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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그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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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Friday 댓글 0건 조회 1,555회 작성일 17-08-26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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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그림 그리러 나가는 길에, 동네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3년 전 그린 적 있었던 70년 된 한옥집의 주인이었다. 대문 앞 골목길에 앉아 그리는 나를 신기한 듯 구경하고, 집 안으로 데리고 가 따뜻한 차도 여러 번 끓여줬었다. 너무 과하게 반가워한다 싶어 갸우뚱하는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나 그림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림교실에 나간 지 벌써 6개월 됐어요!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올해로 일흔일곱인 김희숙씨. 핸드폰을 열어 그동안 그린 그림들을 보여준다. 주전자, 단지, 강아지 인형 등을 명암을 넣어 잘 그렸다. 평생 그림이라곤 한 번도 그려본 적 없었던 김 할머니는, 골목에 앉아 할머니 집과, 할머니가 가꿔놓은 담 밖 화단의 도라지꽃, 채송화를 그리던 내 모습이 그렇게 부러웠단다. “‘나도 젊었을 때부터 그렸으면 저렇게 그릴 수 있었을 텐데. 아이고 헛살았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연히 종로문화센터에 들렀다가 그림 수업을 보고는 덜컥 신청해버렸죠.”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그림 수업이 이젠 할머니의 가장 큰 즐거움이 됐단다. 덩달아 나도 흥분해, 할머니 그림에 폭풍 칭찬을 퍼부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림 그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내 그림 전시회에 와서 오래오래 그림을 보고, 뭔가 이야기 나누려는 사람들. 페이스북에 올린 내 그림에 ‘좋아요’를 누르는 데 그치지 않고, 꼭 만나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처음엔 ‘내 그림이 이렇게 인기가 좋구나!’ 싶어 우쭐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 속에 있는 ‘그림 그리고 싶은 욕망’의 다른 표현이었다.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고도 그림 그리며 산다는 것 때문인지, 내 존재가 ‘나도 저 정도는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를 갖게 해주는 것 같다. 이젠 먼저 “그림 그리고 싶으시죠?” 하고 묻기도 한다. “70~80%는 숨겨둔 비밀을 들킨 것처럼, 고백한다. “그림 그리고 싶어요. 그림 잘 그리고 싶어요.” “선 긋는 것부터 시작해야지요?” “지금 나이에 시작한다고 될까요?” “그림 잘 그리는 건 타고나야겠죠?” “저는 소질이 없어서 말이에요.” “소질이 있는 사람은 참 좋겠어요! 부러워요!”

누구나 살아온 시간과
부피만큼, 깊이만큼 풀어낼
자기만의 선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 선을 어떻게, 얼마나 열심히
풀어내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누구나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요. 무조건 자꾸자꾸 그립시다!!!” 내가 하는 유일한 대답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림 잘 그리는 특별한 소질을 타고난 사람이 분명 있긴 할 게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온 시간과 부피만큼, 깊이만큼 풀어낼 자기만의 선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어떤 이는 힘찬 빗줄기처럼 씩씩한 선을, 어떤 이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선을, 어떤 이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는 선을, 또 어떤 이는 포복절도할 유쾌한 선을, 각자 수십년 삭혀온 아름다운 선을 갖고 있다. 결국은 그 선을 어떻게, 얼마나 열심히, 풀어내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그려봐 봐. 그때의 느낌과 풍경을 떠올리면서, 그때의 행복감을 구도로, 색깔로 함 표현해봐 봐.” 27년 전, 직장 그림동아리 첫 시간, 선생님의 첫 주문이었다. 애인과 함께 보냈던 동강 강변에서의 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투명한 동강 물빛을 온통 적시던 달빛. 그리고 난생처음 가본 해외여행 방글라데시. 밤마실 나갔다 만난, 큰 동아리에 물 퍼담아 가던 방글라데시 소년소녀들. 밀밭에서 달빛 아래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포즈를 취해주던 그 친구들. 그때의 행복감을 떠올리며 그렸다. 난생처음 그려본 2점의 유화. 오롯이 내 감성으로 그려본 첫 그림. 그게 시작이었다. 누구나 그렇게 시작할 수 있다.

모두 유명한 화가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고, 모두 시대정신을 잡아내는 절창의 그림을 그려내는 화가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림을 그려 먹고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아니어도, 그림 그리는 일이 재미있고, 자신을 표현하는 즐거움이 있다면, 꼭 화가로 불릴 필요도 없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림을 단 한 장도 그리지 않고 그냥 죽을 수도 있었던 내가, 쉰다섯살 넘어 1년에 100장씩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종이와 펜의 낭비만은 아니지 않을까 혼자 위로해 본다. 그림은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이고, 그걸 이 세상에 살짝 또 하나 보태보고 싶은 마음, 그것뿐이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하는 가장 어마어마한 사치다. 누구나 이 정도 사치쯤 하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김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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