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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고백했어요” - 이언 매큐언의 <속죄>, 평화신문,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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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59회 작성일 24-05-17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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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책을 읽을 때 주인공이 하는 말을 믿는 경향이 있다. 속을 감추는 사람에게 휘둘리듯이 책에도 휘둘릴 수가 있다. 소설의 주인공 브리오니 탈리스는 작가를 꿈꾸는 13살 소녀다. 이차 대전 중인 1939년, 런던 근교에 사는 탈리스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사촌 롤라와 손님 마셜

브리오니는 오늘 무척 분주하다. 북쪽 지방에 사는 사촌들이 온 데다가, 런던에 사는 오빠가 모처럼 집에 온다고 한다. 탈리스가의 막내딸 브리오니는 언니, 오빠와 열 살 이상 차이가 난다. 아버지는 내무성 고위 공무원으로 군사 기밀 업무를 하므로 시내에서 묵고 있다. 어머니는 편두통을 앓으면서 침대에 늘 누워있다. 오늘 큰아들이 데려온다는 손님이 신경 쓰이지만, 큰딸 세실리아가 손님이 묵을 방과 저녁 파티 메뉴를 살필 것이다. 탈리스 부인은 아들과 함께 오는 손님이 세실리아의 신랑감으로 어떨지 눈여겨 볼 작정이다.

 

오늘 저녁, 파티가 열리기 전에 브리오니는 자신이 쓴 연극을 상연할 예정이다. 매일 공상과 상상을 하며,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대본을 완성했다. 자기 엄마가 남자와 도망쳐서, 우리 집에 살러 온 사촌들, 롤라와 쌍둥이 형제에게 배역을 정해 주었다. 롤라는 대본이 유치하다고 비웃고, 쌍둥이들은 대사를 잘 읽지도 못한다. 롤라는 동생들을 구박하고, 형제들은 대들면서 싸운다. 연극 연습은 난장판이 되고 있다. 화가 난 브리오니는 벌판으로 달려간다. 

 

“이건 롤라야, 이건 쌍둥이들이야” 오후 따가운 햇빛 속에서 브리오니는 갈대를 내리치며 분풀이한다. 저쪽 들판에서 로비가 다가온다. 저녁 파티에 초대받았는지 양복 차림의 말끔한 모습이다. 로비는 탈리스가의 정원사와 파출부의 아들이다. 탈리스가의 아이들과 같이 자란 로비는 똑똑해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로비는 아버지의 후원을 받아서 언니 세실리아와 같은 해에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진학했다. 올해 여름, 언니는 낙제를 간신히 면하고 졸업했지만, 로비는 수석으로 졸업하고 집에 돌아왔다. 가을에 의대로 진학할 예정이다. 갈대를 다섯 번째 후려치는데 로비가 웃으며 다가온다. “이 편지를 세실리아에게 전해줄래?” 브리오니는 의아하다. ‘갑자기 언니에게 왜?’ 편지를 쥐여준 로비는 탈리스가를 향해서 걸어간다. 

 

브리오니는 궁금증에 편지를 펴 본다. ‘이럴 수가’ 언니의 신체 부위를 언급하면서 키스하고 싶다는 음탕한 단어가 있다. 브리오니는 이런 말을 입에 담은 적도 없다. 오늘 아침 이층방 창문에서 목격한 장면이 떠오른다. 정원 건너서 멀리 분수대 연못가에 언니와 로비가 서 있었다. 언니는 갑자기 옷을 훌훌 벗었다. 속옷 채로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홀딱 젖어서 밖으로 나왔다. 로비는 정신없이 언니의 몸을 쳐다봤다. 연유야 알 수 없지만, 두 사람 다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정원사의 아들과 주인집 딸 

오후 해가 석양빛으로 물들었다. 갈대를 거의 다 전멸시킨 브리오니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파티를 위해 옷을 갈아입고 식당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서재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둠 속, 코너에 몰린 언니에게 로비가 무슨 짓을 하고 있다. 편지의 음탕한 단어가 떠오르면서 브리오니는 언니를 위험에서 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집 안에서 이런 극적인 일이 일어나다니, 멍청한 사촌들 때문에 연극은 취소했지만, 대신에 어른이 등장하는 본격적인 소설을 쓸 결심을 한다. 

