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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 노래하는 밀라노 : 조민상(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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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6,286회 작성일 10-04-30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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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이 7시를 울렸다. 커튼 사이사이로 뚫고 들어와 방안을 신비스럽게 채우는 지중해 국가의 이른 6월의 태양마저 자명종 소리를 거들자, 신기수는 무거운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깨어 일어서려던 그는 허벅지와 허리의 뻐근한 통증에 다시 눕고 말았다. 어제 하루 종일 제노바 근처에 있는 세라발레(Serravalle)의 대규모 아울렛 상가를 누비고 걸어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자책하다가, 오늘도 가이드 건이 있어 나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이 일까지 맡은 것에 괜한 화가 치밀어 왔다. 사실, 그는 유학초기부터 작년 초까지 가이드나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이태리어도 잘하고 더불어 이태리문화에도 제법 안목이 있었지만,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결국 성악도의 길을 접은 선배들을 본 후, 자신은 정통 성악가로서 승부를 걸겠다고 다짐하고서는 아르바이트 제안을 모두 거절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대여섯 번 정도 통역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지만, 그 때는 일을 주는 쪽에서 ‘신기수씨가 아니면 안 됩니다.’라고 하였기에 좋은 보수에 대접을 받아가며 자존심까지 세울 수 있어 수락한 일들이었다. 아내가 늦지 않겠냐는 말에 잠시 으쓱하던 망상에서 깨어, 침대를 뒤로하고 화장실로 간 그는 소금물을 입 안 가득 넣고 목 안 깊숙이 세정하였다. 그리고 이태리에 온 이후 즐겨 사용하던 이태리어 기본 단모음인 A(아) E(에) I(이) O(오) U(우)를 이용하여 아침 발성을 해 보았다. 방금 일어났기에 가라앉은 목에 가래가 낀듯하여 헛기침을 크게 서너 번 하니 이번에는 목젖이 약간 따끔한 느낌이 왔다. 이태리 유학 2년차가 되었을 때, 후두에 작은 혹이 생겨 의사로부터 몇 달 동안 발성은 물론 말조차 하지 말라는 진단을 받았던 그때 이후 몸이 피곤하면 이러한 증상이 간혹 발생하였다.
‘어제 그 두 중년 부부, 정말 힘들었지. 묻는 것도 많고, 안 되는 할인도 무대포로 통역하라고 하고. 그러니 내 목이 이렇게 되었지.’
그는 자조적인 독백을 뇌었지만, 어제 세라발레 명품 아울렛에서만 3천 유로 이상을 쓴 그 중년부부로부터 수고비로 300 유로를 이미 받았고, 오늘도 반나절만 가이드하면 150 유로가 들어온다는 생각에 오히려 들뜬 마음이 되어 면도까지 끝내었다. 450 유로면 연초부터 어려워지는 경제상황과 맞물려 점점 쪼들려가는 살림에 단비와도 같은 수입이었다. 방으로 돌아와 무엇을 걸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고위공무원 특별단체관광인데 잘 보여야지 하며 결국 단벌 여름양복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곧 아이들 방으로 갔다. 6월 초순부터 시작되는 이태리 학교들의 여름방학을 맞아 아직도 자고 있는 딸과 아들의 볼에 입맞춤을 한 다음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현관으로 나설 때, 아내가 그를 불렀다.
“뭣 좀 먹고 가지 그래요.”
그의 아내는 그가 아침에는 뭘 먹지 않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는 말에 은근히 불쾌한 마음으로 답하였다.
“생각 없어. 알면서 왜 그래.”
“여기 꿀물을 타 놨어요.”
성악가와 함께 산지 15년이 넘은 아내는 그의 아침 발성만 듣고도 벌써 목이 안 좋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Grazie!(그라찌에!).”
겸연쩍거나 자존심에 금이 간다싶을 때면 한국말 대신 꼭 이태리어로 대응하는 그는 이번에도, 조금 전 불쾌하게 응대했던 자신을 쑥스러워하며 이태리어로 고맙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오늘은 반나절만 하면 되니까 별 일 없을 거라고 아내를 안심시키면서 꿀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9시 10분 전 모임장소인 밀라노 두오모 광장에 들어섰을 때 6월 중순 밀라노의 날씨는 무척 화창하였다. 최고평균기온이 26° 정도이고 습도도 가장 낮은 달일 뿐만 아니라 구름도 7, 8월에 이어 가장 적게 끼는 달이라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국가의 관광객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하다. 두오모 성당은 몇 달 전 2년 넘게 이어졌던 전면 보수공사를 위해 처져 있던 보수막이 말끔히 걷혀졌기에, 맑은 날씨와 함께 밝고 투명한 베이지색 바탕에 아주 옅은 노란색과 붉은색을 은근슬쩍 흡수한 대리석 벽면을 도도하면서도 세련된 자태로 뽐내도 있었다.
“기수 형, 여기서 뭐하세요?”
같은 교회에 다니며 역시 같은 과 대학후배인 박인태가 그의 감흥을 깼다.
“아, 인태구나! 악보 사러 나왔어?”
신기수는 대답을 피하고 오히려 질문을 했다.
“아뇨. 한국에서 배낭여행 온 조카와 만나기로 해서요.”
박인태는 명랑한 목소리로 답한 직 후 혹시 오늘 가이드 있냐고 물었다.
“으응…….”
무언가 들킨 사람처럼 신기수가 얼버무리며 대답하자, 박인태도 괜한 질문을 했다싶었는지 급히 인사를 했다.
“형, 늦었는데 저 먼저 갈게요. 교회에서 봐요.”
“그래, 그럼 재미있는 시간 보내.”
사라져 가는 얄미운 그의 뒷모습 건너편에 다섯 명의 한국인 그룹이 성당입구 계단을 향하여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전형적인 한국 관료들의 자태를 드러내며 걸어오고 있었다. 힘 준 목에 약간 거만한 듯한 걸음걸이, 이태리사람들이 보면 약간 무표정하다 못해 짜증스런 얼굴표정, 메이커 있는 옷가지로 단장하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코디가 덜 된 의상들은 그들이 한국인 관료임을 확실하게 하였다.
사실, 같이 앉아서 이야기 하다보면 점잖고 겸손한 사람들도 있는데 왜 저렇게 구태의연한 행태를 버리지 못 하나 하고 비난하는 한편, 자신은 16년간 이태리에 살면서 의식이 깬 사람이니 당신들보다 나은 편이오 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그들에게 다가서서 머리 숙여 인사는 하며 예는 취하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여러분! 신기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는 인천시에서 나왔습니다.”
다들 목례만 하는 가운데, 그 중에서 단장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화답하면서 늘 일어나는 의례적인 대화가 오갔다.
“그래 가이드 분은 뭐 하시는 분인가?”
“저는 성악을 하고 있으며 테너입니다.”
“아, 그럼! 이태리 하면 성악이지. 그런데 오신지 얼마나 되었소?”
“올해 만 16년 됩니다.”
“어이구, 그럼 이태리 사람 다 되었겠군.”
“그럼 나이도 꽤 될 텐데.”
“마흔 입니다.”
“한국엔 돌아가지 않으실 건가?”
“모르겠습니다. 제 청춘을 여기서 보냈기에…….”
“자자, 가이드 분, 오후일정도 있고 하니 어서 둘러봅시다.”
