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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연 북리뷰


 

우기지 마세요 - 메릴린 로빈슨의 길리아드를 읽고,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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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48회 작성일 24-05-17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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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숨기는 경향이 있다. <길리아드>는 목사가 생을 회고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책을 반절을 읽을때 까지도 죤 에임스 목사가 내심에 둔 말이 무엇인지 몰랐다. 목사는 설교하기 위해 원고를 정성껏 준비한다. 쓰는 사람, 듣는 사람, 그리고 하느님이 보고 있다. 평생을 공들여 쓴 자신의 원고가 뿌듯하던 목사가 어느날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긴다. 왜 그랬을까?


떠난 탕자와 남은 아들

아이오와주, 길리아드에 사는 에임즈 집안은 대대로 목회자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목회하다가 노예를 도우려고 캔자스로 떠났다. 행동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 이라며, 남북 전쟁에 자원하셨다. 아버지도 목사였다. 신동으로 소문난 형은 동네 사람들이 독일로 유학을 보냈다. 형은 유럽의 비판 신학에 영향을 받아서, 목사 대신에 무신론자가 되어 돌아왔다. 동생, 존 에임즈는 동네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된다. 형은 고향을 떠나면서, 동생에게 비판력 없는 신앙이 문제라며, 미몽에서 깨라고 충고한다. 아버지도 형이 읽었던 책들을 보더니, 병치레하는 어머니를 데리고, 형이 철학 교수로 일하는 따뜻한 주로 가 버렸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침체한 길리아드를 떠나자고 말한다. 에임즈는 자신의 신앙을 무시하는 아버지에게 반항심이 생긴다. 탕아 편을 드는 성경에 나오는 아버지도 모르겠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도 지키기 힘들다. 가족이 떠나버린 낡은 목사관에서 스물 몇 살의 에임즈 목사는 홀로 남아서 목회를 한다. 자신은 집을 지키는 큰아들이라고 위로하면서...


에임즈 목사는 고향 여자와 결혼한다. 아내는 출산하다가 아기와 함께 죽었다. 죽은 딸에게 엔젤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 후, 40년 동안 독신으로 지내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긴다. 밤늦도록 불을 켜 놓고 졸기가 일수인데, 신도들은 목사님이 밤새워 설교 준비를 한다고 믿는다. 동트기 전, 텅 빈 성전에 들어가면, 외로움에 깃든 슬픔에서 묘한 위로를 받는다. 목사는 사랑하고 고민하는 신도들의 흔들림에서 생명력을 본다. 자신은 그런 생생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지만, 그날이 그날인 작은 마을에서 영적 지도자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동네 아낙들은 목사관의 부엌에다 숲이나 빵을 가져다 놓기도 한다. 중매도 여러번 들어왔지만, 목사는 내켜하지 않는다.


옆집에 사는 친구, 보턴 목사는 유서 깊은 루터교 집안이다. 목회의 어려움을 서로 나누는 절친한  사이다. 보턴은 여섯 자녀를 둔 다복한 가정을 꾸린다. 에임즈는 친구의 북적거리는 집을 방문하는 것을 피한다. 부러운 나머지,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도 어길지 모른다. 보턴은 넷째 아들 잭이 태어나자, 에임즈에게 의붓아들 삼으라고 준다. 아이는 에임즈 목사의 이름까지 물려 받아서, 잭 죤 에임즈 보턴이라고 불린다. 이 아이가 악동 중의 악동으로 자란다. 우편함에 불을 지르고,  술과 차를 훔쳐서 도망친다. 잭은 에임즈 목사를 파파라고 부르지만, 목사는 달갑지 않다. 신문에 그 애가 나쁜 일로 이름이 날 때마다 목사의 이름도 같이 올랐다. 잭은 스무 살 무렵에 커다란 사건을 치고는 동네를 떠났다. 아버지 보턴은 옆에 있는 착한 자식들을 제치고, 일을 치고 떠난 탕자 같은 잭을 그리워한다. 길잃은 양에 더 마음을 쓰라고 하지만, 에임즈 목사는 그런 부모를 보면 짜증이 난다.


웃음은 신비

목사는 우는 자들과 우는 것이 훨씬 쉽다. 웃을 일이 없는 날들을 살기 때문이다. 어느 일요일, 처음 보는 젊은 여자가 교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순간 목사는 죽은 딸 엔젤린이 살아서 왔나 할 정도로 긴장한다. 그 여자는 설교라고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처럼 집중한다. 죽은 딸이 이해하도록 쉬운 말로 준비해 왔지만, 그 여자 앞에서 하려니 입에 재가 가득찬 것 같다. 다른 교인은 보이지 않는다. 그 여자, 라일라에게만 설교하는 것 같다.