 

여름밤 10시, 파티가 열리는 다이닝 룸은 후덥지근하다. 사촌 롤라는 한껏 꾸미고 나타났다. 가슴이 보이는 꼭 끼는 드레스에 매니큐어, 향수까지 뿌렸다. 16살이지만 성숙해 보인다. 어머니는 바람이 나고 아버지는 어디론가 떠나고, 롤라가 살길은 부자 남편을 만나는 것뿐이다. 레온 오빠가 데려온 손님 폴 마셜은 초꼴릿 백만장자라고 한다. 군대에 초꼴릿 바를 납품하는 사업가인데, 한창 전쟁 중이라 수요가 폭발적이라고 한다.  롤라는 하얀 양복을 입은 마셜에게 추파를 던진다. 눈코입이 한 군데 몰려서 잔인한 인상을 준다. 마셜 역시 고양이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유혹하는 롤라를 의식한다. 

 

식사가 끝날 무렵, 쌍둥이들이 없어졌다. 식탁 위에서 서투른 필체로 쓴 편지가 발견되었다. ‘롤라 누나와 하녀 베타가 너무 무서울서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함니다. 가일을 조금 가져가서 죄송함니다. 미리 말슴 못 들려 죄송함니다’ 집 안이 발칵 뒤집혔다. 열 살 소년 둘이서 벌판을 헤매다가 길을 잃기가 십상이다. 어른들은 안개가 자욱한 벌판으로 뛰쳐나간다. 

 

브리오니도 숲속으로 쌍둥이를 찾으러 나갔다. 실종이라니, 소설의 클라이맥스가 될 만한 일이다. 멀리 나무가 쓰러진 사람처럼 보인다. 오리 소리 같은 새된 비명이 들린다. 나무 둥치가 일어나더니, 남자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브리오니는 그곳으로 뛰어갔다. 옷이 엉망이 된 롤라가 땅에 쓰러져 울고 있다. 방금 사라진 남자가 누구일까? 뒷모습이 로비처럼 보인다. “그 사람 맞지?” “그 사람 맞아” 롤라는 이름은 말하지 않고, 맞다는 말만 반복한다. 언니의 몸을 응시하던 로비, 음탕한 편지를 보낸 로비, 정신병자같은 남자가 로비일까? 브리오니는 열 살 때의 일이 떠오르면서 로비에 대한 괘씸함이 고개를 든다. 

 

쌍둥이들의 실종

브리오니는 오빠와 어머니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한다. 경찰과 의사가 왔다. 어머니는 롤라를 안아서 이층 방으로 올라간다. 심문, 증언, 서명, 일련의 사건들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났다. 다음 날 새벽, 밤새워 쌍둥이들을 찾아온 로비는 탤리스가 현관에서 체포당한다. 먼지를 뿜으며 달리는 호송차를 로비의 어머니가 따라간다. “거짓말이야, 이건 거짓말이야!” 

 

세실리아는 핏발 선 눈으로 증언하는 브리오니를 쏘아보고 있다. 세실리아는 로비가 의대로 떠난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주인집 딸로만 대하는 로비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다. 어쩌면 호숫가에서 옷을 훌훌 벗고 들어간 것도 로비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인지도 몰랐다. 로비의 편지를 브리오니에게 전해 받자 세실리아는 서로가 같은 마음임을 확인한다. 그들은 서재에서 뜨거운 포옹을 했다. 그런데 불과 한 시간 만에 로비가 강간범이 되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의 편지를 쓴 로비가 롤라를 강간할 이유가 없다. 

 

결혼 약속

1939년 11월에 로비는 감옥으로 간다. 감옥에서 3년을 살고, 전쟁에 지원했다. 프랑스에서 퇴각 중인 영국은 보병 입대를 조건으로 조기 석방을 허락했다. 로비가 잡혀간 후 세실리아는 가족과 절연하고 집을 떠났다. 런던의 병원에서 수간호원으로 일한다. 13살짜리 몽상가 여동생의 말을 믿고 로비를 범인으로 몰은 어머니, 오빠, 방관만 한 아버지 모두에게 화가 났다.