처음 이일을 시작했을 때, 가이드라는 호칭에 불끈했던 기억을 피식 웃어 버리고는 신기수는 자신이 해야 할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1386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96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된 밀라노 두오모는 로마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과 스페인의 세빌리아 성당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입니다. 외부의 전면 높이가 68m, 외부 폭이 93m, 외부 길이는 158m 이며 최상부에 놓여 있는 황금으로 덮인 마돈니나 상까지의 높이는 108m입니다.”
30분 가까이 밀라노 두오모 성당을 세세히 설명하면서 신기수는 1993년 가을 밀라노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이 성당을 대면하였을 때를 회고하였다.
그때 한국의 국보 1호 남대문과 보물 1호 동대문이 저 안에 대체 몇 개나 들어갈 수 있을까 하고 한 동안 충격에 잠긴 적이 있었다. 그가 그렇게 확신하던 한국문화만의 위대성과 창조성이, 그리고 그렇게 넘쳐나던 배달민족의 자긍심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러면서 자신을 우물 안의 개구리로 만든 한국교육정책에 심히 분개하였고, 한국에는 지나치게 국수적인 역사관과 편협한 저널리즘이 판을 치고 있다고 단정해 버렸다. 아마도 이러한 경험으로 인하여 그가 한국과 멀어지고 이태리에 장기체류하게 된 것이라고 한 그의 아내의 말이 해가 바뀔 때마다 점점 맞아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두오모 성당에 이어 갈레리아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밀라노시 제일 중심에 있는 거리를 지나 스칼라 극장에 도착하였을 때, 신기수는 이번에도 옅은 좌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그룹 중의 누군가가 자신에게 여기 스칼라 좌에 서 보았는지 혹은 이 무대에 올라간 한국인이 누구인지를 제발 묻지 않기를 바랐다.
역사적 사실과 야사는 물론 건축분야까지 세세히 곁들여, 중세기 밀라노 영주였던 스포르짜 가문이 완공한 가스뗄로 스포르쩨스코(Castello Sforzesco ; 스포르짜의 성)까지 가이드를 마치고 났을 때, 그룹의 대표는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신 선생, 가이드를 참 잘하세요. 게다가 박식하시고. 안 그렇습니까?”
“아, 오늘 정말 좋았어요. 설명도 참 잘하시고.”
아침에 가이드라던 호칭이 선생이라고 바뀌자 그는 잠시 대학교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수고비 150 유로에 50 유로를 팁으로 더 주자, 그는 대학교수의 기분을 즉시 벗어 던져야 했다.
한국에 오면 꼭 연락하라며 명함을 주고받는 의례를 끝으로, 그는 어제와 오늘 받은 수고비를 챙겨 담은 지갑을 뿌듯한 기쁨과 함께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가족들에게 무엇인가 해 줄 수 있다는 작은 희망에 잠긴 채.


자신을 기다리던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늦은 점심을 마치고, 신기수는 아이들에게 자신 있는 투로 주말에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아빠, 전 그냥 집에 있을래요. 졸업시험이 있어서요.”
만 14세로 이태리학제에 따라 9월부터 고등학교에 가게 될 큰 딸 미라는 일상적인 말은 한국어로도 잘 표현하였다.
“난, 수영장가고 싶어요. 동네 수영장 말고 온다랜드(Ondaland)요.” 밀라노 근교에 있는 대형인공파도수영장
큰 딸과 세 살 터울로 역시 이태리학제에 따라 9월부터 중학교에 다니게 될 둘째 녀석 도원이는 기쁨과 개구쟁이 끼가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한국어 표현이 아직은 어눌한 둘째는 곧 자신의 희망을 이태리어로 수정하였다.
“누나가 안 가면 재미없으니까, 누나 시험이 끝나면 같이 가요.”
좁은 집안에서 자주 다투긴 해도 친척도 없는 외국생활에 서로 유일한 남매간이라 기실 속으로는 서로 생각해 주는 바가 깊었다.
하지만, 아무튼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지방이나 교외에 있는 친척집 혹은 여름 휴양지에 빌린 집을 마련하여 바다와 산으로 다 떠나버리는 이태리 초중고학생들을 볼 때마다, 자신의 두 아이들에게 미안한 감정을 금할 수 없던 신기수는 먹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럼, 일단 이번 주말에는 돼지갈비와 메밀국수를 먹자.”
그의 제안에 동의한 아이들이 그들의 방으로 돌아가자, 그의 아내가 잠시 머뭇하더니 고지서 한통을 식탁위에 조심스럽게 내 밀었다.
“미라아빠, 혹시 루이지한테 연락해 봐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는 직감적으로 밀린 신호위반벌금이라고 생각했다. 90년대에는 벌금을 내지 않아도 시간이 가면 해결되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세금징수청에서 꼬박꼬박 이자까지 포함하여 추가고지서를 보내고 있다. 행정이 느리고 엉망인 이태리가 돈 걷는 것에는 작심을 한 모양이었다. 고지서를 보니 몇 년간 밀린 벌금과 연체료가 합산된 2,500 유로를 보름 안에 지불하지 않으면 자동차를 차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온 몸에서 힘이 다 빠져버리는 느낌이었다. 근간 장보는 돈도 빠듯하여 각종 세금도 밀리고 있는 형편을 잘 알고 있기에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 스스로 강하다고 믿고 있었고 아내와 아이들도 남편과 아버지가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있었기에 그는 한숨 한번 쉬지 않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그 고지서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눈을 돌리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애써 별 일 아니라는 듯 아내에게 말했다.
“이태리가 요즘 별 일이군. 이렇게까지 발전했어. 아무튼 루이지에게 연락하면 무슨 해결책이 있을 거야.”
그러나 그는 아무리 루이지가 오랜 친구이며 변호사일지라도, 이미 발급된 고지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없이 고지서철에 그것을 끼워 넣는 아내의 무표정한 얼굴이 시들어가는 꽃송이 같았다.
15년 전 자신 하나만 믿고, 하던 피아노학원 강사직도 접어두고 밀라노로 시집 온 유현지. 자신도 국립음악원에 다니고 싶어 했지만, 결혼 직후 아기를 갖게 되었고 자신의 남편이 후두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본 후 남편과 육아를 위해 모든 것을 접은 여자였다. 그리고 5년 전 남편이 시부모로부터 경제적 자립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교민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어온 심지 또한 굳은 여자였다. 그러나 이틀 전 밀린 세금고지서들과 아이들 교과서 구입비 명세서를 책상에 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아내를 본 그는 지금 아내에게 무언가 말을 해 주지 않으면 아내가 쓰러져 버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신기수는 이틀간 번 돈 500 유로를 아내의 쪽으로 밀면서 말했다.
“영훈이가 그러는데, 지난번 오디션 본데서 연락이 곧 올 거라고 하더군.”
바리톤으로 이태리에서 제법 자리를 잡은 강영훈은 신기수에게 자신이 속해 있는 아젠찌아 에이전트의 이태리어를 몇 달 전 소개해 준 적이 있었다. 사십이 된 신기수는 이제 나이 제한으로 성악 콩쿨에 참가할 수 가 없었기에 성악가로서 연주무대에 설려면 아젠찌아를 통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신기수가 오디션을 본 토스카는 그래도 자신이 있는 오페라여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미라 아빠는 역시 노래를 할 때가 멋있어요.”
