓰쿠루는 방학마다 친구들을 만나러 오는 것이 사는 이유가 되었다. 갑자기 대학 2학년 때 친구들에게 일방적으로 절교 선언을 받는다. 그룹으로 존재하다가 혼자가 되니, 거의 실신 상태가 된다. 자신이 거부당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대학 시절 내내 괴로워한다.

 

형식과 자유


 영혼은 빠져 나가고, 절제와 규칙이 쓰쿠루를 지킨다. 감각을 잃어서 기계처럼 움직인다. 학교 가고, 공부하고, 수영하고. 도쿄의 그물망같은 역을 돌아다니며, 자신을 역이라는 실제적 목적에 가둔다. 고독하기 그지 없는 쓰쿠루에게 철학과 친구 하이다가 나타난다. 하이다와 쓰쿠루는 반대되는 인물이다. 쓰쿠루는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세계에 집중하지만, 하이다는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로의 접근을 고민한다. 사고는 틀 속에 있어야 하지만, 틀을 부수기도 할 때, 인간의 정신은 도약한다. 하지만 쓰쿠루는 하이다가 말하는 형식과 자유, 논리과 비논리의 접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자신의 관심 밖의 것은 아예 집어넣지 않는다.

  

  하이다는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자주 틀었다. 그중에서 노스탈지아는 여학생 시로가 자주 연주하던 곡이다. 쓰쿠루는 시로와 구로를 동시에 안는 꿈을 자주 꾸었다. 최근에는 하이다와 관련된 요상한 꿈을 꾸기도 한다. 자신의 무의식 안에 뒤틀린 어떤 것이 꿈으로 나타나는 지도 모른다. 하이다는 쓰쿠루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진다. 쓰쿠루는 이번에도 자신의 시간표대로 흔들림없는 일상을 지낸다.

 

 쓰쿠루는 도쿄의 역에 취직하여, 직장 생활 십년 차를 넘어선다. 일하고 퇴근하고 규칙을 따른다.  대인 관계는 무난하고, 여자 친구도 항상 있지만,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일본 밖으로 여행한 적도 없고, 세상이 궁금하지도 않다. 술도 마시지 않는다. 현재 여자 친구는 여행사에서 해외 패키지를 기획하는 사라라는 여자다. 그녀는 사람을 많이 상대하여, 매너가 세련되고 적극적이다. 사라는 그의 어딘가가 막혀 있어서, 자신과의 관계가 발전되지 않음을 감지한다. 쓰쿠루는 16년이나 묻어둔 고교 시절의 상처를 꺼내 보인다.


과거의 문제를 해결


 사라는 옛친구들의 소재지를 찾아서 알려준다. 역의 틈새를 보수하는 전문가답게, 이번에는 마음의 구멍을 해결하라고 조언한다. 쓰쿠루는 그들을 만나러 순례의 길을 떠난다. 나고야의 친구들은 변화가 많았다. 아오는 렉서스 세일즈맨이 되었고, 아카는 사원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회사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면서, 나는 스스로 생각한다 라는 마인드를 품도록 사원을 교육한다고 한다.

 

 우리는 삶에 그렇게 많은 자유가 없다.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 같지만, 삶이 시키는 대로 산다. 어린 시절 튀던 색깔들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이들과 다시 만날 일은 없는 듯했다. 두 친구에게 쓰쿠루는 자신이 그룹에서 쫓겨난 이유를 듣는다. 자신이 시로를 강간했다니. 황당무계한 말에 그는 충격을 받는다. 친구들은 쓰쿠루가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지만, 시로가 그토록 엄청난 일을 거짓으로 꾸몄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그 후 그룹은 해체되었고, 시로는 음대를 중퇴했다. 재능이 한계에 부딪혔고, 생명력도 사그라든 그녀는 혼자 살다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쓰쿠루의 순례는 계속된다. 시로의 절친였던 구로를 찾아 핀란드로 날아간다. 시골 마을에서 핀란드인 남편과 어린 두 딸과 사는 구로는 삶을 잘 꾸려온 여성티가 났다. 부부 작가로 공방에서 도자기를 만들며 단순하게 산다. 쓰쿠루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자,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연다. 당시에 시로는 누군가와 성적인 관계를 맺었고 임신까지 했었다. 구로 역시 시로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시로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구로는 또한 쓰쿠루를 사랑했다고 고백한다. 시로에게만 마음을 뺏기는 쓰쿠루가 미워서, 그녀의 거짓말에 동조했다. 정신병을 앓는 시로의 시녀 노릇에 지쳐갈 무렵, 도자기 공부 중에 만난 남편을 따라서 일본을 떠났다. 시로를 피해 왔지만, 핀란드의 길고 어두운 밤이면, 시로의 환영은 여전히 그녀를 괴롭혔다.

 

아픔으로 연결되는 조화


 시로의 악령이 달라붙은 두사람은 재회를 통해 악령을 떨친다. 인간의 근원적인 무의식은 연결되며, 물리적 세상과 심리적 세상도 별개라고 할 수 없다. 쓰쿠루는 꿈 속에서 시로를 강간했고, 구로는 그녀를 죽이고 싶었을지 모른다. 상상 속 칼날이 돌아와서 그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상처는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는 것이다. 두 사람은 시로에게 희생당했다는 생각을 바꾼다.


  사랑했던 쓰쿠루를 잘라 낸 구로는 자신의 잘못을 빈다. 두사람은 과거로 돌아가 힘차게 포옹한다. 사람의 마음은 조화로 연결되지 않고, 오히려 상처로 연결된다. 절규를 내포하지 않은 고요는 없으며, 상실을 통과하지 않은 수용은 없다. 그것이 조화의 근저에 있는 것이다. 철모르던 시절 추구했던 조화로운 공동체는 아픔을 겪은 후에 얻어지는 것인데, 사춘기 청소년들이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쓰쿠루는 이제야 자신 안에 막혀있던 동토를 느끼고, 그것을 녹이고 싶다. 과거의 여자들과 확실한 이별을 했으니, 이제는 사라가 꼭 있어야 할 것 같다.

 

  도쿄로 돌아온 그는 긴자거리에서 남자와 같이 있는 사라를 우연히 본다. 활짝 웃고 있는, 한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다. 그녀는 쓰쿠루와 같이 있을 때는 항상 콘트롤되어 있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그녀도 그랬을까. 사흘 후에 만나기로 했지만, 그는 기다리지 못한다. 새벽에 전화하여, 다른 사귀는 남자가 있는지 물어본다. 사라는 좀 생각해보고, 답을 주겠다고 한다. 나는 단순한데, 사라는 복잡하다.


접점을 찾아서


 그는 초조해서 역을 찾아간다.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기차를 탄다.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그것은 알 바 아니다. 역에 성찰은 필요없다. 시간은 균질하게 흐르고, 내 삶의 규칙성이 편안하다. 한정된 장소에 한정된 관심을 분배하면서 간결하게 살았다. 이제껏 나를 살게 한 힘이다. 하지만 사라는 한정된 관심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음의 문제여서 나는 자신을 다 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견고한 나의 틀을 허물고, 보이지 않는 접점을 넘어야 하는가. 인생은 익어갈수록 이중적 다중적이 되는가. 내가 색채를 찾을 수 있을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