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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영주권 장사(Immigration Merchant) : [캐나다/임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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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6,457회 작성일 10-04-30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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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강형! 또 만났네! 자넨 참 부지런하군! 장사 잘 하는 비결 중 하나는 말야, 홀세일(Wholesale)에 자주 다니는 거야. 알겠어?
예. 그렇다고 들었어요. 그러나.영주권 장사(Immigration Merchant)


좌우지간 반갑네 그려!
토니는 이제 두 번째 만나는 강완규를 도매상에서 만나자 반가워한다. 왠지 모르게 그에게 호감이 가고 있다.
오늘은 토요일이라 NG 도매상은 오후 2시에 문을 닫는다. 늦기 전에 가서 빠진 담배들을 꼭 사와야 한다는 마누라의 성화에 못 이겨 쫓기듯 도매상에 온 토니이다. 담배 15카톤 사려고 20킬로 길 오십 리 시골길을 달려온 것이다.
요즘 이라크 전쟁의 여파와 그놈의 사스(SARS) 때문인지 아니면 농촌지역이라 춘궁기인지 장사가 형편없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담배 도매 가격마저 올랐으니.
강형! 요즘 장사 형편 없지? 안 그래?
저야 뭐 아나요? 아직도 뭐가 뭔지 정신 못 차리겠어요.
하긴 그럴 거야. 가게 인수받은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으니.
선생님이 좀 많이 가르쳐 주셨으면 해요.
캐나다에 온 이래 누구 하나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고 완규는 생각한다. 그런데 구엘프(Guelph)로 가게 사서 온 뒤 얼마 안 돼 토니 정춘성을 우연히 만났다. 이상하게도 그와는 초면부터 서로 스스럼없이 얘기하게 됐다.
토니 씨는 말이 좀 많은 게 마땅치 않지만 그 대신 말을 무척 빨리 한다. 말이 느릿느릿한 사람 중에 사기꾼이 많다고 들은 바 있는 완규이다.
그게 어느 정도 맞는 얘기라면 토니 영감은 속임수를 쓰거나 할 것 같지는 않다. 서울에서 16년간 직장에 다녔던 완규이다. 그 자신은 웬만큼 사람 보는 눈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조금 괴팍한 면이 있어 보이는 정춘성 씨에게서 왠지 모르게 큰형님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됐다.


강형! 강형은 영어 이름이 뭐지?
도매상 바로 앞 커피숍에서 마주 앉은 그들이다.
예, 켄(Ken)이라고 했어요. 켄은 케네스(Kenneth)의 준말이며 애칭이라지요?
그렇지! 켄캉(Ken Kang) 씨이군! 이름 멋진데! 이름이란 건 부르기 쉽고 듣기에 좋아야 돼. 그리고 또 기억하기 편해야지. 그런데 강형은 캉캉(Cancan) 춤 잘 추나 보군 그래!
캉캉 춤을요? 아니에요. 전 전혀 춤과는 거리가.
켄은 대답하다가 말을 멈춘다. 토니가 농담한 걸 알아차렸다.
아니, 선생님도! 저는 켄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어 쓰고 있어요.
그래! 자네에게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일세! 그리고 코리아를 뜻하는 케이(K)자가 두 개나 되잖아! 앞으로 켄으로 불러도 되지?
그럼요! 선생님!
어이, 켄! 제발 그 선생님 소리 좀 빼게나! 듣기 참 거북하네. 초면도 아닌데 말야. 그리고 내가 언제 선생 자격증 땄다고 했나? 하하하!
환갑이 낼 모레라고 하고 다니는 토니 정춘성이다. 그런데 지금 별로 우습지도 않은 유머 해 놓고서 자기가 좋아 혼자 웃어댄다.
그럼 정 선생님을 어떻게 부를까요?
응, 객지 벗 10년이라 했어! 그리고 자네와 나는 같은 돼지띠, 띠동갑이 아닌가? 우리 말 놓고 지내자구!
그건 곤란한데요. 저보다 12년이나 위이신데.
그럼 자넨 나를 어떻게 불러야 마음이 편하겠나?
저어, 그 선배님!이 좋겠는데요. 어때요?
그것 참! 요즘 세상은 나이 먹은 게 절대로 자랑이 아니라네! 나이 좀 들었으면 그 나이 값을 해야 하는 건데 말야. 주책 빠진 늙은이들이 너무도 많아! 우선 나부터 말야! 안 그래, 켄?
아니, 선배님도! 무슨 그런 말씀을.
좋아! 내가 자네보다 나이 더 먹었다는 건 말야, 그만큼 내가 죄를 더 많이 지었다는 뜻이야! 남들에게 못할 짓 많이 했다는 거야. 내 말 알겠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지 않겠어요? 좋은 일 많이 하셨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닐세! 난 나를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선배님! 가게 사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토니가 심각해지는 걸 보고 켄은 얼른 화제를 바꾼다.
내가 보기엔 그 가게 잘 샀어. 어느 가게이고 약점이나 마음에 흡족치 못한 점 없는 가게가 없는 거 아니겠어?
그야 물론이지요. 저희도 무척 망설였어요. 더욱이 처음 구입하는 비즈니스(Business)이기 때문에 말예요.
그랬을 거야. 가게나 집이나 젊은 남녀가 시집, 장가가는 것과 비유될 수 있어. 어디 백점짜리가 있겠어? 어지간 하면 결단을 내려야 해. 안 그렇겠어? 미적미적 망설이다가 아까운 세월 허송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어.