아내의 희미한 미소를 담은 입술은 절망을 삼키려는 듯 굳게 닫혔다.
그날 밤 신기수는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중앙 콩쿨에서 2등을 한 다음, 기필코 위대한 테너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태리 유학. 당당히 밀라노 베르디 국립음학원에 합격하며 부풀었던 야망. 그러나 지나친 욕심이 부른 후두염을 앓으면서 시작된 고통. 간신히 졸업한 국립음악원. 단 한번의 2등 입상 이외엔 번번이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한 여러 성악콩쿨. 작은 지방대의 강사자리보다는 이태리에서 성악가로서의 캐리어를 쌓겠다는 예술가적 고집. 그리고 이제는 가이드와 통역으로 꾸리는 삶.
월세 900 유로, 식생활비 300 유로, 각종 세금 150 유로, 학비는 무료지만 두 아이의 교재 및 문구비와 용돈 100 유로 각종 잡비로 200 유로 등 월 지출비가 1,650 유로.
그의 수입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월 평균 1,200 유로였으나, 원화의 약세로 인하여 한국인 관광객과 비즈니스맨이 줄어들어 가이드 수입이 적어진 올해는 월 평균 700 유로로 떨어졌고 피아노를 가르치는 아내의 수입이 약 500 유로 정도로 월 총수입이 1,200 유로 정도. 통장의 잔고는 2,000 유로.
가끔 하게 되는 작은 연주회나 결혼식 축가 사례비로 들어오는, 부정기적이나마 목돈이 되는 과외 수입금이 있기는 하지만 가계를 아주 힘겹게 맞춰가고 있었다.
이렇게 몇 달만 가면 자신이 파산하고 만다는 생각에 이르자 신기수는 시트로 몸을 감싸고 웅크리고 말았다. 그는 혹시 아내가 깰까 봐 가슴으로만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 학교는 어떻게 보내나, 먹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중고차가 고장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나, 다 접고 한국으로 가야하나, 창밖으로 몸을 던지면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을까, 가족과 다 함께 뛰어내려야 하나. 이런 모진 상상이 그의 꿈 속 안으로까지 극심한 위기감으로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거의 끊었던 담배를 피워 물고는 베란다로 나갔다. 나이 사십이 되도록 받기만 하고 해드린 것 없는 부모님, 뭐 하나 잘난 것 해주지도 못하고 잘난 남편도 못되는 그를 아직도 믿어주는 아내, 아버지가 최고의 성악가인 양 자랑하는 아이들. 그 모두들에게 죄송 죄송 미안 미안만 반복하였다.


새벽에 아내가 급히 신기수를 깨웠다. 도원이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며 머리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고 하였다. 아이들 방에 들어갔을 때, 도원이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잡고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 무서운 생각이 든 신기수와 아내는 다급하게 아이를 잡고 엄마 아빠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다. 잠시 후 정신이 돌아온 도원이를 데리고 신기수는 병원 응급실로 향하였다. 지난 새벽에 간신히 잠에 들었다가 불과 2-3시간 만에 깨었지만, 놀란 새벽공기에 정신이 번쩍 든 그는 전속으로 질주하였다. 대기실에 들어서서 응급접수를 하니 4단계 위급도 중에서 3단계로 처리되어 대기하게 되었다. 대기실에 도원이를 안고 털썩 주저앉은 신기수는 어제 오후 돈 문제부터 오늘 새벽까지 이어지는 도원이의 응급실행까지 일련의 환란에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너무 피곤하여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고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깜빡 졸고 말았다. 신기수는 비몽사몽간에 또 한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호명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이태리에 살면 인생의 오분의 일은 기다리다 버린다는 말을 또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우체국에 가서 제세공과금을 내거나 편지를 부치려 해도 30분은 족히 기다려야 하고, 은행에 가서 돈을 찾거나 입금하려고 해도 못해도 역시 30분간의 대기가 필요하고, 일반 관공서는 이 보다 더 심하고, 1년짜리 체재허가증을 신청하면 거의 1년 있다가 발급되면 다행이고 그러면 곧 다시 갱신 신청을 해야 하고, 재판진행은 유럽에서 가장 더디고. 한국 같으면 창구직원들이 빠르고 숙달된 자세로 일을 처리하는데, 이태리직원들은 이 서류 저 서류 만지작거리고 옆 사람과 수다 떨며 굼벵이 삶아먹은 듯 일을 처리하니 이 꼴을 보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아마 한국 같았으며 민원실과 창구가 다 뒤집어졌을 것이다. 이태리에 처음 와서 이런 꼴을 보고 씩씩대던 신기수에게 잘못하면 고혈압으로 죽을지도 모르니 그저 이태리라는 완행열차를 탔다고 생각하라는 선배의 말이 시간이 갈수록 진짜 명언으로 바뀌고 있었다. 완행열차를 타고 그 안에서 팔짝팔짝 뛰어봤자 결과는 바뀌지 않고 자신만 손해를 볼 뿐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신기수 자신에게 이런 나라에 왜 살고 있느냐고 물을 경우에는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이태리에는 인종차별이 거의 없고, 없는 자를 위한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사실, 한 이태리 젊은이가 25세에 정규 직업을 가졌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은 이미 미래, 즉 노후대책까지 보장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정규직 직원은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해고당할 일이 없고, 보장된 월급을 바탕으로 대체로 20년 상환의 모기지론을 하여 집을 구입할 수 있으며, 35년 근속 후 퇴직하면 죽기 전까지 노후생활에 충분한 연금을 받게 된다. 과유불급이라고 정규직 노동인구가 줄고 생존연령이 높아지면서 복지제도에 대한 개혁이 요구되고 있지만, 아직도 이태리는 카톨릭의 박애문화와 노동자와 약한 자를 위한 공산사회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기에, 일할 때는 일하고 쉴 수 있을 때는 편히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이태리에 거주하는 내국인 및 외국인들은 매년 수입에 따라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을 지불하기 때문에 어떤 병에 걸려도 큰돈을 내야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더구나 응급실에 들어오게 되면 누구에게든지 일단 모든 진료 및 치료가 무료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태리에는 ‘돈이 없어 죽는 환자는 없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신기수 역시 매년 의료보험을 내고 있기에 치료비에 대한 문제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며 벽에 기대어 앉았지만, 가계가 어려운 지금 도원이의 상태가 심각한 것이 아닌가 하여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귀와 눈 검사 그리고 뇌의 단층촬영검사를 마친 의사는 특별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성장하는 아이에게 간혹 있을 수 있는 신경성 증상일 수 있으니 퇴원하였다가 또 다시 증상이 반복되면 오라고 하였다.
의사의 진단에 한시름 놓은 신기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도원이에게 당부하였다.
“이번 주 토요일 저녁에 모이는 피자파티에 가지 말자.”
도원이가 다니는 축구클럽은 매년 6월 중순 팀별로 피자파티를 벌렸다. 이 파티에는 아이들의 가족들도 같이 참석하여 축구이야기, 학교이야기, 사는 이야기 등을 나누곤 하였다.
