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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 [캐나다/김희정]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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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585회 작성일 10-04-30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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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김희정] 도망

나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때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오직 한 가지 생각은 이 답답한 소굴에서 나 자신을 탈출시키는 일 뿐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내 스스로에게 준 자유였으며 스스로를 칭찬할 만한 용기였고 지극히 따분했던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도망
 
한참을 달린 듯싶었다. 정신없이 뛰쳐나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쉴새없이 도망치고 있다. 문득 나는 달리기를 멈추었다.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감히 예감할 수도 없었던 섬뜩한 공포였다. 난 내가 왜 도망치기 시작했었는지 그 이유를 망각하고 만 것이다! 분명 나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달리고 있었고 숨이 넘어가도록 헐떡이기까지 하고 있었으나 이제껏 달려오며 지나간 시간들은 이미 기억 속에 없는 현실이 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뛰기 시작하였으며 왜 도망치고 있는가?
혼란스럽게 밀려오는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난 내 옆을 쉴새없이 지나쳐 가는 사람들을 피해 도로변으로 비켜 섰고,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잠시나마 내 자신에게 약간의 휴식을 주었다. 숨가쁘게 도망치다 갑자기 멈춰 서서 여유를 부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이란!
한겨울이었다. 그것도 눈발이 제법 날리는 등골이 오싹하리만큼 추운 겨울이었다. 목도리를 칭칭 감아 매고 두꺼운 외투 속에 자신들을 꽁꽁 숨긴 사람들이 펭귄처럼 뒤뚱뒤뚱 지나간다. 그들은 추운 겨울을 빨리 피하고 싶은 듯 하나같이 어설픈 뒤뚱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모두들 경직된 굳은 얼굴에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미친 듯이 도망치던 도중에 말도 안 되는 여유를 부리는 나 따위엔 관심조차 없다.
갑작스러운 추위가 나를 급습하였다. 털장갑을 끼고도 손이 시린지 호호 부는 사람들에 반해 난 꽁꽁 언 맨손과 맨발이었으며 낡은 여름 청바지에 흰색 민소매 셔츠가 초라하고 민망할 정도로 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뭐가 급해 나는 이 추운 날씨에 이런 차림으로 밖으로 뛰쳐나왔을까? 도대체 시작은 어디인가?
순간 난 내가 어쩌면 쫓기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를 쫓고 있지 않았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러나 답을 찾을 수 없다. 눈발이 제법 굵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관심 속에 지나쳐가고, 나는 한겨울의 길 한복판에서 내가 있는 세계를 의심하며 멀뚱히 서 있다.
너무 추웠다. 발끝까지 꽁꽁 언 내 몸은 이제 얼음처럼 차가웠고 강도 높은 지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일단 몰아쳐 오는 추위를 피할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있는 동네마저도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난 여전히 내가 왜 뛰기 시작했나 의문을 품고 생각을 되씹어 보며 우선 가까운 편의점으로 방향을 정하였다. 어디선가 은은하게 구세군 종 소리가 귓가를 울려 왔다. 나를 부르는 소리 같았다. 차가운 돌바닥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면서 뒤뚱거리는 발걸음을 옮겨 주는 내 발바닥은 이젠 감각없이 무뎌졌다. 그러나 난 악착같이 서둘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나는 편의점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에 손을 가져갔다. 차가워야할 손잡이는 진한 열기를 뿜듯 순간적으로 내 손바닥에 뜨겁게 느껴졌다. 누군가가 내가 잡기 전에 이것을 먼저 잡았기에 따뜻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온기였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가슴 깊이 따뜻함을 느꼈다. 그리고 점점 움츠러드는 내 몸을 어렵게 가누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서자 앞 쪽에서는 그리웠던 훈훈한 온기가 그리고 뒤에서는 이제 막 박차고 들어온 문이 닫히며 그 움직임 사이로 들어오는 섬뜩한 찬기가 내 등을 후려쳤다. 덜덜 떨리던 이는 이제 딱딱 소리를 내며 부딪히고 있다. 그 순간에도 내가 도망의 시작에 대한 기억을 찾아 내려 애쓰고 있었던가? 기억이 없다.