그런 것 같아요. 저야 뭐 가져온 돈이 얼마 안 되지만 돈 많이 가지고 온 사람들은 2, 3년씩 놀고 있다 해요.
켄이 맞장구친다.
그것 참 안타깝고도 한심한 일이지. 사내가 뚜렷이 할 일이 없어 가지구 말야. 아이들 등하교 운전이나 해 주고 낮에는 골프나 치고 있다면 그 녀석은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허송세월 하는 게 아니겠어?
맞는 말씀이에요. 하루 놀고 다음 날엔 쉬는 생활 하다 보면 사는 재미가 없을 것 같아요.
놀기만 하면 건강도 엉망이 될 거야. 그리고 또 특히 밤에 마누라 옆에 가기도 흥이 안 날 거구. 안 그렇겠어?
그럼요! 삶에 의욕이 떨어지면 모든 게 다 제대로 안 될 거예요.
그건 그래! 그래서 나는 열심히 일하고 또 화끈하게 노는 게 장수의 비결이라고 생각해. 섹스도 좀 요란뻑적하게 즐기고 말야!
왜, 그런 말이 있지요? 밤일이 시원치 못한 남자는 낮일도 형편이 없다구.
응. 고개 숙인 남자! 말이군. 무슨 일이든 열성적으로 하는 사내가 마누라를 해피(Happy)하게 해 줄 수 있는 이치야. 그리고 말야. 이건 다른 얘기인데, 가게는 그 위치가 무척이나 중요하다고들 하지?
이번에는 토니가 화제를 바꾼다.
예, 부동산의 가치를 평가하는 3대 기준을 첫째, 로케이션(Location), 둘째도 로케이션 그리고 셋째도 로케이션이라 한다고 들었어요.
그렇다고들 하지. 그런데 말야. 그건 주택이나 투자용 커머셜빌딩(Commercial Building)을 주로 얘기라는 거라고 봐. 사업체는 말야. 특히 편의점은 위치도 무척이나 중요하지만 또한 어느 누가 어떻게 장사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해.
그런가요?
켄이 미심쩍어한다.
그렇다니까! 내 친구 하나는 말야. 시골 동네에 가게가 있다가 망해 나간 빈 가게자리를 얻어 가게를 셋업(Set-Up)했어. 그런데 지난 겨울 주매상이 1만 불 선이라 하더군. 6/49 복권도 없는데 말야.
그런 경우도 있군요! 선배님! 그런데 요즘은 가게 셋업해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 세상에 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더욱이 가게 셋업은 모든 게 제로(Zero)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경영학에서 얘기하는 브레이크 이븐 포인트(Break-Even Point), 즉 손익분기점, 수익성 있는 매상 수준에 도달하기까지는 너무 힘들어.
그런데 선배님! 선배님도 지금 하시는 가게 셋업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렇지요?
응, 오래 전에 비디오 가게 3개 셋업했었고, 또 지난 4년 동안에 가게 4개 내 손으로 문 열었지.
가게를 4개나요? 참 대단하십니다. 그럼 돈 좀 벌으셨겠네요?
켄이 놀라워한다.
돈은 무슨 돈! 그저 겨우겨우 꾸려 가고 있어. 얼마 전 인컴 택스(Income Tax) 보고할 적에 따져 보니 말야, 크레디트 카드(Credit Card) 빚 총액이 7만2천 불이더라구! 그리고 또 은행융자 3만 불과 또 사채가 3만 불이 있더군.
아니, 왜 그렇지요?
응, 4년 전에 꾸민 첫 번째 가게는 친척에게 그냥 양도했고 두 번째는 문 닫았지. 지금은 2개 갖고 있는데 하나는 매니지먼트 콘트랙(Management Contract) 맺고 젊은 부부에게 맡겼어.
그럼 그 가게들은 잘 되나요?
그저 그래! 요즘 장사 잘 되는 가게가 어디 있겠어? 그저 겨우 꾸려 가고들 있지. 그렇지만 문 닫을 정도는 아니니까 참 다행이지. 안 그렇겠어?
참! 대단하십니다. 4년 동안에 가게 4개나 만드셨으니.
뭐, 응, 그저 일 속에 파묻혀 살았지. 그리고 우리 준이 엄마가 참 고생 많이 했어. 지금도 일벌레처럼 일하고 있다네!
그래서 내조가 무척 중요하지 않겠어요?
그래! 그래서 말야. 내, 이런 생각을 해 본 적 있지. 왜, 그 사람 팔자 시간 문제!라는 말이 있잖아? 나는 그보다는 사람 팔자는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봐.
그건.
켄이 머뭇거리자 토니는 얘기를 계속한다.
토니는 준이 엄마와 5년 전에 만났다 했다. 그녀는 준이 아빠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버린 뒤 14살짜리 외아들 준이를 데리고 캐나다로 왔다. 건장하던 46세의 한창 나이에 아린 자식과 아내를 두고 저 세상으로 훌쩍 가 버린 준이 아빠! 40대 남자의 사망률 세계 1위라는 한국!
준이 엄마는 사랑하는 남편을 졸지에 잃어버린 43세의 과부 신세가 돼 버린 것. 살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결국 토론토에 이민 와있는 친구의 권유로 무작정 캐나다로 왔다. 94년부터 시행된 한카 무비자 협정 덕에 그녀는 여권만 들고 왔다. 그 때만 해도 입국할 때 공항에서 이민관이 무조건 6개월 체류, 비지터 비자(Visitor Visa) 도장 찍어 주던 때였다.