신기수도 이런 자리를 좋아하고 또 유일한 외국인으로 있는 도원이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꼭 참석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피자파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시즌을 마감하는 격렬한 경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신기수는 도원이보고 가지 말자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기수는 도원이가 반대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000년 겨울에 안정환이 소속된 뻬루지아 팀이 밀라노의 산시로(San Siro) AC 밀란의 홈구장 경기장에서 밀란 팀 AC 밀란을 이태리에서 단지 밀란이라고 한다. 과 경기하는 것을 본 다음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선언한 도원이는 축구라는 말만 들으며 모든 것을 망각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도원이가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말을 잘 듣지 않을 때면, ‘너 축구클럽에 안 보내!‘ 라는 구호가 특효약으로 들었다. 유치원 다닐 때 오후시간에 도원이를 봐 주던 이태리 가정의 할아버지가 밀란니스타 밀란팀 팬 였기에 저절로 밀란 열성팬이 된 도원이는 카카(Kaka)를 우상처럼 섬기고 있었다.
“아빠, 저 괜찮아요. 축구할 수 있어요.”
“녀석아, 네 건강을 위해 그러는 것인데 쉬어야지.”
“그래도 하고 싶어요, 제발.”
한 이삼일 도원이의 상태에 문제가 없으면 이번 토요일에도 결국 도원이에게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신기수는 피자파티에 참석할 돈을 계산하며 아내와 딸에게는 참석하지 말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세금징수청에서 나온 벌금납부 고지서를 들고 집을 나선 신기수는 자전거를 타고 루이지의 변호사 사무실로 향하였다. 시내는 교통이 복잡하고 시내 중심은 출입 제한이 있어 자동차로 다니기가 무척 불편하기도하였고, 또한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그는 자전거를 즐겨 탔다. 그러나 신기수는 이틀 전 입었던 단벌 여름 양복을 또 걸치고 있었다. 루이지는 딸 미라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실비아의 아버지로 대대로 변호사 집안의 장남이다. 신기수와 그의 집 식구가 아주 가깝게 지내게 된 것은 미라의 담임선생 안나마리아 덕분이었다. 안나 마리아의 딸이 결혼식을 올릴 때, 축가를 불러줄 사람을 찾다가 미라의 아버지인 그가 테너라는 것을 알고 축가를 부탁 했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오페라 공연을 자주 관람하던 루이지는 그때 신기수의 목소리에 반하여 자신의 집에도 초대하는 등 신기수의 가족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침 그 당시 세 들어 살던 아파트의 집주인과 문제가 있어 법원까지 가게 되었는데, 그때 루이지가 아무 보수 없이 이것을 해결하여 주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자녀들을 매개로 때마다 교류하는 집안이 되었다. 그러나 중상류층의 삶을 구가하는 루이지 가정과 만날 때면, 자신의 힘겨운 모습을 감추고 싶기도 하고 특히 미라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복장에 신경을 썼다.
고지서를 받아 훑어 본 루이지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자신이 알아서 해 보겠다고 신기수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7월 말경에 고향인 시칠리아에 휴가를 가는데 함께 가겠냐고 하였다. 결혼하기 전에 고대 그리스유적이 숨 쉬는 타오르미나 시칠리아의 메시나 시 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로 그리스와 로마유적이 많이 있음의 야외극장에서 호기 있게 한곡 불렀다가 거기에 있던 관광객들로부터 환호의 박수를 경험한 적이 있던 신기수는 가고 싶다는 말이 목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네 가족이 그곳에 갔다 오는 교통비만도 몇 백 유로였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말을 차마하지 못하고 여름에 연주가 있을 것 같다는 핑계를 대었다. 루이지는 그러면 아이들만이라도 보내라고 계속 성화를 했다. 학교친구들이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뜨거운 밀라노에서 두 아이들 홀로 집에서 빈둥빈둥 거리며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 신기수는 같이 가면 아주 좋겠는데 중요한 연주가 있어 못 가니 안타깝다고 한 다음, 떠나기 전에 시간이 되면 식사나 한번 같이 하자고 허튼 객기를 떨면서 나중에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였다.
루이지의 사무실을 나선 신기수는 근처에 있는 밀라노 최대의 쇼핑거리인 코르소 부에노스아이레스(Corso Buenos Aires)거리에 들어섰다. 비아 몬테나폴레오네(Via Montenapoleone) 밀라노 최대의 명품거리와는 다르지만 2km가 넘는 양쪽 길가에 빽빽이 들어선 상점들 사이에 Calvin Klein, Liu Jo, Guess 등 명품가게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고 싶고 갖고 싶은 것은 많지만, 집에 오는 광고전단지를 살펴보면서 마음을 스스로 달래곤 하던 그는 가끔 쇼핑거리에 와 이곳저곳 들러서 실물과 가격을 비교해 보며 엷은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걷곤 하였다. 성악도가 악보를 하나 더 사서 공부를 해야지 하면서도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흠이 있는 구두를 볼 때마다 새 구두 한 켤레를 구입하고 싶은 욕망은 무서운 불길처럼 올라 신기수의 몸 전체를 태워 먹을 것만 같았다.
‘보름만 있으면 여름정기세일이 시작될 텐데 그때 보지.’
이렇게 쓸쓸한 독백을 날린 그의 눈에 복권판매를 하는 타바키(Tabacchi) Tabacchi는 담배와 우표, 수입인지, 각종 복권을 파는 가게 간판이 들어왔다. 신기수는 로또복권에 자기가 선호하는 숫자를 써 넣었다. 기본이 1 유로이지만 그는 8 유로짜리로 작성하였고 내친 김에 2 유로짜리 복권을 하나 더 구입하였다. 10 유로면 네 가족이 삼겹살 파티를 할 수 있는데 라고 독백하다가 자꾸 치졸해 지는 자신을 꾸짖었다. 10 유로가 나갔기에 더욱 얇아진 지갑이지만, 복권을 구입할 때면 곧 억만장자가 된 기분, 아니 될 수 있다는 기분에 황홀한 미래를 향하여 나래를 펴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신기수는 2-3일마다 발표하는 로또복권의 결과를 즉시 확인하지 않았다. 당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확인하지 않으므로 실낱같은 희망이 연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한 달 이 지난 다음 확인하면서, 자신이 희귀한 경우의 불치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며 억만장자의 희망을 꾸겨 휴지통에 던져 버리곤 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확률을 높여 10 유로치 복권을 구입하였으니 뭔가 당첨될 것이라는 강력한 느낌이 그의 전신에 전기처럼 흘렀다. 그리고 밤에는 신기수가 그의 부모 및 장인, 장모와 함께 그의 네 가족이 호화 유람선을 타고 지중해를 일주하는 꿈을 꾸었다.
신기수가 다니는 교회는 필요한 제반 설비를 갖춘 제법 큰 건물에 비해 성도수가 200명을 넘지 않기에 쾌적감보다는 한산하다는 느낌을 들게 하였다.
돈 문제로 울적한 기분이 교회성도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어느 정도 가라앉기는 했지만, 얼굴에 박힌 수심은 감출 수가 없었다.
“신 집사, Come va? (꼬메 바? : 어떻게 지내)”
이태리에 살다보니 너스레 떨며 하는 대화는 이태리어로 할 때가 많았다.
“Bene! Grazie! (베네. 그라찌에! : 잘 지내. 고마워)”
신기수도 형식적으로 응답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독백하였다.