편의점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한적한 편의점 안에 덩그러니 놓여진 내 신세는 거리의 지나가는 수많은 무관심한 사람들 틈에 멀뚱히 서 있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편의점 안은 아무리 훈훈한 온기가 있어도 차갑고 싸늘한 공간이었다. 내가 불안한 눈으로 누군가를 찾아 편의점 안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을 무렵이었다. 때마침 편의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열린 문이 몰고 들어오는 찬기가 휘몰아쳐 들어왔건만 난 왜 그 순간 그것이 반가웠는지 모른다.
편의점 이름이 반듯하게 새겨진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이 곳 직원임이 틀림없었다. 그녀의 기다란 싸리빗자루 끝에 눈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니 아마도 그녀는 바깥의 눈을 쓸어 내고 들어오는 길인 듯했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편의점에 들어오기 전에 분명 문 밖에 있었을 그녀를 보지 못했던가?
그녀는 빗자루에 묻은 눈을 문 밖으로 쓱쓱 털어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코끝이 빨갛고 양 볼이 핑크빛으로 물든 것으로 보아 그녀도 분명 추위를 느낀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도망나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동지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의 반가움을 외면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나를 무심히 지나쳐 갔다. 마치 내가 그 곳에 존재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어찌 나를 모른 척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때만큼은 싸리빗자루를 들고 유유히 지나치는 그녀가 편의점 직원이 아니라 빗자루를 탄 마귀할멈 같았다. 내가 그런 엉뚱한 시각으로 그녀를 쏘아보는 동안 손님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젊은 여자와 눈사람처럼 겨울 외투 속에 꽁꽁 파묻혀 눈만 말똥거리는 작은 꼬마 녀석이었다. 여자는 꼬마를 잠시 카운터 앞에 내버려 두고 이것저것 먹을거리며 살 물건들을 골라 집기 시작했다.
빨간 벙어리 장갑에 하얀 오리털 점퍼, 흰색에 빨간 줄이 두어줄 들어간 무척이나 따뜻하게 생긴 목도리, 게다가 사자모양 털모자를 뒤집어 쓴 그 꼬마는 외투의 부풀음 때문에 버거웠는지 양 팔이 몸에 닿지 않을 만큼 멀리 벌어져 있었다. 눈이 묻은 빨간 부츠가 그나마 녀석을 간신히 지탱해 주는 듯했다. 꼬마는 내가 자신을 세심히 관찰하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역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가씨, 여기 계산이요.
싸리빗자루를 들고 내 옆을 무심히 지나쳤던 편의점 그녀는 꼬마와 함께 온 이 젊은 여자의 부름이 있고 약 30초 만에 카운터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뚝뚝한 표정과 미소도 없이 싸늘한 얼굴이 예쁘지도 않은 그녀를 더욱 못나고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예의상의 인사를 건네지도 않았으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인사 역시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 물건들이 바코드를 통해 삡삡 스캔되어지고 봉지 속에 담기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난 후 드디어 그녀가 뜻밖의 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4700원입니다.
여자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 값을 지불하는 동안 꼬마의 눈동자가 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수십 차례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꼬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편의점 그녀의 손에 만 원짜리 지폐를 쥐어 주었고 잠시 후 여자의 손으로 4300원의 거스름돈이 되돌아왔다. 돈. 순간 난 돈을 찾기 위해 바지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뒤적여 보았으나 집히는 것은 달랑 동전 두 개였다. 돈 거래가 끝난 후 봉지를 집어든 여자를 따라 꼬마는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시선을 치우고 뒤뚱뒤뚱 걸음을 옮겼다.
아, 저렇게 하는 거로군.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고.
새삼스럽게 지켜본 그 광경이 이상하게도 낯설었다.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왔는가?
여자가 편의점 문을 밀어젖혀 겨울의 찬기가 내게 원치 않게 전해질 때쯤, 여자를 따라나서던 꼬마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꽁꽁 뭉친 차가운 눈덩이를 힘껏 내던지듯 내게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안 추워?
추웠다. 그래서 이 편의점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난 그 사이 몸이 어느 정도 녹자 추위는 잠시 잊고 쓸데없이 주위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참견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자신이 참으로 간사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마는 내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젊은 여자를 따라 나가 버렸다. 분명 그 젊은 여자는 꼬마의 엄마였을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하며 그들의 멀어짐이 정신없이 다니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질 때쯤 난 편의점 그녀를 찾기 위해 시선을 다시 되돌려 왔다. 그러나 거짓말처럼 그녀의 모습은 또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이 여자는 정말 너무 하는군.