준이 엄마는 살림살이 다 처분하고 여행가방 하나 들고 어린 아들 손잡고 이 낯설은 타국 땅에 온 것이다. 핸드백에 8천 불 넣어 온 게 그들 모자의 총 재산이란다. 정말 TV 연속 방송극에서나 볼 수 있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고 토니는 말한다.
그런 케이스가 제법 많다는 얘기 들은 적 있어요. 켄이 거든다.
그럴 거야. 과부가 됐거나 이혼했을 경우 서울에서는 여자가 혼자 살기가 좀 어렵지 않겠어? 특히 이혼 케이스는 말야. 아직도 이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한국 사람들일 터이니까 말야.
그래도 요즘 많이들 달라졌다는 것 같아요. 이혼율이 꽤 높아졌다니까요.
응, 내가 이혼 경력이 있다 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남녀간에 궁합이 맞지 않으면 하루라도 빨리 헤어져야 해!
그런데 선배님! 서울서는 대개가 경제권을 남편이 쥐고 있기 때문에 그 때문에 이혼을 못하고 눈물과 한숨, 서러움 속에서 사는 아내들이 상당수라 했어요.
그도 그럴 거야. 그런데 여기 캐나다는 혼자 사는 나이 든 여자들도 일해서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이혼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인지 디보스 레이트(Dirvorce Rate)가 50%쯤 된대.
이혼율이 50%라니요? 그건.
응, 2쌍의 커플(Couple)이 혼인신고 하는 그 순간에 1쌍의 부부가 이혼 서류에 사인(Sign)한다고 해.
그렇다면 말예요, 거 참 어려운데요. 이혼한 남녀가 또 재혼 할 게 아닌가요? 그거 계산이 복잡하게 되는데요.
켄! 그냥 넘어가자구! 우리가 무슨 박사학위 논문 쓸 것도 아니고. 그저 캐나다에선 이혼을 많이 한다고만 생각하자구. 오케이?
그러지요. 그런데 그 여자분은 어떻게 됐나요?
응! 그 얘기! 준이 엄마는 그 친구가 다니는 직장에서 만들어 보내 준 잡 오퍼(Job Offer) 한 장 들고 캐나다에 왔었대.
토니의 얘기이다. 그러나 그녀가 철석같이 믿고 온 잡 오퍼는 캐나다 정부에서 발행하는 워크 퍼미트(Work Permit)와는 무관한 종이 쪽지에 불과했다.
결국 일자리 못 찾고 방문비자 6개월 기한이 다 지나갔다. 그래서 목사님의 도움으로 6개월 체류연장 받았으나 살길이 막막할 뿐이었다. 그녀는 토론토 다운타운 근처의 빈민촌 동네에서 베출러 아파트(Bachelor Apartment)에서 살고 있었다. 그 싸구려 원룸 아파트도 친구가 보증을 서 주어 얻었다. 영주권도, 노동허가도 없는 40대 여인이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 갈 것인가?
중학교 1학년 때 온 준이는 학교에 갈 수 없어 학교 시간에는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어야 했다. 준이는 하교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다른 학생처럼 배낭을 메고 돌아다녔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준이! 나이 열세 살에 아버지를 잃고서 이 낯설은 토론토에 와서 학교도 못 다니는 준이! 어떤 사립학교에서는 스튜던트 비자(Student Visa)가 없어도 받아 준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럴 형편도 안 된다. 당장 아파트 값과 끼니를 걱정해야 한다.
그녀와 준이는 근처에 있는 한인 루터 교회에 다닌다. 목사님과 교인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또 목사님의 주선으로 한인사회봉사회라는 데서 쌀과 식료품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 처지인 경우 많이들 한국 식당이나 식품점에서 일한다고 그러던데요?
준이 엄마도 그런데서 일해 보려고 했대. 한인사회봉사회에서 일하는 분이 여기저기 알아보기도 해 주었대.
그래서 일자리 찾았나요?
켄이 흥미있어하며 묻는다.
만약 일자리를 구했더라면 나하고 결혼 안 했을지도 몰라. 여기 토론토에 영주권 없이 그냥 눌러 앉아 사는 동포들이 상당수라는 얘길 들었어.
소위 불법 체류자 말이죠?
응, 그런데 그게 우리 코리언들만 그런 게 아니야. 아무도 그 숫자를 파악 못하고 있지만 말야. 일리걸 이미그런트(Illegal Immigrant)가 몇십만 명이란 설이 있어. 좌우지간 준이 엄마는 말야.
토니가 하던 얘기 계속한다. 준이 엄마는 한국 음식점에서 웨이트리스(Waitress)로 일하려 해도 나이가 많다고 거절당했다. 하다 못해 주방에서 설거지라도 하겠다고 여러 군데 찾아갔으나 아무도 써 주지 않았다 했다.
아줌마 같은 분은 안 써요! 아줌마는 설거지 같은 일 못하게 생겼네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했다. 한번은 우리는 안경 쓴 사람은 안 써요.라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또 다른 데서는 아줌마, 몸이 약하게 보이네요! 했단다.
그거 참! 딱하게 됐네요. 그래서 어찌됐나요?
뭐 별 도리 있었겠어?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선배님!
응, 자넨 혹시 그런 얘기 들어 본 일 있나? 여자는 거울! 남자는 지갑!이라는 표현 말이야.
예에? 거울하고 지갑이라고요? 그게.
서울서 한때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재미있는 유행가가 유행했다며?