‘잘 지낸다고 해야지 뭐라고 답하나? 어렵게 지낸다고 솔직히 말해도 바뀌는 것은 없지. 오히려, 그 이유를 물으면 힘들게 설명해야 되지 않아? 그 잊고 싶은 것들을 하소연 하듯이 말이야. 하긴 너도 나와 크게 다른 처지는 아닐 터이니 그저 이렇게라도 잘 지낸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야지.’
스스로 자조하다보니 정말 서글퍼진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진짜 신앙인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시절 친구의 손에 이끌려 그저 재미로 다니던 교회에 신앙이라는 미명을 덧 씌워 봉사하게 된 것은 대학 입학 후 성가대에서 솔로를 맡았을 때이다. 위치가 사람을 만든다고 성가대를 하며 기도와 봉사도 많이 하여 결국은 성가대 지휘까지 하였다. 나중에 자신을 돌아보니 그 모든 처신에 있어 교회에 있으니 교회의 색깔을 입고 있었던 한 마리의 카멜레온이었다. 교회에서 대접도 받고 수고비도 받았으니, 녹을 주는 종교기관에 벨칸토 발성으로 아멘하며 화답한 것뿐이었다.
이태리에서도 다니던 관성에 젖기도 하고, 그래도 친숙한 환경이기도 하여 계속 교회에 다닐 뿐이었다.
목사는 오늘도 모든 걱정을 전능하신 주 앞에 다 내려놓으라고 강변하였다.
‘도대체 무엇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인가? 목사님 당신이 우리가 겪는 고통을 아는가? 이태리어 해야지, 느려 터진 행정으로 1년이 넘게 체재허가증을 갱신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지, 세금내야지, 자녀 키워야지, 매일 밥값 해결해야 하지, 그리고 학업을 마치려고 몸부림치고 있지. 이 모든 것이 당장 처리되어야 하는 것들인데… 당신은 이런 일들을 성도들이 해결해 주고 있으니 잘 모르지. 당신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이 아니기에 세상에서 당신의 가르침대로 행하려고 하지만, 구호적인 관용과 포용의 정신보다 합리와 준법을 더 앞세우는 문화가 저변에 깔린 이태리에서 살면서 겪는, 상호 도그마의 비호환성과 괴리감으로 성도들이 힘들어하고 있음을 아는가? 밖에서 겪는 어려움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풀어가며 신앙을 정립하려고 하는데 당신은 우리가 부족하다고 책망만 하고 있지. 현실에서 치이고 교회에서 치이고 불쌍한 성도들. 내려놓고 싶지만 어떻게 내려놓는지 그것을 알려 주어야하지 않는가?’
한국교회가 전제주의, 사교(私敎)주의, 폐쇄주의로 흐르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조금의 평안이라도 얻어 보고자 하였던 소망바구니를 헌금을 꺼내면서 주머니에 도로 접어 넣었다.
설교가 끝나고 광고시간에 김동석 부부가 귀국한다고 하였다. 강대상 앞으로 작별인사를 위해 나와선 두 부부와 어린 아이를 위해 모두들 송가를 불렀다. 대부분 귀국하거나 다른 나라로 가게 되면 어느 대학 혹은 어느 직장으로 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김동석 부부에 대해선 그저 귀국한다는 말 밖에 없었다. 아마도 경제형편이 좋지 않아 귀국하는 것이라고 신기수는 확신했다. 몇 달 전 그룹모임에서 조금 젖은 기저귀를 왜 말려 쓰지 않고 버렸냐고 자신의 아내를 나무랐다고 고해하며 울먹이던 김동석의 처연한 모습이 떠올랐다. 가는 사람 남는 사람 다 같이 울어버린 예배가 끝난 후 같은 학번으로 삼성의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정영근 차장과 점심식탁에 같이 앉았다. 그때 한 아가씨가 미소를 살랑살랑 지으며 그들 곁으로 다가섰다.
“정영근 차장님, 안녕하세요! 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앉지, 보현 씨!”
“아녜요. 그 말씀하신 것이 다 준비되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럼 내일 우리 사무실로 들르면 좋겠는데.”
“네, 그럼 오후쯤에 들리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디자인 문제로 삼성에서 뭔가를 의뢰받은 그녀는 자신의 출세가 정차장에게 달린 마냥 아주 사근사근하고 공손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작년에 자신에게 아저씨라고 호칭하였을 때, 아저씨가 뭐냐고 그가 쏴 붙인 아가씨였다.
‘하긴, 영근이는 차장이라는 직함이라도 있지. 내가 뭐 교수인가 사장인가, 아무것도 아닌데. 집사라는 호칭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마음 한번 추슬러 볼 희망으로 갔던 교회를 뒤로 하는 신기수는 가족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차에서 아이들과 노래를 부르며 귀갓길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교회에 다니지 말까 고민하였다.


쌀이 다 떨어졌다고 하는 아내의 말에 신기수는 아이들과 다 같이 슈퍼마켓에 가자고 제의를 했다. 지난주에 번 돈으로 돼지갈비를 먹자고 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벌금고지서를 생각하다가 결국 아무 장도 보지 못한 것이 아이들에게 미안했던 것이다. 신기수는 슈퍼에 가면 아내가 장을 보는 동안 주로 전자제품과 성악연주 CD와 오페라 DVD 코너에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고르다 고르다 하릴없이 아내를 찾아 그냥 돌아설 때가 대부분이었다. 아내는 열심히 가격을 비교하며 가장 싼 것이나 할인을 해 주는 품목을 고르고 있었다.
“그 고기는 푹 끓여먹자.”
30%나 할인해 주는 고기를 집어든 아내에게 신기수는 한마디 툭 던졌다. 할인해 주는 고기는 어디가 상했을 지도 모르니 잘 알아서 하라는 남편의 의도를 아는 아내는 피식 웃기만 하였다.
“미라 아빠, 어떤 치약을 살까요?”
이번에는 아내가 먼저 물었다.
“싼 것 살까요, 아니면 전에 쓰던 AZ 치약회사 상표를 살까요?”
신기수는 싼 치약을 썼을 때 입안이 개운하지 않은 느낌이어서 AZ를 사고 싶었으나 가격차가 두 배나 나자 망설였다. 비싸지만 사서 1cm 씩 짜서 쓰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고민하는 자신이 미워서 아내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냥, 알아서 아무거나 사!”
순간 얼어버린 아내의 옆모습을 피해 돌아설 때, 큰 딸 미라가 그를 나무랐다.
“아빠, 사람들도 많은데 왜 그러세요.”
흘깃 처다 보는 이태리사람들의 눈길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듯이 행동했지만, 미라의 나무람이 돈 문제와 결부되었다고 생각되니 수치심이 등을 핥고 지나갔다.
장보는 것이 끝나자 신기수는 겸연쩍은 마음에 옆에 있는 대형스포츠백화점인 데카슬론에 가자고 하였다. 도원이가 지난 토요일 축구클럽에서 축구를 할 때 옆이 약간 찢어진 자신의 축구화를 보고 창피해 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새 축구화를 사줄 요량이었다.
“도원아, 너는 계속 발이 크고 있으니 너무 비싼 것 사지 말아라!”
신기수는 부드럽게 말했으나, 계속해서 카카의 사인이 든 200 유로짜리 나이키 제품만 만지작거리는 아들이 못 마땅하였다.
“아빠, 축구부 친구들은 다 이런 신발 신고 있어요.”
도원이는 하소연 하듯이 토해 내었다.