난 이제 당당히 내 권리를 찾으려 발버둥치는 사람처럼 편의점 안 그녀의 모습을 샅샅이 찾아보았다.
도대체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때 문득 좀 전에 꼬마를 데리고 왔던 여자의 행동이 머릿속을 스쳤다. 옳거니, 바로 그거였다.
아가씨, 여기 계산이요.
나는 헛기침 소리와 함께 내 스스로에게도 낯설게 느껴지는 이상스러운 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바람처럼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눈길조차 없었고, 기계에 인식된 로봇처럼 자연스럽게 물건을 찾아 카운터 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거긴 당연히 아무것도 없었다. 난 물건의 계산을 위해 그녀를 부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순간 무슨 심술이 났던 건지 나는 죄없는 그녀에게 당황스러울 만한 질문을 내던졌다.
물건은 거기 없소. 여기 있잖소. 나 말이요. 내가 얼마 정도의 가치로 보이오?
헛, 그 말투는 또 왜 그렇게 나왔던가.
그러나 그 질문 안에는 나를 이제껏 보이지 않는 유령처럼 무심히 대하고 있는 그녀에 대한 서운함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튼 표정없이 냉담한 그녀가 드디어 내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조금의 당황스러운 기색조차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녀는 나를 짧은 순간 안에 메모리에 저장하듯 힐끔 훑어본 후 스스럼없이 내게 되물었다.
아저씨, 지금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데요?
그 목소리는 나를 같잖게 생각하는 듯하기도 했고, 나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듯하기도 했으며 오히려 비웃으며 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난 그녀의 질문에 아까 꼬마를 의식해 손에 쥐어 보았던 바지 속의 동전 두 개를 끄집어 내었다. 누런 동전 두 개. 이십 원이 내 손바닥 안에서 펼쳐졌다. 무슨 당당함에서였는지 나는 이십 원이 달랑 담긴 내 손바닥을 그녀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로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단돈 이십 원.
냉담한 대꾸와 함께 또다시 그녀의 웃음은 말끔히 사라졌다. 그것이 내가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인가? 내 가치가 내 손에 쥐어진 단돈 이십 원이라니, 그 황당함이란! 나는 그런 하찮은 존재였다. 아무도 내가 추위에 떨든 얼어 죽든 상관않는다. 이십 원 잃어버렸다고 울며 불며 할 일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이십 원 정도 잃어버렸다고 울며 불며 한다면 그깟 이십 원 너도 나도 주겠다고 할 것이다. 내가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엉뚱한 생각에 잠기는 동안 그녀는 또다시 카운터를 빠져 나갈 참인 듯했다.
아가씬 도대체 어딜 그렇게 사라지오? 손님 받거나 장사할 생각도 없소?
그녀는 별 신경을 다 쓴다는 귀찮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며 짧게 대꾸한다.
아저씨가 무슨 상관이에요?
빙고! 정답이었다. 아무도 나 따윈 신경도 안 쓰는 마당에 난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삶에 관심이란 말인가?
아마도 나 혼자 너무 예민했던 모양이다. 그렇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사람들은 상대의 존재와 가치를 모두 귀찮아하고 있다. 갑자기 밀려오는 그 허탈함과 공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어디서부터 이렇게 도망치기 시작했는지 기억에도 없고, 당장 이 편의점을 나가면 추위에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도 걱정해 주긴커녕 내가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식이다. 내가 너무 가여웠다. 더 이상 편의점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이십 원을 소중한 보물처럼 손에 꼭 쥐고 편의점을 나왔다. 한번 따뜻함을 느꼈던지라 이제 다시 느껴지는 그 추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살을 찢는 듯 아플 정도로 차가웠다. 그러나 다시 곧 둔해지고 말 것이다. 난 이제 추위가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겨우 이십 원의 가치에 죽어도 관심 줄 사람조차 없는 나 같은 존재에 대한 내 스스로의 포기가 아니었나 싶다.