예, 그런 노래가 있었지요. 그런데 좀 유치하다 생각됐어요. 그런데요?
난 말야. 내가 글을 좀 쓸 줄 안다면 말야. 멋진 소설을 한 편 쓰겠어. 거울을 든 여자, 지갑 꺼내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선배님 한번 써 보시지 그래요! 그런데 줄거리는 대충 생각해놓으셨나요?
뭐, 그런 건 아니고 말야. 그저 그냥 그런 생각을 얼핏 해 보았을 뿐이야.
무슨 내용이신데요?
어디선가서 읽은 얘기인데 말야. 사람이 어떤 에머젼시 시츄에이션(Emergency Situation)에 처해 졌을 때 말야.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이 있다는 게야. 그런데 그 행동이 남녀간에 다르다 했어.
그럼 어떤 뜻하지 않은 위기상황에 부닥치면 남자와 여자는 각기 상이하게 대처한단 말씀이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간단한 예를 들자면 말야. 산골 호젓한 도로를 혼자서 운전해 가다가 갑자기 자동차가 고장이 났을 경우, 아니 쉽게 플랫 타이어(Flat Tire)가 됐다고 해 보자구.
알았어요! 그런 경우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핸드백에서 거울을 꺼내 자신의 용모를 가다듬는다! 이거죠?
맞았어? 정답이야! 그리고 남자는 맨 먼저 지갑을 꺼내 가진 돈을 확인해 볼 거구.
그것 참 재미있는 얘기인데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선배님!
그야 모르는 일이지. 그런데 왜, 응, 이 세상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직업이 바로 여성들이 섹스를 판다는 얘기도 있지 않아?
아니 선배님도! 그건 너무 하신 것 같은데요! 안 그래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켄이 큰일이나 난 듯 떠든다.
아니, 켄! 그게 뭐가 어때서? 우리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구! 그래 하이 스쿨(High School) 다녀야 할 아들 있는 과부가 캐나다에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취득하는 방법이 뭐 있겠어? 결혼하는 길밖에 없잖아?
그야 뭐. 영주권자나 시민권자하고 결혼하면 영주권 받게 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이! 켄! 다 좋다 이거야. 결혼 케이스는 말야. 빠르면 8개월, 늦어도 1년이면 영주권 받게 된다고 들었어. 그런데 문제는 누구와 결혼하는 거냐 말일세. 아무리 영주권 때문에 결혼한다 하지만 아무하고나 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토니가 갑자기 따지는 듯한 어조로 말한다.
그거 참! 난처하겠는데요! 영주권은 급하고 적당한 혼처는 나타나지 않고.
그러게 말야! 생각해 봐! 마흔이 넘고 자식까지 있는 중년 여인이야. 그녀에게는 결혼 상대자의 선택이 극히 제한돼 있을 게 아니야?
참 그렇겠네요! 남자의 나이도 그렇고.
그런 형편의 여성이라면 남자는 40대 후반이나 50대 초반이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그 나이에 혼자 사는 사내가 이 토론토 바닥에 얼마나 있겠어?
그건 그렇네요! 그리고 또 무척 중요한 점이 있겠는데요! 만일 어떤 40, 50대 남성이라면 그는 분명 아내가 세상을 떠난 위도워(Widower) 아니면 이혼남 아니겠어요?
켄이 신이 나는 듯 말한다.
으응, 자네도 그 점을 생각해 냈군! 맞아! 잘 보았어! 그래!
그렇지요. 홀아비 아니면 이혼한 케이스, 둘 중 하나이겠지요. 그 나이에 총각은 없을 터이니까요!
그래! 그래서 재혼이 참으로 어려운 거야! 처녀, 총각들이야 그저 폴 인 러브 앳 퍼스트 사잇(Fall in love at first sight) 하게 되면 우선 동거부터 시작하고 나서 나중에 결혼에 골인하기 쉬운데 말야. 재혼은 아무래도.
정말 그렇겠네요! 남자나 여자, 둘 다 자연 이것저것 따지게 되겠지요. 그 나이에 서로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져 서로를 죽도록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닐 거구 말예요.
그래서 참 어렵지 않겠어?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될 사항은 말이야. 상처하고서 홀아비가 된 경우는 좀 다르겠지만, 이혼 케이스는 문제가 있는 게 아니겠어?
하기야 결과적으로는 남녀가 함께 백년해로() 하자구 굳게 약속하고 나서 그 약속을 깨 버린 결과가 됐으니까요.
그래서 이혼한 남편과 아내 얘기를 듣기로 하면 서로가 상대방이 잘못한 거라구 비난할 거 아니겠어?
그야 뭐,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어요? 결국 사랑이 변해서 미움으로 변한 게 아니겠어요?
켄! 켄은 잘 모를 거야. 어느 순간 갑자기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게 절대로 아냐!
토니가 정색을 하며 말한다. 켄이 흠칫 놀란다.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토니가 말을 계속한다.
내 얘기 좀 들어 봐! 소위 말하는 사랑과 미움 사이에는 말야. 무관심이 있어. 영어로 아이 돈 케어(I dont care!) 하는 단계가 반드시 있게 돼! 알겠어.
그러면 그 무관심의 단계에서는 서로의 사랑이 식어 간다는 얘기이시네요?
그래! 쉬운 말로 정나미가 떨어지는 거지. 그런데 정이 떨어지고 사랑이 식었다 해서 곧 바로 디보스 페이퍼(Divorce Paper)에 사인(Sign)하는 건 아닐 거야.
그러면.