“네가 다 크면 정말 좋은 축구화 사줄게. 그리고 어린이는 그런 비싼 것 신는 것이 좋은 게 아니야. 또 축구화가 좋다고 축구를 잘 하는 것도 아니잖아. 너는 나이키 신발이 아니었는데도 이번 시즌에 득점왕을 했잖아.”
신기수가 그렇게 설득을 했지만, 도원이는 시무룩하기만 하였다.
“도원아, 아빠가 충분히 설명했으니 이제 네가 알아서 해라!”
신기수는 은근한 강요를 해 놓고 아내와 미라가 있는 곳으로 갔다. 둘은 댄스복 코너에서 밝고 즐거운 눈길을 나누고 있었다. 무용을 좋아해 재즈댄스학교에 다니고 있는 미라는 비욘세 풍의 Freddy 스포츠 및 댄스 의상 상표 댄스복을 무척 갖고 싶어 하였다.
“이것 살려고 하니?”
신기수는 불안한 생각을 간신히 떨쳐버리며 물었다.
“음… 아녜요. 다른 것 입으면 되요.”
이미 알 것을 다 아는 딸 미라는 아쉬운 눈길을 거두며 들었던 댄스복을 다시 걸어놓았다. 계속해서 아이쇼핑을 하는 그들에게 도원이가 합류한 것은 30분이 훨씬 지나서였다. 도원이는 가격이 좀 싼 나이키 축구화를 들고 왔다. 신기수는 가격을 보고 안도했지만, 어린 녀석이 30분 동안 고민 고민 하다가 결국 아빠를 생각해서 비싼 것을 고르지 못한 것에 가슴이 아팠다.
미라와 도원이는 각각 학교와 클럽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자 한국인이라 외모가 눈에 튀었다. 그것을 잘 아는 아이들은 가끔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태리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교육을 받았지만, 외모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부터 이태리 친구들과 동질감을 못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과 동 떨어지는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하며 적어도 같은 유의 옷이나 신발 그리고 악세서리 등을 착용하면서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아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사주지 못한 신기수는 젤라또(gelato) 이태리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려 아내와 아이들에게 젤라또를 하나씩 사주면서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삭혔다.
차에 오르자 운전 때문에 젤라또를 먹을 수 없다고 자신의 몫을 사지 않은 신기수에게 아이들은 서로서로 한 입 드세요 라고 하며 자신들의 젤라또를 내 밀었다.
‘내가 정말 가난하여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난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서러운 것인가?’
젤라또의 향긋하고 시원한 맛이 목까지 적실 때, 신기수는 상념에 젖었다.


7월 중순이 되었다. 밀라노의 날씨는 더욱 열기를 뿜어냈다.
미라와 도원은 먼저 내려가는 루이지의 아내와 그의 두 딸과 함께 시칠리아로 갔다. 한 달 동안 지중해에서 새까매지도록 놀다 올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렇게나마 행복감을 선사할 수 있다는 기쁨과 가장으로서의 존재감을 만끽하는 오후에 강영훈이 전화를 했다.
“기수야,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것을 먼저 말할까?”
좋은 소식이라는 말은 귓전에서 흘러가버리고 나쁜 소식이라는 말이 그의 머리를 띵하게 하였다. 신기수는 이제는 나쁜 소식이 하찮은 것일지라도, 듣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 맥이 빠져버리고 나락으로 서서히 낙하하는 공포심에 떨었다. 그의 체념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차라리 나쁜 소식을 먼저 듣자.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데…….”
“야. 너 운 튼 줄 알아라.”
신기수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였으나 발동되는 호기심으로 다음 말에 조바심쳤다.
“몬팔코네(Monfalcone) 이태리와 슬로베니아 국경근처에 있는 작은 도시 성악콘서트에 다른 테너가 캐스팅된 것이 나쁜 소식이지만, 목원대학에서 테너강사를 찾는다고 연락이 왔다. 이낙중 선생님 알지? 그 분이 너의 이력이면 충분할 거라고 하면서 네 연락처를 물어오셨어. 아마 근간 너한테 연락이 갈 거야.“
단발성 캐스팅보다 대학의 강사자리가 더 낫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은 강영훈에게 신기수는 수고했다는 말과 고맙다는 말을 하며 이낙중 선생을 떠 올렸다. 같은 대학 성악과 한참 선배였던 이낙중 선생은 신기수가 유학을 나온 지 2년 만에 대학 강사로 임명되어 귀국했었다. 자상한 성격에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던 이낙중 선생은 2년 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중앙 콩쿨에서 2등을 한 신기수에게 은근한 시기도 보이지 않았고 군기도 잡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었다. 그 보답으로 이낙중 선생이 귀국독창회에 쓸 이태리 옛 가곡을 번역해 주었었다. 그 후 흘러가는 세월 속에 이어지지 않았던 교류가 이렇게 신비하게 되살아났다. 이낙중 선생은 이제 그 대학 성악과의 중요한 위치에 있기에 그 분이 OK하면 신기수의 강사자리는 거의 따 놓은 당상이나 진배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사가 된다고 하여도 나이 사십에 그 강사수입으로 네 식구가 생활하기는 불가능하고, 결국 개인레슨을 뛰어서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한국 한쪽 조그만 곳에서 강사직과 개인레슨을 하게 되면, 대형무대를 그리던 그의 웅대한 연주가로서의 포부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더구나 이태리에서 태어나 각각 11년과 14년 동안 자라난 아이들은 어쩔 것이며, 16년간 고행이라면 고행, 수행이라면 수행이었던 그의 삶의 결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부하던 지방대 강사자리였는데 막상 제의가 들어온다니까 마음이 흔들렸다. 판단이 혼돈으로 바뀌자, 그는 일단 연락이 오고 일이 진행될 때까지 생각을 보류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아내에게는 당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잘 하지 않던 외출로부터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 온 아내와 별 말없이 저녁을 끝냈다. 아이들이 없으니 이른 저녁을 끝낸 신기수는 안방으로 가 TV를 켰다. 할 말을 감추려하니까, 할 다른 말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피아노를 열더니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다. 평소 저녁에는 잘 안치던 아내가 이번에는 쇼팽,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바하 등 쉬지 않고 쳐 대었다. 곡곡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연주하였다. 다시는 피아노를 안 칠 사람처럼 신들린 연주를 하는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녀가 피아니스트의 길을 포기한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아내가 아파트관리규정에 적힌 저녁 8시가 다 되서야 피아노를 덮었을 때, 그는 저녁 8시 뉴스 시그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저녁 뉴스가 흐른다. 나폴리 해변가에서 시체를 옆에 두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과 물장구를 치는 어린 아이들의 화면이 잡힌다. 아침에 해수욕을 나왔던 75세의 이 사람은 어린이도 빠져 죽지 않을 얕은 물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으나, 아무도 이 사람의 주검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결국 한 젊은이가 주검을 해안가로 끌어내 뉜 다음 수건을 덮고 파라솔로 한 쪽을 가렸지만, 경찰이 오기 전까지 해변가의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그 주검에 대한 시선을 피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해수욕을 즐겼다.