 

언니가 집을 떠난 후 브리오니도 집을 떠났다. 대학을 포기하고 언니처럼 간호사가 되었다. 쌍둥이가 실종되던 날, 경찰이 오고 증인 심문이 진행되자, 처음과 다른 말이 나오면 경찰은 얼굴을 찌푸렸다. ‘감히 정원사의 아들이 맏딸을 넘보다니’ 어머니는 로비가 폭행범인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 했다. 브리오니는 로비를 분명히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군인들을 돌본다고 해서 자신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세밀한 기억은 죄책감이 되어서 평생 돌리면서 기도해야 할 묵주가 되었다.

 

독일군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로비는 패잔병들과 도버 해협으로 후퇴하는 중이다. 영국 군함이 군인들을 자국으로 실어 나를 것이다. 쏟아지는 폭탄 속에서 파편을 맞은 로비는 배의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있다.  군복 윗주머니에 세실리아의 편지가 접혀서 들어있다. 감옥에서 나와서 전쟁터로 떠나기 전날 리버풀의 찻집에서 세실리아를 만났다. 서재의 3분 포옹과 찻집의 30분의 대화는 그들의 결혼 계약서였다. “기다릴게, 돌아와” 로비는 죽을 힘을 다해서 버틴다.

 

한가지 의혹이 로비를 계속 따라다닌다. 브리오니가 왜 그토록 악의적으로 거짓말을 했을까? 브리오니가 열 살 때, 로비가 케임브리지로 떠나기 전 19살 때였다. 그 애에게 수영을 가르친다고 강가로 갔다. 강은 역류인데다 물살이 세었다. 그만 하자고 바위에 앉아서 옷을 말리고 있었다. “내가 물에 빠지면 오빠가 구해 줄 거야?” “물론 구해주지.” 말 끝나기가 무섭게 브리오니가 강으로 뛰어들었다. 로비는 파도를 저항해서 간신히 그 애를 건져 왔다. 브리오니는 ‘사랑해요 오빠’ 하면서,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 때부터 브리오니는 자신에 대한 짝사랑을 키워 왔을까? 배신당한 사랑에 대한 보복이라면 그 아이의 집요한 거짓말이 설명된다. 로비가 24년 동안 겪은 세상은 지금 겪고 있는 전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보복적, 무차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쌍둥이 소년들을 밤새 찾아서 귀환했는데 기다리고 있던 결과가 체포였다. 오직 세실리아만이 그를 믿어 주었다.

 

브리오니의 참회

1942년 로비는 도버 해협까지 가지 못하고, 패혈증에 걸려서 죽었다. 로비가 죽은 3개월 후, 세실리아도 런던의 대 공습으로 죽었다. 자신의 강간범인 마셜을 숨겨준 댓가로 롤라는 마셜과의 결혼에 성공한다. 자선 파티를 열면서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브리오니는 77세에 평생 써온 소설의 엔딩을 변경했다. 소녀가 두 사람을 찾아가서 속죄하고 그들이 전쟁 후에 결합하는 것으로 연인을 맺어주었다. 브리오니는 자신의 생을 다음의 글로서 정리한다. 

 

‘사람들은 불행한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을 폭로해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생을 망가뜨릴 필요가 있을까. 그러기에 나는 너무 늙었고 지금 누리고 있는 작가로서의 명예를 사랑한다. 내가 혈관성 치매에 걸렸다고 하니 내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도 망각할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로비, 세실리아, 롤라는 소설 속 인물로만 남을 것이다. 나는 59년간 속죄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여러분은 브리오니의 마지막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13살 소녀의 순진무구한 시선으로 언니를 보호하려 했다고 발뺌을 하지만, 나중에 로비에 대한 앙심이었음이 드러났다. 죄가 가벼워 지도록, 엔딩을 변경했고, 사후 소설을 세상에 내는 것으로 출판사와 계약하여 자신이 받을 비난은 다 피해갔다. 그녀는 소설 제목 그대로 <속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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