그 어떤 모멘트(Moment)가 와야만 가정이 깨지게 되지. 그 계기라는 건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
여기까지 말한 토니는 침울한 표정이 된다. 입을 꾹 담는다.
토니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보고서 켄은 이 양반도 이혼했었구나! 생각한다. 분위기가 어색하게 되자 켄은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아무려나, 그 연유가 어떻든 말야. 한 가정이 깨진다는 건 정말 커다란 비극이야. 너무도 괴로워.
토니가 나지막하게 말한다.
그럴 거예요. 당사자들이 겪는 아픔은 다른 사람들은 짐작도 하기 어려울 거 아니겠어요?
켄 역시 낮은 어조로 대꾸한다.
이보게나, 켄! 나는 말야. 그런 견디기 너무 힘든 과정을 두 번씩이나 겪었다네. 토니가 솔직히 털어놓는다.
예에! 두 번 이혼하셨다구요?
켄은 뜻밖이라는 듯 놀라한다.
그렇다네! 내 팔자도 참 기구하지. 어쩌다.
켄은 토니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말이 없다.
한참 후, 토니가 말을 계속한다.
켄! 나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던 게 틀림없어!
그럴 리가 있겠어요? 선배님이 처복이 별로 없었던가 보죠.
몰라! 내가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말야.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토니의 얘기는 계속된다. 준이 엄마는 다니던 교회 목사님과 권사님들의 권유와 소개로 결국은 재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재혼을 결심하고 나서 첫 번째로 선 본 남자가 바로 토니! 당시 만 50세의 두 번의 가정파탄을 겪은 이혼남,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 오히려 여기저기 빚만 잔뜩 지고 있는 사내이다. 물론 준이 엄마의 눈에 들 리 전혀 없는 가난뱅이 홀아비영감 중늙은이다.
켄! 홀아비 3년에 이가 서 말이란 말이 있잖아? 그 때 나는 빚만 걸머진 처지였으니 어느 여자가 좋다구 했겠어? 안 그래?
그래도요, 사람 하나만 괜찮다면 돈은 좀 없어도.
그럼 자네 생각엔 괜찮은 사람이 두 번씩이나 이혼할 것으로 보이나?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내 아니겠어?
그거야 그렇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켄은 말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켄! 내 털어놓고 말하는데, 준이 엄마와 만난 게 열 번째 선이었다네. 알겠어?
그랬었군요! 그럼 그 동안 적당한 분을 못 만나셨군요.
그랬지. 아냐, 그게 아니야. 내가 정말 첫눈에 반해 가지구 근 6개월간을 쫓아 다녔던 여인도 있었어.
그랬는데도.
켄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문다.
그래! 끝내 그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딱지 먹었다네!
토니는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말한다.
모르긴 하지만 그 분은 선배님과 연분이 안 닿았던가 보죠?
그럴 거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을 터인데 말야. 여자의 마음은 백 번 넘게 찍어대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가 봐.
그래서 옛말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아예 처음부터 단념해야 된다고 한 게 아닐까요? 선배님!
맞아! 옛 어른님들의 가르치심이 어느 하나 틀리는 게 없어. 그런데 말야. 내 맘에 쏙 드는 여인이 아예 처음부터 말도 못 붙이게 했다면 내가 일찍 체념하고 뒤돌아서 가 버렸을 터인데, 그게 아니었거든!
그럼 잡힐 듯 말 듯, 선배님 품에 안 길 듯 말 듯 했다는 말씀인가요?
그것 참! 자넨 어찌 그리 안 보고도 잘 아나! 정말 그런 상황이었어. 자넨 말야. 그 당시 내 뒤를 따라다니며 지켜본 듯이 얘기하는구만!
제가 뭘! 근 반 년간이나 교제했으면서도 인연이 맺어지지 않았다니까 하는 얘기이지요. 그래서 그 뒤론?
아무튼 난 혼자서 짝사랑만 하다가 브로큰 허트(Broken Heart) 신세가 돼 버렸던 거야.
그것 참! 여자 분들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가 없어요! 선배님처럼 좋으신 분을.
어이! 자네 뭘 먹고 싶어? 내가 술 한잔 살까? 거 듣던 중 기분 좋은 말인데! 하! 하! 하!
토니가 정말 기분이 좋아 어찌할 줄 몰라 한다. 너털웃음 웃는다.
한참을 웃고 나서 한 마디한다.
켄! 나를 치켜세워 줘 고마워! 쌩스 어 밀리언(Thanks a Million!)이네. 아이 오우 유 원(I owe you one!) 토니는 자신도 모르게 영어로 얘기한다.
아이 오유 완이라구요! 그게 무슨 뜻이지요?
응, 미안해! 어떤 때는 영어가 더 쉽게 나와서 말야. 30년 동안 영어 쓰는 나라에서 살았는데도 아직도 엉터리 영어라네. 그저 콩그리쉬(Konglish)인 걸 어떡하나?! 참! 아이 오우 유 원은 여기에서 흔히 쓰이는 표현인데, 내가 너에게 신세를 졌다는 뜻이지. 그리고 이 말엔 나도 기회가 되는 대로 꼭 갚겠다!는 뉘앙스(Nuance)가 강하게 풍기는 표현으로 알고 있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여섯 달 동안이나 짝사랑만 하시다가 실연하셨다고요? 참 안 되셨는데요!
어떡하겠나? 다 내 팔자이고 운명 아니겠어? 마음은 아프지만 체념할 수밖에 없잖아?
하기야 그렇긴 하지요. 세상만사가 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준이 엄마와 선 보셨군요?