거리에는 다가올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짝을 지어 지나간다. 그들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고 행복해 보인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된 빛처럼 말이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 틈에서도 환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나 따위엔 관심도 없다. 내가 부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일 년 중 이맘때쯤이면 늘 들리는 구세군 종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아까부터 어렴풋이 들렸다. 그것이 내 발걸음을 편의점으로 옮겨 추위를 잠시 녹이게 해 준 희망이기도 했고 말이다. 나는 이번엔 그 구세군 종 소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붙은 내 몸은 이제 내가 걷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했다. 난 그저 기계에 인식된 것처럼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길거리에 속속 나타나는, 어쩌면 이제 상징적인 의미가 되어 버린 그 낯익은 구세군 자선 냄비 옆에는 항상 있어야 할 존재인 종을 흔들고 있는 사람이 겨울 외투로 완정 무장을 하고 서 있었다. 그 역시 표정이 없었으며 마치 반복되는 시계추처럼 일정 간격을 두고 종을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돈을 집어 넣고 가는 사람은 역시 보기 힘들었다. 하긴 그들이 남 따위에 관심이나 있던가. 난 이제 거의 뻣뻣해져 움직이기조차 힘든 몸을 가누며 구세군 종을 흔드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의 눈이 순간적으로 나를 훑어봄을 느꼈다. 그의 눈에는 아마도 내가 자신에게 구걸하러 다가오는 거지로 보였을 터다. 그러나 난 그에게 구걸하기 위해 다가선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잠시 구세군 자선 냄비 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지폐도 보였고 동전도 제법 들어 있었다. 왜 순간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마음이 뿌듯했는지 모른다. 나는 나를 의식하며 여전히 같은 동작의 반복으로 종을 흔들고 있는 그 사람은 대체 여기다 얼마나 넣었나 물어보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그 역시 내가 상관할 바 아닌 남의 일이 아니던가.
일단 나는 내가 가진 전부인 이십 원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 속으로 떨어뜨리기 전에 덜덜 떨리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입을 열어 그에게 말했다.
이, 이것이, 내 전 재산이라오. 하, 하찮게 생각마오. 나, 난 이, 이십 원의 가치밖에 어, 없는 사람이라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요. 더 도, 돕고 싶어도 모, 못 한다오.
누가 물었던가? 그들이 내가 얼마나 넣든 신경이나 쓸 텐가?
그러나 난 왠지 설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잠시나마 나의 전부였던 애틋한 이십 원이 구세군 자선 냄비 안으로 떨어졌다. 종을 흔들고 있던 그는 그제서야 나를 유심히 살피는 듯했다.
혹시 그는 왜 이것만 주냐고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는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단돈 이십 원을 넣으면서 주저리주저리 몇 마디 건넨 것이 귀찮았던지 아니면 구걸을 참으로 이상스럽게도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난 이제 빈털터리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나마 전화 한 통조차 할 수 없었던 단돈 이십 원마저 구세군 자선 냄비에 집어 넣었다. 그런데도 난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난 오히려 내 자신이 한 일에 마음이 따뜻했으니 이게 웬일인가.
이제 더 이상 걷기조차 힘들어졌다. 또다시 어디론가 들어가야 하는데 이젠 그나마 생색낼 단돈 이십 원도 없으니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남아 있긴 할까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멈추지 않고 차라리 계속 뛰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뛰고 싶어도 그럴 기력도 없으며 온몸이 얼어붙어 초라하기만 하다.
도대체 거기서 왜 갑자기 멈추어 서서 새삼스럽게 도망치기 시작한 이유를 생각하게 된 걸까? 그게 중요했을까?
난 아까 분명 당당하게 편의점에 들어갔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많은 가게 안이나 카페 안을 기웃거리기가 창피해졌다. 어차피 그들은 나에게 관심조차 없을 터인데 왜 그렇게 느꼈는지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지하도로 향했다. 그 곳은 내가 잠시 앉아 몸을 녹이고 쉬어 간다 해서 나가라고 할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들은 서로 밀치고 당기고 부딪힌다. 그러나 아무도 서로에게 미안한 생각이 없어 보이고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다. 도대체 그들은 뭐가 그리도 바쁜지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지하도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나는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더 이상 내 자신을 버티고 세워 둘 힘이 없었고 온몸이 얼어붙어 더 이상 내 몸 같지도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쉴 틈 없이 지나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발들이 시야를 가득가득 메워 왔다. 어지러웠다. 속이 메슥거렸고 참을 수 없는 고통마저 밀려 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하여 나를 도와 주려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졸리웠다. 나도 모르게 스르륵 눈이 감겼다.


나는 늘 불만이 많고 짜증이 많은 사람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회사일이 지겨웠고 잔소리를 늘상 하는 아내가 귀찮았으며 크리스마스라고 선물을 사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이 미웠다. 컴퓨터 앞에서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는 일은 지긋지긋했고, 회사에서 연락올 때까지 컴퓨터 화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못할 노릇이었다.