70살을 바라보는 목사는 자신 앞에 뚝 떨어진 36살의 라일라와 결혼한다. 일년 후, 기적처럼 아들도 생긴다. 깊은 어둠 속에 축복이 준비되어 있을 줄이야. 라일라는 하느님을 보듯이 남편을 모신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It doesn’t matter),” 자신은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빈손이지만, 다 주겠다는 말투이다. 햇빛이 따스한 오후에는 세 식구가 비눗방울을 쫓는 고양이를 보면서 웃음을 터뜨린다. 아들에게 숙제를 시키느라 씨름하는 아내를 쳐다보며 목사는 예수님은 어떤 여자를 골랐을까 상상도 해 본다. 마리아 막달레나같은 여자, 하느님은 낮춰진 이들을 높이시니, 슬픔 안에는 신비가 있다.


말썽 자체

목사의 평화로운 삶에 문제가 생겼다. 심장이 나빠서 몇 년을 못 산다는 진단이 나왔다. 75세의 목사는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돈을 한 푼도 남기지 못하는 것이 염려된다. 아들에게 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문제에 문제가 이어진다. 이십 년 간 소식 없던 골칫거리 잭 볼턴이 고향에 돌아왔다. 바로 옆집이니 잭은 수시로 들락거린다. 라일라는 잭이 오면 얼굴이 환해진다. 아들도 잭을 좋아한다. 강단에서 그들 셋이 나란히 앉은 것을 보니, 멋진 젊은 가족으로 보인다. 늙은 탐심이 밀려왔다. 주님도 배신당하기 전에 정원에서 울었다. 잭을 멀리하라고 말도 못 하고 속만 타들어 간다. 잠을 못 자니 심장은 더욱 나빠진다.


어느 날 저녁 잭이 목사 집에 놀러 왔다. 난처한 질문만 골라하는 잭이 구원 예정설을 목사에게 물어본다. 목사는 악하게 태어난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대답한다. 특히 잭을 보면 더욱 더 그렇다. 중세적인 구닥다리 신앙이지만, 목사는 생각을 비꾸지 않는다. 말이 없던 라일라가 처음으로 끼어든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목사는 그녀의 항의에 놀란다.


목사는 누구를 험담하고 싶지 않다. 형과 아버지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속으로만 담았다. 잭의 과거도 함구하려 했지만, 가족이 위험에 처하니, 목사 직분이고 뭐고 내던지고 싶다. 아들에게 남기는 편지에 참았던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이십 년 전에 잭은 외딴 산골에 사는 어린 소녀를 건드려서 아이를 낳았다. 아버지 보턴에게 해결을 떠넘기고, 잭은 도망쳤다. 보턴은 소녀 아버지의 협박에 시달리면서, 돈을 대어 줬지만, 아기는 결국 영양실조로 죽었다. 그 이후 동네는 잠잠했는데, 잭이 다시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 목사는 무척 궁금하다.


어둠이 깔린 어느 저녁, 잭은 목사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가족사진을 보여주는데, 흑인 여자와 두어살 가량의 아기가 있었다. 잭이 살던 신시내티는 흑백 결혼은 불법이라서 직장도 해고되었다. 부인의 고향인 테네시에 갔지만, 냉대를 받고, 길리아드에 살아볼까 하고 온 것이다. 노예 전쟁 당시 길리아드 근처에 노예 폐지론자들이 터널을 뚫고 쉼터를 만들었다. 북으로 도망치는 흑인들은 길리아드의 목사관에서 하룻밤을 숨기도 했다. 그 후, 흑인 교회에 누가 불을 지르자, 길리아드에 살던 흑인들은 다 떠났지만, 아이오와주는 흑백 결혼을 금지하지 않았다.


“목사님도 상식에 벗어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나요?” 목사는 라일라와의 결혼이 스캔달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 잭은 아내도 교사이며 천박한 결혼이 아니라고 말한다. 두 결혼을 동일시하는 잭이 살짝 기분 나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더 중요한 것은 잭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이다. 목사는 속으로 뛸 듯이 기쁘다. 마음의 평화를 회복한 그는 고향을 다시 떠나는 잭을 진심으로 축복해 준다. 과거에 어린 잭을 미워하면서 주었던 세례였다. 목사는 자신이 이 순간을 위하여 목사가 된 듯한 기분에 빠진다. 


나의 선택

마음이 부드러워진 김에, 목사는 형과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해결한다. 죄를 뉘우치지 않아도 탕자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다. 죄의 시비를 불문하고, 죄 자체를 용서한다는 것이다. 구원 예정설을 신봉했지만, 잭을 보니, 사람은 변할 수도 있었다. 써 놓았던 설교도 변해야 할 것같다. 라일라가 상자에 넣어둔 설교를 자신이 죽으면 태우라고 말한다. 큰아들 콤플렉스에서 벗어난 목사는 편지를 시작할 때보다 훨씬 생기가 돈다.


싫은 사람이 당신을 괴롭힐 때, 친절한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이 사람을 보낸 신의 의도를 묵상하든지, 그 사람을 미워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목사가 라일라와 아들을 사랑하듯이 존재 자체를 사랑하면 된다. 그런 마음이 누구에게나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주님을 신뢰하거나 자신을 괴롭히거나 둘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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