아냐! 알아보니까 토론토에 결혼 상담소가 두 군데 있더군. 그래서 두 군데에 다 등록해 놓고 연락 오기를 기다렸지. 달리 어떻게 해 보기가 곤란하잖아?
그래서 선을 여러 번 보시게 됐군요?
응, 그랬어. 그런데 말야. 인연이란 게, 연분이란 게 정말로 따로 있나 봐!
아니? 왜요?
내가 만나 본 여자 분들은 하나같이 내 눈에 안 들어왔어. 선을 보고 나서 또 한번 만나보고 싶은 여성이 별로 없었거든.
그것 참!
그런데 말야. 참 세상은 공평한 것 같아. 그 여자 분들도 내게 관심이 없었던지 연락을 하는 분이 없더라구.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별 수 있어. 그래도 가끔씩 결혼 상담소에서 연락 오는 때마다 희망과 기대를 갖고 약속 장소로 시간 맞추어 나갔었지. 아, 참! 내가 재미있는 공상을 해 본 적이 있네.
어떤 건데요? 켄은 궁금해한다.
저어기 말야. 그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있잖아. 그런 식으로 선 볼 여자 분들을 한 10명 정도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그 자리에서 고르는 거야!
선배님! 그것 참 엑설런트(Excellent)한 아이디어이네요! 정말이에요!
어이! 켄! 그렇게 하다간 뺨 맞게 될 게 아냐? 그걸 만약 여성운동 단체에서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거구. 안 그렇겠어?
그럼요! 그리고 말예요. 맞선 보는 줄 알고 온 여자 분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야 물론이겠지. 그저 매번 이번에는 어떤 여성일까? 기대하면서 만났다가 실망하기를 거듭하다 보니까 그런 공상을 해 본 거지.
그런데 미국에선 실제로 그렇게 신부감을 공모한 적이 있었지요?
응, 나도 그 얘기 들었어. 그 친구는 밀리어네어(Millionaire)였다고 했어. 나중에 사기친 걸로 밝혀졌지만 말야. 내겐 그럴 배짱도 없으니.
참! 세상엔 별 꼴도 다 있지요? 그런데 사모님과 선 보신 다음 어떻게 잘 되셨나 보죠?
응, 그랬으니까 결혼하게 된 거야. 그래서 헌 짚신도 다 그 짝이 있다!는 말이 진리인 것이 증명됐지. 최소한 내게는 말야!
토니가 자랑스러운 듯 빙그레 웃는 얼굴로 말한다.
그럼 첫눈에 반하셨나 보죠?
아냐, 그렇지는 않았어. 그저 수수하게 생긴 여자인데 무척 착한 여인일 거라는 인상을 받았어.
그리고요?
커피 집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쩐지 모르게 그 여인이 무척이나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군. 특히 준이 녀석이 학교를 못 가고 숨어 살 듯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니 말야. 중학 마치고 길바닥에서 구두닦이 하던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토니는 말을 하다가 그만둔다.
.
켄도 침묵을 지킨다.
아무튼 나는 준이 엄마를 어떡하든지 도와 주고 싶었어. 혹 나하고 연분이 안 되면 내가 나서서 좋은 사람 찾아 주어야 하겠다 마음먹었지.
그러셨군요!
나도 정말 불쌍한 사람이지만 말야. 준이 엄마와 준이가 너무도 불쌍하더군. 그래서 말야.
토니는 5년 전 일을 회상하듯 눈을 감는다. 잠시 후 그가 계속해서 얘기한다. 토니는 이 가련한 엄마와 아들을 도와 주기로 결심했다. 즉 자기도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었고 갖은 고생 다 하며 살아왔음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함께 안 살아도 좋으니 결혼 신고만 해서 영주권이 나오게끔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니, 정말로 그럴 생각이 있으셨나요?
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는다.
그래! 그게 내 진심이었어!
토니가 나지막하게 대답한다.
켄! 내 미안하오. 괜한 내 신상 얘기 늘어놓아.
토니가 조금 멋쩍은지 쓰고 있는 도리웃지 모자를 벗었다가 다시 쓴다.
참! 선배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이봐, 켄! 자넨 내가 왜 이 모자를 쓰고 다니는지 아나? 멋지게 보이려 쓰는 게 아닐세. 이 도리웃지, 영어로는 페디 햇(Paddy Hat)인데, 나는 삿갓으로 여기고 밤낮으로 쓰고 다니네.
삿갓이라고요? 그 김 삿갓 말이에요?
맞아! 김 삿갓 선생의 삿갓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의 의미이거든. 안 그런가?
예, 그거야.
켄! 이 정춘성이는 말예요. 참으로 지은 죄가 많은 놈이요. 나쁜 짓도 많이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크나큰 상처를 입힌 놈이란 말이오. 알겠소?
그야 뭐.
켄, 나도 어릴 적에는 무척이나 착한 아이였어. 아버님 돌아가시고 나서 고등학교도 진학 못하고 객지생활 시작하면서부터 달라진 거야. 길거리 생활하면서 독종이 돼 버린 거야. 반항아로 커 나온 거야! 어느 놈이건 내게 싸움을 걸어 오면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깡다구가 돼 버린 거야. 자네 이해가 되나?
예? 아니오, 아니, 그게 아니구. 그래서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지요. 선배님!
어이, 자넨 배고파 보았나? 이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건 배고픔일 거야. 그래서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장 안 넘을 놈 없다는 게 아니겠어?
그렇겠지요.