언젠가부터 단조로운 일상이 참으로 지겹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지는 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 그 모든 것이 귀찮았고 짜증스러웠다. 사실 알고 보면 남들이라고 다 비슷비슷하게 살고 있건만 나만 유독 특별나고 싶었던 욕심이 많았던 것인지 아무튼 난 내가 처한 상황이 싫었고 지겨웠다.
내 머릿속은 언젠가부터 잔꾀로 가득 메워져 갔고, 난 점점 짜증과 불만이 가득한, 그래서 얼굴엔 웃음도 거의 없이 늘상 찌푸린 얼굴을 한 사람이 되어 갔다. 아내가 외식 한번 하자고 하면 밥 하기 귀찮으니 밖에서 해결하자는 말로 들렸으며, 아이들이 장난감을 사 달라는 말은 마치 당연히 맡겨 둔 것을 찾아 가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난 컴퓨터 앞에서 진종일 일을 하는 피곤한 직업을 택한 대가로 돈은 부족하지 않게 벌고 있었으나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기쁨을 주지 못했다. 난 돈 버는 것마저 귀찮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가족마저 귀찮았다. 생각해 보니 나란 사람은 도무지 왜 사는지 의문이 가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그 날은 사실 아내와 함께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을 함께 사러 나가기로 한 날이었다. 아이들도 그 날만큼은 기대에 한창 부풀어 있었고, 아내도 원하는 외식을 한다는 마음에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 나? 난 그저 오늘은 조금 다르게 하루를 보내나 싶어 약간의 변화를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모두들 꽃단장을 하고 집을 나설 채비를 서둘렀다. 아내는 작년에 새로 산 겨울 코트를 꺼내 입었고, 아이들은 털장갑과 목도리까지 칭칭 동여매 독감을 대비한 비무장을 시켰다. 나도 오랜만에 아내가 손수 떠 준 다갈색 스웨터를 입었고 그 위에는 롱 코트를 걸쳤다. 회사에서 전화가 온 것은 바로 우리 식구가 이렇게 단란한 외출을 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회사에서 온 전화를 받고 집에 있어야겠다는 내 말에 아내와 아이들은 실망한 표정이었다. 난 아내에게 아이들 선물을 대신 사주라며 신용 카드를 내 주었고 아이들은 대강 달래 보냈다.
컴퓨터 앞에서 지키고 앉아 있는 하루가 그 날만큼은 보통 때보다도 더 지겹고 힘들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알콩달콩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시내를 활보하며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터인데 나는 왜 이 방구석에 처박혀 그들에게 화려한 여유를 주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이러고 있어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은 그토록 내 생활이 참을 수 없이 싫었고 미칠 만큼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입고 있던 다갈색 스웨터를 집어 던졌다. 마음이 답답했던 탓인지 갑자기 너무 더웠던 것이다. 양말도 짜증스럽게 벗어 집어 내던졌다. 바지도 여름에 집에서나 입는 닳아빠진 얇은 청바지로 갈아 입었다. 한숨도 푹푹 내쉬었고 부엌에 가서 찬 물도 한 컵 들이키고 왔다. 그렇게 나름대로 다시 마음을 다잡고 돌아왔는데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컴퓨터 화면에 떠 있던 스크린이 일시 정지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이런 젠장!
나는 얼어붙은 컴퓨터를 되살리기 위해 자판을 수도 없이 두들기며 프로그램을 되돌려 오려 애썼지만 다 헛수고였다. 아무리 똑똑한 컴퓨터일지라도 그것 역시 단조로운 기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이런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안 그래도 가뜩이나 심란한 내 마음에 그 사건은 치명적인 불을 질러 버렸다.
미치겠네.
나는 컴퓨터를 원망했고 회사를 욕했으며 내 신세를 한탄했다. 그 때 내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는 신호가 울렸다. 아내였다.
자기, 저녁은 챙겨 먹은 거야? 애들이 피자가 먹고 싶다고 해서 우린 간단하게 먹고 들어갈게, 미안해. 그래도 애들이 자기 일하는데 귀찮게 하지 않아서 일은 잘 돼 가지? 아무튼 조금 있다 봐.
