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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쇼핑을 - 문학시대: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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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165회 작성일 21-05-3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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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는 오래된 가방이 하나 버티고 있다. 

이십 년 동안 내 손에 들려 있던 가방.

이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아도, 나의 행보를 매일 지켜본다.

 

뉴저지에 선생으로 취직이 된 첫해, 엄마는 살림을 봐주겠다고 미국에 오셨다. 엄격하고 독선적인 엄마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다. 엄마를 떠올리면 애정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사 후퇴 피난길에서 외할아버지네는 삼랑진에 잠시 머물렀다. 사춘기 소녀였던 엄마 눈에 기차역에 붙은 광고가 들어온다. 정예부대에서 무용단원을 모집하는 포스터다. 소녀는 무용단에 합세한다. 최승희의 수제자가 이끄는 그 무용단은 당시 군 소속이었다. 할머니는 하루 이틀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딸을 수소문 끝에 무용단 천막 안에서 찾아 억지로 끌고 온다. "쌀밥도 주고 춤도 가르쳐 주는데 왜 나를 데려왔어, 전쟁이 끝나면 찾으러 오든지 말든지 하지!" 소녀는 불만을 터뜨렸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지만, 주부로서 집안을 일군 엄마는 늘 바빴다. 맏딸인 나에게 동생들을 돌보라는 중압감을 부과했다.

 

살림과 직장이 겹친 그해, 엄마의 미국 방문은 쌀쌀한 햇빛 같았다.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일 년 차 교사는 어디 나가서 교사라고 말도 못 한다. 삼 년 동안 평가를 거쳐야 정식 교사가 된다. 나는 밤늦도록 수업 준비를 하고 커다란 책을 이손 저손에 들고 출근한다. 새벽에 정신없이 나가는 내가 산만해 보였든지, 등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책들이 저렇게 무거워서야. 내가 오늘 맨해튼 나가서 네 책가방 좋은 거로 하나 사야겠다. 아마 오늘도 친구를 만나러 나갈 모양이다.

 

맨해튼에 와 있던 엄마의 친구가 5번가에서 쇼핑한 명품을 빼입은 것을 보면, 엄마는 안 그런 척 했지만, 속으로는 부러워했다. 그러던 중 웨스트 버지니아에 살던 내가 뉴저지로 이사 오자 엄마는 좋아했다. 낮에는 버스를 타고 나가 맨해튼에서 쇼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지칠 대로 지쳐서 집에 돌아오자, 엄마는 활짝 웃으며 부피 큰 쇼핑백을 내밀었다. "네 가방 아주 멋진 것으로 사 왔다." 나는 기대하면서 포장을 열었다. 근데 이게 뭐야. 장식 하나 없는 시커먼 서류 가방이었다. 그 흔한 금색 체인 하나 없고, 반짝거리는 에나멜도 가죽도 아닌, 저게 무슨 맨해튼까지 가서 사 온 가방이라는 거야!

 

나는 실망했고 화도 났다. 엄마는 평소 엄마답지 않게 풀이 죽어서 말을 절름거렸다. 맨해튼 멋쟁이들은 다 저런 것을 멨던데...... 저런 가방 든 미국 여자에게 물어봐 달라고 하니까 걔가 싫다고 하고...... 파는 데를 찾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던지...... 200불이나 하던데......

내가 한마디 대꾸도 없자, 엄마는 말을 멈추고, 밥을 차려 줬다. 고기를 잔뜩 얹은 참기름이 반지르르한 뜨끈한 미역국이었다.

 

내 눈에 그 가방은 멋쟁이가 아니었다. 한국마켙이나 교회에서 여자들이 많이 들던 짝퉁 샤넬 가방 외에는 본 적이 없는 나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팬시한 백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미국 산골에서 살면서 맨해튼을 나가본 적도 없는 촌뜨기였다. 친구를 만나러 몇 번 나가본 엄마는 패션의 도시에서 커리어우먼이 드는 가방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다음날 출근을 하려는데, 한잠도 못 잔 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저 가방 환불할 거다. 그 순간 나는 아차 했다. 아냐 엄마, 환불까지 할 건 없어, 그냥 들을게. 아니다, 네가 그렇게 싫다는데 구태여 들 필요는 없다. 엄마는 무척 노해 있었다.

 

나는 매일 그 가방을 들고 출퇴근을 했다. 볼펜, 계산기, , 지우개가 들어갈 자리가 있고, 칸막이가 있어서 내용물이 섞이지 않는다. 그 가방만 들으면 난 프로페셔날로 보였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동료 교사들은 내 가방에 시선을 준다.

That's a beautiful bag! I like your briefcase! 가방이 멋지다는 말을 수십번 들었다.

 

못다 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가방! 미국학교 선생이 된 딸을 친구에게 자랑하면서, 엄마한테는 '최고'의 딸에게 최고로 잘 어울리는, 무거워도 안 되고 패션에 뒤져서도 안 되는 가방. 맨해튼 바쁜 도시에서 길가는 사람 붙잡고, 그거 어디서 샀느냐고 서툰 영어로 물어봤던 가방이다. 파는 곳을 찾아가느라 친구의 비위를 맞춰가며 사 온 가방이다. 갈수록 존재감을 더해가는 엄마의 가방!

 

엄마!

나도 지금은 멋쟁이가 되어 있어. 맨해튼, 내가 노는 데야.

엄마, 그곳에서 잠시 내려와 나랑 같이 쇼핑가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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