켄은 실감이 안 나는 듯 맥이 없다.
켄! 난 말이야. 이런 생각도 해 보았어. 내가 열세 살부터 내 발로 서서 살아왔거든! 그래서 말야.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대학까지 부모 덕으로 마친 녀석들은 말야. 나이 서른이 다 돼서야 자기의 삶을 시작하는 게 아니겠어?
예, 서울서는 대개가 다 그렇지요!
그러니 말야. 나는 남들보다 적어도 10년, 15년 더 인생을 살아 온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어.
그렇게 보면 또 그렇네요! 켄이 맞장구 친다.
그래서 말야. 난 내 또래들보다 10년, 20년 먼저 저 세상으로 간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네. 내 말 알겠어? 켄?
참! 선배님도! 일리 있는 말씀이신데요. 그런다고 뭐, 일찍 남 보다 죽을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그래! 맞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하루, 일 분 일 초라도 더 살아야 하겠지. 그러나 나는 말야. 죄 많은 내가 언제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나도 난 웃으며 죽어야만 한다고 내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다네.
선배님! 그건 너무.
어이, 걱정 마! 이 정춘성이는 그리 쉽게 안 죽네. 아흔 살까지는 건강하게 살 거야. 사람이 죽고 사는 건 인명재천()이라 하잖아? 그리고 온실 속에서 곱게 키워진 꽃들보다는 도로변의 잡초가 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거란 말일세!
선배님! 잡초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데요. 요즘 서울에선 잡초 정치인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던데요. 노통이 이-메일 편지에 써 가지구 말예요.
응, 나도 인터넷에서 보았어. 그런데 난 그 잡초라는 표현 보다는 차라리 기생충 같은 놈들!이라 했었더라면 해. 국리민복()을 위해 일하겠다고 앞에 나선 놈들이.
.
둘이는 잠시 말이 없다.
어이! 서울 얘기는 그만두세! 우리가 오래 사는 데 지장이 있게 되니까 말야! 토니가 웃는다.
선배님, 얘기가 어떻게 이상하게 흘러갔는데요. 그, 사모님 얘기하시다 말았지 않아요?
미안해! 바로 이런 게 내 약점이야. 내가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서인지, 무슨 얘기를 하다 보면 자꾸만 딴 얘기로 흘러간단 말야. 그런 것보고 논리에 약하다고 그러지, 켄?
선배님도! 말씀을 아주 재미있게 또 조리 있게 잘하시는데요! 아시는 것도 많으시고.
어이, 커피 한 잔 더 할 거야? 내, 오랜만에 뮤직 투 이어스(Music to Ears) 들었으니 한 잔 사지.
토니가 흐뭇해 한다.
정말입니다. 선배님! 선배님은 정말로.
켄은 무슨 말을 하려다 그만둔다.
토니는 그런 켄을 보며 미소짓는다.
내, 미안하지만 금방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짐작하네. 내가 알아 맞추어 볼까? 놀리듯 말한다. 켄은 어색해 한다. 토니가 입을 연다.
자넨 그게 궁금할 거야. 공부도 제대로 못 한 사람이 어찌 그리 영어도 잘 하고 또 박식한가? 그거지?
켄은 잠자코 있다.
내 자랑이 아니라, 나는 완주중학교를 1등으로 졸업했네. 수학은 좀 못 했지만 말야. 국어, 영어, 사회과목은 항상 만점이었지. 그래서 말야. 우리 동네에서는 인물 났다고들 했었지.
참! 너무 안 됐는데요. 선배님이 공부를 계속하셨어야 하는 건데.
이제 와서 그런 생각하면 뭐하나? 내 사주 팔자가 그렇게 돼 있었고 타고 난 복이 그뿐이었는 걸!
토니가 울적해진다. 조금씩 마시던 커피가 다 식어 버렸는데도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아, 그래서 준인가요? 그 아이 학교 다니게끔 해 주려 하셨군요.
그렇다네! 정말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준이 모자에게 좋은 일 해 주고 싶었어. 나야 뭐, 항상 외톨이로 살아왔으니까 혼자서 그럭저럭 살다가 죽어 버리면 되는 거구. 또 지은 죄 많은 내가.
그래서 어떻게 되셨나요? 진짜로 결혼하셨지 않았나요?
켄! 이 세상 돌아가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거든. 내가 그렇게 가짜 결혼이라도 해 주겠다고 하니까 아마 준이 엄마가 감동했었나 봐! 그 뒤로 나를 대하는 게 조금 달라졌지.
그렇게 돼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군요!
켄은 자기 일처럼 좋아한다.
그래! 그렇게 됐지. 참! 자네, 그 나무꾼과 선녀 얘기 알지?
예에, 그 동화 얘기 알지요. 그런데요?
토니의 엉뚱한 질문에 켄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대답한다.
난 말야. 내 곁을 떠나가 버린 여인들과는 달리 준이 엄마를 내게 묶어 두고 싶었던 거야. 나이 오십의 초로의 영감! 그것도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를 어떤 여자가 좋다고 하겠는가?
그거야 알 수 없는 거죠!
아무튼 선녀에게 날개옷을 내 준 나무꾼 녀석은 정말 일생 일대 큰 실책을 범했던 거야. 그 날개옷을 감출 게 아니라 훔친 즉시 아궁이에 집어넣고 불태워 버렸어야 해! 안 그래?
말씀 들으니 정말 그렇네요!