아내가 걱정해서 해 주는 그 말이 왜 그렇게 짜증스럽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아내가 순간 내 옆에 있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있었더라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괜한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하루를 고스란히 망쳐 버린 컴퓨터에 화가 치밀어 난 순간적으로 그것을 때려 부술 생각을 했다. 그 때 회사에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면 난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자네, 어떻게 된 거야? 잘 보고 있으랬잖아. 들어가야 할 시기를 놓친 거 아니야? 이제 어쩔 참이야? 중요한 건수를 날려 버렸으니 어쩔 참이냐고? 자네가 책임질 거야?
내게 변명할 틈도 없이 쏟아지는 상사의 고함에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상사면 이래도 되는 거야? 내가 어쩔 수도 없던 상황을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런 내 마음은 누가 이해해 준단 말인가!
제기랄! 내가 일부러 그랬어? 컴퓨터가 갑자기 다운됐어. 나더러 어쩌라고? 책임? 내가 왜 책임져? 내 하루를 망친 당신이 내 인생 책임져!
나는 신경질적으로 상사에게 소리를 냅다 지르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 죄없는 휴대폰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빌어먹을. 그래 다 관두면 될 것 아냐.
난 순간적으로 박차고 방을 나갔고 신발조차 신지 않은 그 차림으로 바깥까지 뛰쳐나갔다. 그리고 뛰기 시작했다.
난 어디로 갈 생각이었을까.


이봐요, 아저씨. 이보세요.
누군가 나를 심하게 흔들었다. 나는 기력이 없는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멀끔하게 생긴 젊은 청년이었다. 드디어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그 청년이 어찌나 반갑던지 나는 그만 그에게 실없는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정신 이상자인가 봐.
이번에는 젊은 청년 옆의 아담한 체구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멀끔한 청년의 옆구리에 팔짱을 낀 채 코알라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연신 꺼리는 눈치로 청년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정신 이상자라니? 내가 정신 이상자라니?
나는 소리치고 싶었으나 그것은 그저 내 머릿속에서 멈춘 생각에 불과했다. 내 몸은 이제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가자, 자기야.
여자가 청년의 팔을 자꾸만 잡아당겼다. 청년은 분명 그냥 지나치기 힘든 얼굴이었으나 옆에서 아이처럼 떼쓰는 여자의 힘에 못이겨 결국 슬슬 내게서 비켜서는 눈치였다.
저런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라고.
여자의 솔깃한 말에 귀가 얇아 그냥 가 버리는 녀석을 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젊은 청년은 여자를 따라가며 두세 번 뒤돌아 나를 보았으나 다시 나한테 돌아오지는 않았다.
잠시 후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을 때 난 혹시나 그 청년이 돌아왔나 하는 마음으로 올려다보았지만, 나를 한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그 멀끔한 청년이 아닌 두 명의 경찰관이었다. 그들이 나에게 뭐라고 궁시렁궁시렁 쏟아 내는 말들이 난 더 이상 귀에 들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야는 흐릿하다 못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왜 내게 신경을 쓰는 거야?
내가 새삼스러웠던 점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피해가 간다든지 혹은 나의 존재가 해가 된다고 느꼈을 때에만 내게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하얀 병원의 입원실에 덩그러니 나를 데려다 눕혀 놓고 치료까지 해 준 건 고마웠지만 그들의 마음 씀씀이는 사실 그다지 고마워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아픈 환자이니 치료를 해 주는 것이었을 뿐 내게 특별한 관심이 있다거나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랜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난 비로소 내가 마침내 짜증스럽던 일상을 탈출했으며 그렇게도 지겨워하던 단조로움에서 제대로 도망쳐 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있는 곳은 그 지긋지긋한 방구석에 틀어박힌 컴퓨터 앞이 아니라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돈된 하얀 병실이었고,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언제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와 지시가 내려지나가 아니라 언제쯤 이 병실을 나갈 수 있을까 하는 나 자신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는 분명 원하던 새로움을 얻었고 자유로워야 했으며 그것을 기뻐해야 할 처지였지만 내 몸은 분명 자유롭지 못했고 난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동상에 걸려 다친 몸이 내 자유를 억압하고 있었고, 병원이라는 곳 자체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어디에 있어도 더 이상 행복하지 않고, 그 누가 상냥히 대해 와도 지나친 관심 혹은 쓸데없는 친절함이라며 욕을 하는 또다른 불만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아내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며 병실에 눕혀진 내 모습을 한탄하며 슬퍼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는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되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진심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지만 의아스러워하는 눈치도 있었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분명 외출 전까지도 멀쩡히 잘 있던 남편이 이 추운 겨울 날에 무일푼에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동상에 걸려 얼어 죽게 된 것을 신고 받고 달려간 경찰이 병원에 옮겼다니, 그 누가 이런 터무니없는 말을 믿는단 말인가. 그러나 더욱 이상했던 점은 그렇게도 원하던 도망을 이뤄낸 내 자신도 아내에게 떳떳하게 변명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나는 그저 지긋지긋한 일과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그랬다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믿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나조차도 모르게 생각 없이 저지른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난 기껏 도망치다가 문득 이제껏 보지 못한 지극히 색다른 또 하나의 현실을 보고 만 것이다. 그래서 달리던 발길을 멈추었고 그 곳에서부터 기억을 되돌려 더듬었던 것이다.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러나 아직도 잘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도대체 난 왜 그렇게 생각 없이 무작정 도망쳤던 것일까.