늦저녁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가 진행된다. 비비원숭이 무리가 보이고 다른 한 쪽에는 암표범 한 마리가 먹이를 찾고 있다. 한 마리의 비비원숭이가 힘들게 움직이고 있자, 암표범이 쏜살같이 달려들어 물어죽이고 끌고 간다. 끌려가는 비비원숭이의 아래쪽에서 탯줄로 연결된 새끼가 달려있다. 자기가 사는 나무에 먹이를 올려놓은 암표범은 갓 태어난 비비원숭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런데 잡아먹지 않고 그 새끼를 물어다가 나무 위에 올려놓고 혀로 핥아주며 모성애를 발휘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결국 간밤의 추위에 견디지 못한 비비원숭이 새끼가 죽자, 암표범은 그것을 한 쪽으로 버리고나서 전날 사냥하여 잡은 어미 비비원숭이를 자신의 보금자리고 끌고 간다.’
비몽사몽간에 신기수는 그날 밤 자신은 차라리 한 마리의 표범, 아니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고 확신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간밤에 일찍 잠에 들었기 때문인지 신기수는 일찍 일어났다. 아내가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아이들 방에서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 할 일이 없는 이태리 여름의 아침은 빛나는 태양도 희망이 되지 못 하였다. 오히려 그것은 수치심을 밝혀 줄 뿐이었다. 그는 이럴 때마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처자식으로부터, 부모로부터, 현실로부터, 모든 속박과 책임과 의무와 가식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그 세계를 소리 질러 노래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산에서 바다에서. 그러나 불가항력에 체념하면서, 신기수는 그래도 하나의 구원자를 막연히 기대해 왔었다. 단테에게 있었던 베아트리체와 같은 그런 구원자를.
불과 몇 달 전까지 신기수에게는 고정희라는 구원자가 있었다.
2007년 6월 초에 열렸던 떼아트로 챡(Teatro Ciak) 밀라노에 있는 공연극장 의 아리아 음악회의 연주자들 중 테너로 선정되었던 신기수는 무대 디자인를 담당하던 고정희와 처음 알게 되었다. 그녀는 밀라노 브레라(Brera)국립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었다. 빼어난 외모는 아니지만, 늘씬한 몸매에 잘 어울리는 화장과 의상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흘릴 듯 말 듯 한 입술의 미소는 묘한 매력을 풍겼다. 게다가 상냥하고 쾌활한 성격과 재치 있는 솜씨로 모든 스텝진들로 부터 호감을 받던 그녀는 신기수가 준비한 곡 풋치니의 ‘E lucevan le stelle (별은 빛나건만)’에 무척 매료되어 있었다. 연주자와 스텝진 중 신기수와 고정희만 유일하게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종종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연습이 늦게 끝나던 날, 집으로 가는 방향이 비슷하여 신기수는 고정희를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게 되었다.
“고정희 씨, 밤늦게까지 피곤하시죠?“
나란히 앉아 달리다 보니 좀 어색한 느낌이라 분위기를 풀고자 신기수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뇨, 저희 노가다 하는 사람들은 밤샘을 잘 해요. 오히려 신기수씨가 노래연습을 하느라고 더 피곤하시겠어요.”
고정희는 대화를 기다렸다는 듯 풀어댔다. 그러나 밤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리 제법 차분하였다.
“저희 성악하는 사람들 역시 밤에 연주를 하기 때문에 야행성입니다. 밤에 컨디션이 좋아야 하죠.”
“그런데 신기수씨가 부르는 노래는 정말 감동적이에요. 정말 잘 부르세요.”
“곡도 좋고 가사도 시적이라 그런 것이죠. 전 고음에 무리가 있고 저음에 불안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서로 크게 웃었다. 그로 인하여 둘의 사이가 많이 풀어졌다.
“그래도 밤늦게 들어가면 가족들이 섭섭해 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용기를 내어 물었는지 앞을 가만히 응시하며 느닷없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신기수는 이것이 질문인지 독백인지 분간을 하기 어려워 잠시 머뭇거리며 신호등만 바라보았다.
“아이가 몇 이세요?”
고정희는 얼굴을 그에게 돌리며 물었다.
“둘입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아이들이랑 참 재미있겠네요.“
“재미는요, 매일 다투고 해서 정신없어요. 그건 그렇고 저야 남자지만, 고정희씨가 더 문제 아니겠어요, 더 늦게 들어가면.”
“아, 저 지금 혼자 있어서 괜찮아요.”
“가족은 다 어디계세요.“
신기수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남편은 한국에 있고요, 아이는 없어요.”
“일 때문에 가셨나보죠?”
밀라노에서 남편이 한국에 갔다고 하면 그것은 사업차 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뇨 일 때문이 아니라… 유학생인데요… 건축공부해요.”
“아, 네.”
뭔가 이야기를 하려다 마는듯하게 이어지는 고정희의 말에 신기수는 건성으로 응답하였다. 그러다가 그녀가 그를 보며 입술을 움찔하는 순간 그는 여기가 집이냐고 물었다.
밀라노 위성도시로 지하철 1호선의 종점인 세스또 산 조반니(Sesto San Giovanni)역은 늦은 시간에도 귀갓길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고정희는 자신을 위해 차 문을 열어준 신기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아파트 정문을 열쇠로 열었다.
“전, 맨 위층 8층에 살아요.”
평상시로 돌아온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에 싱긋 웃으면서 신기수는 맨 위층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수고했다고 인사는 하였지만, 그녀가 승강기를 타고 8층까지 올라갔을 시간이 되었을 때에서야 차에 올라탔다.
이틀 뒤 리허설을 하던 날, 무대장치의 점검을 마친 고정희는 신기수에게 다가와 무성한 꽃송이가 수놓인, 희미한 핑크빛이 배어든 하얀 행거치프를 건네었다. 그녀는 그에게 연주하는 날 그것을 연미복의 가슴주머니에 코디하라고 하면서 그 꽃이 6월에 피는 라일락꽃이라고 하였다. 다음날 무대에 선 신기수는 애인에게 받은 듯 희희낙락해 하며 그 행거치프를 파바롯티처럼 손에 들고 노래할까 한번 망설여 보았다. 연주회가 끝난 다음 고정희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아내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 멀리 아쉬운 눈인사만 하고 말았다.
그해 가을로 접어들 무렵 신기수는 밀라노 아우디토리움 극장의 합창단원에서 나와야 했다. 경기가 안 좋으면 문화 분야에서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인지, 그는 계약갱신을 하지 못하였다. 갑자기 벌이가 없어진 신기수는 아내의 얼마 안 되는 수입과 처갓집으로부터 받은 약간의 송금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누구에겐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지만, 부끄러운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어떤 결단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성악의 길을 잠시 접고 가족의 미래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는 옷장을 열어 연미복을 한번 쓰다듬어 보았다. 그는 라일락꽃의 수가 놓인 그 행거치프를 보고 잠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는 고정희의 남편이 벌써 한국에 간지 1년이 넘었고 거의 이혼상태라는 것을 음악회가 끝난 뒤에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가 참 특별한 여자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컴퓨터를 켜고 백과사전을 열었다. 그는 하얀 라일락꽃의 의미가 ‘사랑의 감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휴대전화에 입력되었던 고정희의 이름을 찾아 그녀에게 전화를 하였다. 벨이 5번 울렸을 때 그는 숨이 가빠져서 전화를 끊어 버리려고 하였다. 그때 수화기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기수씨가 웬일이세요?”