맞아! 탐나는 여인! 영원히 내 곁에 붙잡아 두고 싶은 선녀 같은 여인이 있다면 말야. 절대로 못 날아가도록 날개옷을 없애 버려야 한단 말야.
그래서 선배님은.
그래! 그래서 우리 준이 엄마가 체념하고 이 못난 영감쟁이와 5년째 살고 있는 거 아닐까? 나이 차이가 7년이나 되는 꼬부랑 영감탱이를 버리지 않고.
하기야! 영주권 때문에 결혼한 케이스들에는 이혼이 꽤 많다고 하던데요!
그야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게 아니겠어? 남녀가 만나 서로 사랑에 빠져 결혼에 골인한 게 아니지. 그냥 처음부터 서로가 어떤 절실한 필요성에 의해 결합됐으니까 말야. 그런 경우를 메리지 바이 컨비니언스(Marriage by Convenience)라 표현하지.
그런 경우는 다만 영주권 취득을 위한 위장 결혼이겠네요?
그래! 그래서 한국에서 이혼하고 무작정 캐나다로 온 여인들이 말도 잘 안 통하는 백인 영감들과 결혼하는 케이스도 많다는 얘기 들었어.
그것 참 비극이네요. 정말로!
어떡하나? 맘에도 없는 외국인과 결혼해서 적어도 2년 간은 식모 노릇, 하녀 노릇 그리고 밤에는 그 녀석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리고 그 위에 돈도 주어야 한다고 들었어요.
그럴 수도 있겠지. 돈 받아먹은 놈이 있다면 그 녀석은 영주권 팔아 먹은 거야! 이미그레이션 머천트(Immigration Merchant)야! 영주권 장사한 거야!
선배님, 그런데 말예요. 위장결혼 해 가지구 누굴 영주권 받게 해 주었다 해서 자기 시민권이나 영주권이 소멸되는 게 아니지 않아요?
그야 그렇지! 아무튼 내 얘기 좀 들어 봐.
토니는 평소의 과묵함에서 벗어났는지 자꾸만 얘기를 늘어놓는다. 켄이 자신의 얘기를 귀담아 잘 들어주니까 신명이 났나 보다.
토니는 마음 착하고 인정 많은 준이 엄마에게 첫 번의 만남부터 은근히 반했다 한다. 그러나 준이 엄마는 이 두 번이나 이혼했다는 홀아비 영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재혼이고 뭐고 그냥 인천으로 돌아가려 했다. 인천에 가서 떡볶이 포장마차라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처음 캐나다에 올 때는 안 오겠다고 떼를 쓰던 준이가 이젠 캐나다에서 살자고 졸라대는 게 아닌가?
그녀에게 반해 버린 토니이다. 교회에 안 다니던 그가 그녀의 환심을 사고자 그녀가 다니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줄담배를 피워대는 골초이면서도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한다. 또 준이의 호감을 사고자 애쓴다.
어이! 켄!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적장을 사로잡으려면 그가 타고 있는 말을 쏘라고 말야.
예, 손자병법에 나와 있지 않아요?
그래! 나는 조심스럽게 준이에게 다가섰지. 그 녀석이 내게 호의적이어야만 성사가 되는 게 아니겠나?
그야 물론이지요. 아들녀석이 싫다고 하면 엄마가 어떻게 시집가겠어요?
그래! 그래서 나는 말야. 준이와 준이 엄마에게 재미있는 카드 게임을 가르쳐 주고 함께 놀았지.
그거 참 잘 하셨네요! 그런데 무슨 게임인가요?
응, 러미(Rummy)라는 플레잉 카드(Playing Card) 놀이인데 무척 재미있거든.
저는 잘 모르는 게임인데요. 카드 게임이라면 포커와 올 마이티 게임은 할 줄 알지요.
그럴 거야. 러미는 한국에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 백인 아줌마들이 즐겨하는 거라고 들었어.
그런데 어떻게 그 게임을 할 줄 아셨어요?
응, 옛날에 백인 아줌마가 가르쳐 주었지. 둘이서도 할 수 있거든. 어이, 또 얘기가 다른 데로 가 버렸군! 하며 토니는 준이 엄마 얘기를 계속한다.
토니의 끈질긴 구애작전과 더불어 한국에 가기 싫다는 준이 때문에 심성이 착한 준이 엄마는 드디어 결심했다.
거기에 토니는 가짜 결혼을 해서라도 영주권 받도록 해 주겠다고까지 제의했지 않는가? 그래서 마음에 별로 안 드는 토니이지만 아들의 교육과 장래, 더 솔직히 말해서 영주권 받기 위해 그와 결혼을 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둘은 권사님들의 소개로 맞선 본 지 한달 보름 만에 부랴부랴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게 됐다.
시청에 가서 판사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할 수도 있지만 토니는 교회에서의 결혼 예식을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녀 총각이라면 몰라도 재혼 케이스 아닌가? 찬물 한 그릇 떠 놓고서 백년가약 예식을 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토니는 그녀에게 신부 드레스를 입게 하고 전 교인이 참석한 가운데 담임목사님의 주례로 예식을 치루기를 고집했다.
자넨 어떻게 생각해?
아니, 무얼 말인가요?
결혼식을 교회에서 성대하게 거행한 것 말야?
잘 하신 것 같아요.
켄이 별 생각 없이 대답한다.
이봐! 켄! 내가 아까 선녀의 날개옷 얘기했잖아!
아! 그럼 날개옷을 태우신 건가요?
아냐, 그저 한쪽만 찢은 셈이지. 아이 셋은 낳아야 돼! 하하하!
토니가 소리내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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