그것은 물론 순간적인 선택이었고 그다지 생각이 많이 필요치 않은 결단이기도 했다. 그 순간 만큼은 나를 막고 있는 모든 틀을 벗어나 내 마음대로 했다. 그 순간 만큼은 그것이 내게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무작정 저지르고 보아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 만큼은 도망이라는 것이 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나의 이런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아내는 영문도 모르는 일이라며 옆에서 울다울다 지쳤다. 내 아이들은 나를 가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경찰들은 그저 내 뒷조사를 하기 바쁠 뿐이고, 의사들은 나를 정신병동으로 옮길 궁리를 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원했던 자유이며 선택이었던가.
도망치듯 뛰어나와 내가 잠시 동안 바라보았던 세상은 답답한 내 가슴을 뚫어 주긴 했으나 사람들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더없이 뼈저리게 느끼게 했고, 내 자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초라해짐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비장한 각오로 집을 나왔어도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오히려 더 가여운 신세와 다를 게 없었다. 그것은 그 순간에는 내 스스로에게 준 자유이며 최선이었을지는 몰라도 결국 내 자신을 더욱 세상의 틀에 얽매이게 만드는 구속이었고 나 자신을 더없이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어리석은 방법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끝까지 도망치지 못했던가.
도망치던 그 잠시 동안 사라졌던 기억들은 도대체 왜 영원히 사라지지 못했을까. 그리고 나는 왜 끝까지 도망치지 못함을 이제와 후회하고 있는가. 어째서 나는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다가 멈추어 섰으며 문득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는지 이젠 그 기억이 없다. 한참을 정신없이 달렸을 땐 분명 내가 왜 도망치기 시작했었는지 나 자신에게 질문을 했었고, 그 기억을 더듬으려 애썼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된 답도 하나 얻지 못한 채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비록 내가 완벽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는 데도 이제는 확연히 달라진 것이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나에게 관심을 쏟는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누워있고, 새삼스럽게 그 의미를 깨닫고 있다. 나는 분명 아내가 귀찮았고 아이들이 지겨웠으며 회사 일을 때려치고 싶었다. 그것은 지긋지긋한 일상이었고 불행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와 새삼스럽게 눈물까지 보이며 내 걱정을 하는 아내가 그렇게도 사랑스럽고 고맙게 느껴질 수가 없으며, 하마터면 내 아이들이 커 가는 모습을 보지도 못하고 얼어 죽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니 살아 있다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밖에서 무일푼으로 벌벌 떨어 보니 그래도 그만큼 편하게 일한 회사도 없지 싶었다. 나를 정신 이상자로 보는 경찰관과 의사들에게도 처음으로 내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할 용기도 생겼다. 그리고 동상의 후유증에서 완치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의지도 필요했다. 그것은 분명 새로운 삶이었고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작은 행복이었다.


내가 도망치기 시작했던 순간은 분명 내가 있던 곳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 순간의 선택을 따라 무작정 달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던 것들에서부터 달아나고픈 욕구였고 지극히 따분하고 단조로왔던 일상에서의 탈출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달라진 게 없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이제는 신기하게도 모든 것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달라져 있다. 나는 진정한 자유를 찾았으며 더 이상 도망치고 싶은 자극도 없다. 나는 결국 완벽한 도망에 성공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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