그녀의 시원한 인사말에 오히려 당황한 그는 지난 번 음악회를 녹화한 DVD를 아직 잊고서 전해주지 못하여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녀는 작품제작이 있어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아무 때고 시간이 되면 갖다 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 다음날 오후 5시경 신기수는 녹화 DVD를 들고 고정희의 집을 찾아가면서 ‘이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와 그리고 테너가 있다.’ 라는 농담을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성격이 괴팍하고 바람기가 있는 테너인지 아니면 진정한 테너가 되기 위해서는 괴팍한 성격과 바람기를 획득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디자인하는 사람의 집답지 않게 잘 정돈된 아담한 거실에는 향기로운 비누냄새가 은은히 배어있었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식탁 앞에 앉은 고정희는 그 날 음악회가 너무 좋았다며 다시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DVD를 돌렸지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모르는 신기수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며 건성으로 보고 말하고 있었다. 오히려 어색함을 해소하려고 하다가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남편 되시는 분은 언제 오시나요?”
멍청한 질문을 했다고 자책하는 신기수에게 고정희는 남의 말 하듯이 답하였다.
“안 올지도 몰라요. 제가 싫다고 가버렸거든요.”
신기수는 뜻밖의 우문현답에 말을 잃었다. 그저 화면만 응시하고 있는데 고정희는 말을 이었다.
“사실 어제가 제가 사랑했던 사람이 죽은 날 이예요.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죠. 전 그 이후 아무도 사랑할 것 같지 않았는데, 지금의 법적 남편과 만나 결혼하고 유학을 하게 되었죠. 그런데, 유학 온지 1년이 좀 넘었을 때 남편이 제가 죽은 그 사람과의 과거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심히 고민하다가 한국으로 가버렸어요. 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지금은 초연한 상태가 되었죠. 사랑이란 것에 의문도 갖게 되고요.”
결혼한 지 15년이 되었고 처자식이 있지만, 때때로 젊은 시절의 청춘을 회고하며 누군가 함께 밤새 예술과 사랑을 토로하고 싶었던 신기수는 동반자를 만난 느낌이었다. 그 때처럼 삶이 어려운 적이 없었던 그는 현실에서 일탈하고 싶은 욕망에 휘감겨 있었기에 그녀의 고백에 빠져들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먼저 용기를 내었다.
“토스카가 여가수이고 카바라도씨가 화가잖아요. 그런데 노래를 듣고 있는 신기수씨가 지금 가수고 제가 화가이니 참 재미있네요.”
유학을 오기 전에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다는 고정희는 푸치니의 토스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수도 잘 놓으시잖아요?”
신기수가 의도적으로 물었다.
“아, 그 행커치프요! 토스카의 이름인 플로리아가 꽃이라는 뜻이라, 신기수씨의 노래에 맞을 것 같아서”
신기수의 유도심문에 넘어간 고정희는 그 수를 자신이 놓은 것이라고 고백한 꼴이 되었다.
이번에는 신기수가 용기를 내어 곧바로 응수하였다.
“흰 라일락의 꽃말은 그런데 ‘사랑의 감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죠?”
고정희는 말없이 신기수를 바라보았다. 신기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그녀가 그의 등을 안자 그는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나는 향이 라일락 향이라고 믿었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기수는 고정희가 그의 곁에 누워서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기수씨가 사실 옛날 그 남자와 여러 모로 닮았어요.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랐거든요. 나를 집에까지 바래다주던 날, 집에 올라와서 아래를 보니, 기수씨가 아직 가지 않고 위를 올려다보는 것을 봤죠. 그 순간 기수씨가 언젠가 나의 집에 들어올 것이라고 예감했었죠.”
집으로 돌아 온 신기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상하리만큼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였다. 무언가 미안한 감정은 있지만, 윤리적인 죄책감은 물론 양심을 속였다는 자괴감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위해 한 동안 고민하였다. 그리고 사랑은 정형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사랑은 정형이 아니다. 사랑은 논리도 아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감각적인 것도 아니다.
어떠한 사랑도 아름다울 수 있고 어떠한 사랑도 추할 수 있다. 윤리를 기준으로 선악을 규정하는 사랑은 너무나 제한된 보편적인 사랑일 뿐이며, 사람 각자의 내부에서 피어나는 절대적인 사랑을 비교 정의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을 말살하는 것이다. 물이 담긴 그릇에 따라 물의 모양과 물의 맛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듯이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 마음이라는 그릇에 따라 다른 어느 하나와도 똑같지 않은 그들만의 사랑의 정의를 만들어 간다.’
신기수는 냉정한 현실을 끝없이 극복해야 나아가야 하는 가장으로서 이런 종류의 정신적 공간이 필요할 수 있다고 합리화 하였다. 그리고 고정희와의 아슬아슬한 만남 속에 서로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비밀스런 세계를 따로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비밀스런 세계는 올해 3월 고정희가 취직과 함께 그녀의 남편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막을 내렸다. 그녀의 남편은 이태리에서 건축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자 고정희의 과거를 핑계로 귀국한 것이었다. 용서를 구한 남편을 받아들인 고정희가 한국으로 떠나던 날 신기수는 리나떼(Linate) 공항 쪽을 향한 채 자신의 빈 가슴처럼 뻥 뚫린 하늘을 끝없이 응시하며 ‘사랑하는 만큼 줄 수 없고 사랑하는 만큼 받을 수 없는 우리사이’라고 한 그녀의 고백을 가슴에 주어 담았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부스스한 얼굴로 아내가 전화를 받으라고 하였다. 그 소리에 현실로 돌아 온 그는 시계를 보니 8시가 채 안 되었다. 이른 아침에 오는 전화치고 반가운 것은 하나도 없었다.
“기수야, 나 지금 한국에 가야한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단다.”
강영훈의 말에 신기수는 말을 잃었다.
“아니, 어떻게… 건강하시다더니…….”
“급성 심장마비라고 형님이 그러시더라.”
“…….”
“부탁이 있는데, 아젠찌아 아르떼 오페라(Agenzia Arte Opera) 성악에이전트회사 이름에서 올 연락이 있는데 너한테 하라고 해 둘 테니 나중에 연락 좀 부탁한다.”
전화를 끊은 신기수는 유학사회에서 가끔 발생하는 부친상이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일어났다는 사실에 무력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러시안 룰렛의 부친상이라는 운명의 탄환이 다른 이에게 발사되면, 신기수는 운명의 탄환이 이번에도 자신을 피했구나 하는 얄미운 안도감 속에 안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기수는 부모님께 자립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하루빨리 자리 잡아 부모님께 효를 다해야겠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외국에서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삶은 부모님께 용돈 한번 제대로 드리지 못하는 불효만 낳게 하였다. 장인과 장모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사위 덕 하나 누리지 못 하는 자신의 부모님께 아내 역시 송구한 마음 극심했을 것이다.
“장인, 장모님은 건강하시데?”
아내를 위한다고 모처럼 한 말인데, 너무 남의 말 하듯이 해버리고 말았다.
아내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결국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해요. 큰딸 하나 믿고 사셨는데, 난 외국에 와서 살고 있고. 의지할 곳도 없는데, 용돈 한번 보태드리지 못하고 연락도 제때 못하고…….”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아내는 흐느끼느라고 말이 자꾸 끊겼다.
“그래도 못 산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미라 아빠가 곧 좋은 무대에 설 것이라고 해 왔는데,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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